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정권, 싸움의 대상이지 타협 대상 아냐”
“文 정부, 北 억류 한국인 송환 왜 말 안 하나”
● 북한 선교의 큰손, 캐나다 시민권자 임현수 목사 ● 北, “급히 의논할 일 있다”며 임 목사 평양으로 유인 ● 억지 죄명 씌우려고 과거 해외 강연·설교 영상 샅샅이 뒤져 ● 캐나다 정부 노력 덕에 기적적으로 석방
● ‘통일전문가 연합네트워크’ 통해 통일운동에 본격 나설 터
“남북대화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한국 국적 억류자에 대한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나오지 않는 게 이해하기 힘들다.”
5월 4일 서울 서초구 남산감리교회를 찾은 캐나다 ‘큰빛교회’ 원로 임현수(64)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임 목사는 2015년 1월 북한에 억류됐다가 31개월 만인 2017년 8월 극적으로 풀려난 한국계 캐나다인으로 지난 4월 강연 차 한국을 방문했다. 임 목사는 이날 열린 기독교통일포럼에서 “한국 교회가 북한에 억류된 한국인들의 석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북한은 외부 여론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설명했다.
北 실상 모르는 남한 사람들
임 목사는 오래전부터 ‘북한 선교의 큰손’으로 통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그는 1986년 캐나다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州) 미시소거의 큰빛교회에서 2대 담임목사로 34년 동안 시무(始務)했다. 캐나다 시민권 취득 후인 1997년부터는 북한을 150여 차례 이상 드나들며 인도적 대북 지원에 힘써왔다. 한때 북한에서는 임 목사를 ‘VVIP’로 대하기도 했다.
2015년 1월 27일 방북 목적으로 출국한 임 목사는 나선에서 평양으로 이동하던 중 북한 당국에 의해 체포됐다. 같은 해 12월 국가 전복 음모 혐의로 무기노동 교화형을 선고받고 억류생활을 하다가 31개월 만에 북한의 병보석 조치로 풀려났다. 외국인으로는 가장 오랜 기간 억류당했다.
임 목사는 석방 이후 강연을 위해 여러 번 한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언론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았다. 자신의 발언이 자칫 ‘정치적 발언’으로 해석될까 조심스러웠던 탓이다. 이번에도 임 목사는 몇 번에 걸친 인터뷰 요청에 고사 의사를 밝히다, 고심 끝에 만남을 수락했다. 석방 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 5월 9일 인천의 모처에서 만난 임 목사는 억류 당시 고혈압, 관절염, 위장병 등으로 고생했던 것에 비해 현재 건강 상태는 “좋다”고 밝혔다. 임 목사는 “5월 말 출국 예정”이라고 했다.
- 한국에 올 때마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이번 강연의 주제는 무엇인가.
“북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주로 얘기한다. 북한을 제대로 이해해야 국론 분열 없이 올바른 대북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 서울, 경기, 제주도 등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억류됐던 경험을 되짚으며 북한의 실상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강연 때마다 청중의 반응은 어떤가.
“지난해와 비교해 올해 많이 달라졌다. 지난해에는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대화 재개로 한반도에 훈풍이 불었지만 올해는 북·미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남북관계의 앞날도 불투명해졌으니 말이다. 국민들이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강연이 끝나면 많은 사람이 나에게 ‘북한을 어떤 시선으로 봐야 하느냐’라고 묻는다. 현재 한국 국민 대부분이 북한의 실상을 잘 모른다. 그러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20년 동안 550억 규모 대북 지원
임 목사는 1995년 북한을 휩쓴 대홍수 사건을 계기로 대북 지원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 북한은 홍수로 식량이 부족해졌고 수교국가인 캐나다 정부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요청했다. 1997년 종교계 인사 신분으로 북한 평안북도 구장군 탄광지대를 방문한 임 목사는 그곳에서 수많은 주민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이후 20여 년간 북한에 교회 명의로 한화 550억 원 규모의 대북 지원을 펼쳤다.
임 목사의 대북 인도적 지원은 식량 지원, 의료 지원, 농업 개발까지 분야가 매우 다양하다. 지원 규모도 웬만한 국제기구를 능가한다. ▲대동강 즉석국수 공장 설립 ▲함흥의 선봉연유 판매소 지원 ▲2000명 수용 가능한 대형 공중목욕탕 설립은 물론 ▲‘동해바다 살리기’ 프로젝트로 대형 어선 2척과 소형 어선 50척을 제공해 수산물 수출을 지원했다. 또한 평양교원강습소를 설립해 북한의 영어교사 200명에게 영어와 컴퓨터 교육을 제공했고, 북한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경북도 내 큰 호수를 논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 대북지원 사업 중 북한이 가장 원했던 건 뭐였나.
