北 ‘남조선 첩자’ 지목, 탈북자 김석철 씨 격정토로
● 황해도 사리원 출생…국정원 첩보활동 참여
● “北에선 ‘괴뢰 첩자’, 南에선 ‘중국인’”
● 한국 국적 회복 소송 중…“탈북자 지위 인정하라”
● 정보 당국 “중국 국적 취득한 중국인”
● 北매체 “1984년 월남 도주한 첩자”
3월 26일 오후 1시 김석철(54) 씨가 경기 안산시 단원구 양꼬치집에서 양고기와 돼지콩팥을 굽는다. 동북(東北)식 양꼬치집 주인은 중국인. 안산에 일하러 온 한족, 조선족을 상대로 꼬치를 구원 판다. 숯불에 익어가는 양꼬치에 기름이 맺힌다. 돼지콩팥 지린내에 양고기 기름 냄새가 섞인다. 군침이 돈다. 단골인 김씨가 주인 여자와 중국어로 대화한다. 여자가 이따금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옌볜(延邊)에서 오래 살았는데도 중국어를 잘 못해요. 거기서는 중국말 못해도 살 수 있거든요. 조선말로 다 됩니다.”
“괘씸하거나, 불편하거나”
그는 1965년 10월 18일 황해도 사리원시 철산동 10반에서 태어났다. 고등중학교 4학년이던 1981년 함경북도 회령으로 이주했다. 1984년 탈북했다. 두만강을 건너기 전에는 회령철길대(삼봉철길대대 회령중대 회령소대)에서 철도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한국 국적 회복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4월 17일 첫 재판이 열렸다. 2006년 태국의 난민 캠프와 2015년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서 탈북자라고 밝혔으나 정보 당국은 북한이탈주민 지위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중국에서 북한 인맥을 이용해 오랫동안 국정원 정보 수집에 협조했거든요. 훈장은 못 받아도 국적 취득에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습니다. 괘씸죄에 걸렸다고들 말하는데 왜 일을 이렇게 처리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헌법 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하므로 김씨가 태어난 사리원은 헌법상 한국 영토다. 1997년 제정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탈북민은 한국 국적을 얻는다.
“내가 염소인지, 양인지 분간해줬으면 반갑겠다는 거예요. 지금은 얼룩고양이도 아니고 양, 염소도 아니에요. 사람에게 정체성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조국이 분명하게 있는데 중국인으로 살라니 억장이 무너져요. 북조선으로는 돌아갈 수도 없으니 누가 뭐래도 한국사람 아닌가요.”
정보 당국은 “김석철 씨가 자발적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인”이라고 본다. 중국 국적 탈북민 중에서도 한국 국적을 회복한 이가 적지 않다. 강제 북송 우려가 있거나 불가피하게 중국 국적을 취득한 때는 한국 국적을 부여해왔다.
김석철 씨 부모 고향은 함경북도 명천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중국에서 1945년 광복을 맞았다. 아버지 김홍림(85) 옹은 1959년 중국 옌지(延吉)에서 사리원으로 이주했다. 중국에 거주하는 김홍림 옹(현재 중국 지린성 거주)의 회고는 이렇다.
“돈 주고 산 중국 호구”
“1959년 중국 대약진운동 때 지식인 박해를 피해 처자식을 중국에 두고 북한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조선족에게 북한 국적을 주라는 게 김일성의 방침이었습니다. 조선족은 대학도 무료로 보내주는 등 환대를 받았어요. ‘나라가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감격했죠. 북한 공민증을 받은 즉시 처와 아들 둘(광철, 권철)을 북한으로 데려왔습니다. 1965년 사리원에서 셋째 아들 석철이가 태어났고요.”
김홍림 옹의 삶에는 동아시아 현대사 굴곡이 가득하다.
“김일성이 좋은 지도자라고 생각했죠. 조선족 사이에서 북한으로 들어가 새로운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자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막상 가족과 함께 북한에 정착하니 생각과 크게 달랐습니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나빠지자 사람들이 ‘되놈’이라며 창문에 돈을 던지면서 따돌렸습니다. 가족 전부를 데리고 중국으로 탈출을 시도했는데 아내가 검문에 걸리는 바람에 저와 큰아들, 둘째 딸만 탈북하고 다른 가족은 북한에 남았습니다. 아직도 그날이 또렷하게 기억나요. 1967년 3월 13일 토요일입니다.”
김홍림 옹은 중국에서 호구(주민등록) 없이 지내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정책 덕분에 중국 국적을 회복했다. 북한에 남은 가족에겐 배반자 낙인이 찍혔다. 김석철 씨는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회령으로 이주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이혼하면서 회령에서 쫓겨날 처지가 됐다.
“국경도시 회령은 배반자 가족이 살 수 없는 곳이었어요. 새아버지가 힘이 있는 분이라 이주할 수 있었죠. 어머니가 이혼하면서 열악한 농촌으로 쫓겨 갈 처지가 됐습니다. 젊은 치기에 다니던 회령철길대를 한 달 무단결근했습니다. 배급을 받지 못하니 쌀이 동나더군요. 북한에서 더는 살 수 없겠다는 생각에 1984년 3월 11일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개산툰에서 버스를 타고 룽징(龍井)을 거쳐 옌지에 도착했습니다. 이틀 뒤 안투(安?)로 가 수소문 끝에 아버지를 찾았고요. 아버지가 당국에 뒷돈을 주고 가짜 중국 호구를 만들어주더군요. 조선 사람이 뒷돈을 주고 호구를 얻는 일이 흔할 때예요.”
김홍림 옹은 “공안국 간부에게 3000위안을 주고 호구분실자로 위장해 아들의 호구를 위조했다”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김홍림의 아들로 호구를 만든 게 아니라 안투에서 헤이룽장으로 이주했다가 되돌아온 사람으로 위장했어요. 1984년 변경정책이 엄격하게 바뀌어 탈북자는 북한으로 되돌려 보내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석철이는 붙잡히면 무조건 송환 대상이었기에 들키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북한에서의 19년 삶은 이렇게 끝났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맺는다. 중국에서 막노동해 밥벌이하던 김석철 씨에게 기회의 장이 열렸다. 한국어 할 줄 아는 게 특장이 됐다. 인천의 화교에게 옷을 받아 중국에 내다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한국 정부가 탈북민에게 한국 국적을 준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한국인 사업 파트너 S씨에게 국적을 받을 방법을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남산 지하실에 끌고 가 몽둥이찜질”
“한국에서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을 들키면 안 돼요. 남산 지하실로 끌고 가 홀딱 벗겨놓고 몽둥이찜질을 한다니까. 풀어주긴 하는데 맨 정신에 못 살아. 병신 돼서 나온다고.”
그는 S씨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때 국적 회복을 신청했으면 지금 한국 사람으로 살 거예요. 나이가 저보다 두 배나 많은 어르신 말씀이어서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중국 옌볜에서 한국산 위성안테나와 중고차를 파는 사업에 나섰다. 어느 날, 한국 정보기관 요원이 그를 찾아왔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하나가 나를 통하면 중국을 오가며 장사하는 북한 사람들을 소개받을 수 있다고 했다더군요. 정보기관 요원에게 ‘협조는 해주겠다, 단 직접 발은 못 담근다’고 했습니다. 옌볜이 위험한 동네예요. 자칫하면 북한으로 납치될 수도 있거든요. 북한 사람들이 ‘장군님, 만세’ 외친대서 속으로도 충성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속내를 두들겨봐서 ‘제도에 반감이 있구나’ 싶은 이들만 정보기관에 연결해줬어요. 속까지 빨간 사람을 소개해주다 탈이 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옌볜으로 나오는 북한 사람 대부분이 겉으로만 충성하는 이들이에요.”
국정원 기무사 정보사 등은 북·중 국경에서 경쟁적으로 정보를 획득했다.
“내가 소개해줘 한국에 군사 정보를 넘긴 A씨는 2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알아요. 2만 달러는 북한뿐 아니라 옌볜에서도 집 한두 채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어요. 비밀로 분류된 전투 규칙 같은 것을 구해다주면 1만 달러를 줬습니다.
“협조해주면 한국행 도와준다더니…”
한국 정보기관 요청을 받고 내가 처음 구해준 게 평양시 전화번호부였습니다. 너무 늦게 가져왔다면서 200달러밖에 안 주더군요. 전화번호부를 구해온 북한 후배한테 200달러를 건넸더니 내가 중간에서 돈을 떼먹은 것으로 오해하더군요.
통화 시간이 1분이 넘으면 도청이 된다는 것도 그 일 하면서 알았습니다. 은어를 썼습니다. 북한군 중대장급 이상에서 나온 정보는 ‘잠바 겸본’ 하는 식으로요. 현역 병사는 ‘바지’라고 했습니다. ‘겹잠바’ ‘돗잠바’ 같은 표현으로 등급을 나눴습니다.