“굶주림을 해결해주는 것이었다. 초창기엔 옥수수를 심어줬고, 나중에는 북한 자유항인 나진과 선봉 지역에 땅을 제공받아 블루베리 묘목 70만 주를 심었다. 또한 계약을 맺은 북한의 ‘하나농업회사’는 백두산 인근에 총 50만 주를 심되, 모두 유기농법으로 재배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 많은 묘목을 어떻게 구하나 고민하던 중 ‘백두산에 야생 블루베리가 많다’는 얘길 들었다. ‘설마’하는 심정으로 백두산에 갔는데, 정말 눈앞에 블루베리가 펼쳐져 있었다. 북한 주민들이 야생 블루베리의 효용성과 귀함을 잘 알지 못할 때였다.”
- 그래서 어떻게 했나.
“하루 최다 2000여 명을 동원해 백두산 블루베리를 수확해 팔았다. 일꾼들 상당수가 해산 지역 학교 학생이었다. 이들을 먹이고 재우기 위해 대형 천막을 쳤다. 그렇게 채집한 북한산 블루베리를 한국 기업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주스로 만들거나 원액으로 한국에서 판매했다. 나머지는 북한 주민들이 먹었다.”
이처럼 인도적 활동은 북한 내 대규모 고용을 창출했을 뿐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식량 보충에도 보탬이 됐다. 그는 “북한 주민은 물론 관료들도 우리를 환대했다”고 말했다.
김정일, 무사증까지 내주며 인도적 지원 적극 지지
- 북한 주민 사이에서 ‘신라면’이 큰 인기라고 하던데.
“미국의 어느 독지가가 북한 수재민을 위해 거액의 성금을 보냈는데, 그 돈으로 중국에서 라면 수백만 개를 구입해 트럭 500대에 실어 북한에 전달한 적이 있다. 북한 군인에게 ‘신라면’을 줬는데, 두어 번 맛보더니 ‘남조선 인민들은 이런 걸 매일 먹느냐’며 부러워하더라. 남한에 대해 적개심 가득하던 눈빛이 한순간 동경으로 바뀌었다.” - 배고픔을 해결해준 것만으로도 주체사상에 세뇌된 북한 주민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나.
“굶주릴 대로 굶주리다 보면 결국 악만 남게 된다. 소유권보다 생존권이 먼저 아니겠나. 사람을 살리는 일은 민족과 종교, 지역과 이념을 초월한다. 나는 대북 인사들에게 북한에 구호 물품을 지원할 때 북한에 가서 주민들을 직접 만나라고 강조한다. 북한 당국에 전달하면 ‘수령님의 하사품’으로 둔갑해버리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은 교회가 아닌 수령님’이라고 착각한다. 지난 20여 년간 교회가 주민들을 직접 만나 인도적 활동을 펼친 덕분에 이제는 북한 주민 대부분이 교회의 성과를 어느 정도 안다. 북한 사람이 탈북 후에 교회를 가장 먼저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 북한에서는 외국인의 선교활동이 금지돼 있다. 당시 북한은 목사님의 신분을 알았나.
“그렇다. 목사여도 선교활동을 하지 않고 인도적 활동만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북한 관료들은 우리의 활동을 김정일한테 일일이 보고했다. 어느 날은 김정일이 무사증(無査證·무비자 입국제도)을 보내왔다. 그 덕에 평양을 통해 언제든 북한을 들어가고 나올 수 있었다. 또 무사증과 함께 편지도 보내왔는데 편지에는 우리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북한 당국은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평양 봉수교회에서 설교를 부탁하기도 했다. 교회 안에서는 십자가를 그리고 성경 구절을 적어도 그 누구도 제재하지 않았다.”
北 요청으로 방북했다 구치소에 감금
- 북한에는 왜 억류된 건가.