정보기관 사람들이 협조해주면 한국에 오게끔 도와준다고도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사람들한테 이용만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탈북 브로커 일에도 손을 댔다. 유력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는 언론인 B씨를 그가 탈북시켰다. “북한 보위부(국가안전보위성)가 그의 활동을 눈치챘으며 체포, 납치를 시도한 적도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2006년 그는 한국인이 돼 정체성을 찾기로 결심했다. 탈북민이 모이는 태국의 난민수용소로 향했다. 8개월을 그곳에서 지냈다. 정보기관 협조자로 일한 게 오히려 발목을 잡았는지 국정원 조사관은 “이곳은 북한에서 바로 온 사람만 받는 곳이다. 너처럼 중국에 오래 있었던 사람은 대상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중국으로 추방됐다.
2013년 그의 조선족 부인이 취업비자를 받아 한국에 입국했다. 2015년 부인이 한국에서 뇌출혈로 쓰러지는 바람에 그는 병간호 목적의 임시방문 비자를 받아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해 2월 동두천경찰서를 찾아가 탈북자임을 알리고 국적을 회복하고 싶다고 했다. 경찰은 국정원 합동심문센터로 그를 넘겼다.
“국정원 조사관이 ‘태국에서 우리가 다 조사해서 북한 사람 아니라고 했는데 왜 또 왔어? 너 탈북자 인정 못 받아. 유승준이도 한국 국적이었는데 미국에서 오래 살아 한국에 못 와. 너는 두만강 넘은 것 자체가 한국인임을 포기한 거야’라고 윽박지르더군요. ‘중국 호구 위조한 게 드러나면 중국에서도 고초를 당할 거야. 조선족으로 살래? 무국적자로 여기 계속 갇혀 있을래?’ 묻는데 기가 팍 죽었습니다. 딱 한 사람이 나를 조져대는데 심리전에서 못 버티겠더라고요. ‘나가겠습니다’라고 답하니 ‘생각 잘했어’라면서 등산복과 교통비 13만 원을 주더군요.”
“1984년 월남 도주한 괴뢰정보원 첩자”
그는 2015년 4월 합동심문센터에서 나왔다. 그해 9월 북한 대남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에 북한인권운동을 하는 탈북민 C씨를 비난하는 기사가 실렸다. “○○○(C씨)은 1984년 월남 도주한 괴뢰정보원 첩자 김모에게 매수되어 탐지한 군사비밀을 넘겨줬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에 언급된 ‘1984년 월남 도주한 괴뢰정보원 첩자 김모’가 김석철 씨다.
C씨는 그의 소개로 한국 요원과 연결돼 정보기관에 북한 군사기밀을 넘겼다. 2004년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C씨는 “정수반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요원을 나에게 소개해준 게 석철이다. 석철이가 중국인라고? 내 고향 회령 사람들이 다들 석철이를 안다”면서 “정보기관 일을 해 알려지면 안 되는 비밀을 많이 알기에 국적을 얻는 과정에서 역차별을 당하는 것 같다”고 했다.
김석철 씨는 ‘우리민족끼리’ 보도가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국적 회복 소송을 시작했다.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회령 시절 지인들도 수소문 끝에 찾아냈다.
“북한에서는 조국을 배신한 첩자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중국인이랍니다. 국정원 직원이 중국인으로 사는 게 더 나을 거랍디다. 그게 할 소리입니까.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정체성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회령 시절 친구 놈들이 한국에 정착해 잘 살고 있습니다. 내가 얼룩고양이인지, 양인지, 염소인지 법원이 잘 판단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김석철 씨가 살아온 얘기를 들으면서 탈북민인 주승현 인천대 교수의 책 ‘조난자들’이 떠올랐다. 주 교수는 “탈북민을 남북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조난자”로 묘사한다. 김씨야말로 조난자 중 조난자가 아닐까.
양꼬치집의 오후는 느긋하다. 54년 삶의 여정을 말하느라 목이 타는지 그가 급하게 맥주를 들이켠다. 양꼬치 맛이 어떠냐고 묻더니 돼지콩팥을 먹기 좋게 잘라 권한다. 한국 국적을 얻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조바심이 난다. 목이 빠진다.
국정원 측은 “국정원 스파이 등은 사실무근의 일방적 주장이며 국적 문제는 관계 법령에 따라 처리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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