“2015년 1월 초, 북한이 중국에 거주하는 선교사를 통해 나에게 급히 연락을 해왔다. ‘의논할 게 있으니 북한에 와달라’는 얘기였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무역과 관광사업을 활성화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해당 부서들이 하나로 통합됐는데, 통합된 부서장(우리나라 장관급)이 나를 만나서 도움을 요청하고 싶다는 거였다. 목회 활동이 바빠 하루 만에 북한을 다녀와야 했는데 1월 30일 나진으로 갔더니 담당자가 하루 더 묵고 다음 날 평양에 가서 부서장을 만나자고 간청해 수락했다. 그래서 같이 간 선교사는 중국으로 보내고 아무 의심 없이 나만 평양으로 갔다. 다음 날 오후 평양에 도착했는데 부서장이 오늘 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만나자고 해서 호텔에서 하루를 더 묵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호텔로 북한 사람들이 방역 담당자를 대동하고 호텔로 들이닥쳤다. 에볼라 바이러스 유입을 막는다며 외국인 입국자를 3주간 국경지역에서 격리한다는 거였다. 조사를 해야 한대서 따라간 곳이 평양 근처 구치소였다.”
- 체포하기 위해 평양으로 유인한 건가.
“그렇다. 조사실 책상 위에는 자료 한 뭉치가 놓여 있었는데, 내가 예전에 해외에서 강연하며 했던 발언들이 적혀 있었다. 북한 조사관은 나의 발언이 ‘특대형 국가 전복 음모죄이자 최고 존엄 모독죄 등에 해당한다’고 했다.”
북한의 인터넷 대외선전 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당시 임 목사 선고 소식을 전하며 임 목사가 했던 강연 영상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영상에서 임 목사는 2013년 10월 열린 세계선교동역네트워크(KIMNET)의 미주 기도성회에서 “정권을 잡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은 악(惡) 그 자체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평양의 모습은 다 ‘쇼’다. 진실은 10%도 안 된다. 북한의 공포정치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빨리 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담긴 영상을 행사 주최 측이 유튜브에 올린 게 화근이 됐다.
“CIA·국정원 아는 사람 이름 대라”
북한이 방북 인사의 해외 발언까지 문제 삼아 억류하고 재판한 사례는 처음이었다. 해외 인터넷 사이트까지 샅샅이 뒤져 방북 인사의 과거 행적과 발언을 조사한다는 얘기인 셈. 임 목사는 “북한 간부들이 나에게 죄명을 씌우기 위해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나의 강연과 설교 영상을 확인한 것 같다”고 말했다. - 북한 당국과 활발하게 교류하던 방북 인사에게 왜 갑자기 죄명을 씌웠나.
“알 수 없다. 20여 년간 북한을 오가면서 늘 조심했고 최선을 다했다. 조선노동당 산하기구 통일전선부(통전부)가 해외동포 관리업무를 관장하는데, 나를 초청해 관리하는 곳도 바로 통전부다. 평소 통전부 사람들과 관계도 좋았고, 우리의 활동이 북한에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득이 결코 작지 않기에 그들이 나를 정치적 흥정물로 삼았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 그렇다면 뭔가.
“다만 북한의 적군와해공작국(적공국) 같은 조직에서 나의 해외 강연 발언을 문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적공국은 전시에는 적군와해공작을 하고 평상시에는 대남 삐라를 살포하거나 대남방송을 맡는다. 통전부가 적공국과의 정치적 힘겨루기에서 밀렸고, ‘수령님을 모독하는 걸 두고 봐야 하느냐’는 적공국의 주장에 힘이 실리면서 내가 표적이 된 것 같다.”
- 2015년 7월 30일 평양 인민문화궁전 기자회견장에서 “북한 최고 존엄과 체제를 심히 중상 모독하고 국가전복 음모행위를 감행했다”고 범죄 혐의를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 반북 활동을 벌이는 단체와 인물을 밝히라는 기자의 질문에 미국과 브라질 등 북남미 지역 한인교회 목사와 한국 교회 목사 이름을 열거했는데.
“내 발언은 모두 북한 당국의 강요에 의한 것이다. 촬영을 두 번 했는데, 하나는 미국 CNN 방송용이고 또 하나는 기자회견용이다. 이날 기자회견장에 미국 CNN 기자가 있었는데, 북한 조사관이 나에게 미국 기자와 영어로 대화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오로지 한국말을 사용하도록 했다. 기자회견 직전에는 북한 조사관이 무슨 돈으로 대북 인도적 활동을 했는지,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국정원에서 돈을 받았는지 집중 추궁했다. CIA와 국정원에 아는 사람 이름과 알고 지내는 국내외 목사의 이름을 쓰라고 했다. ‘평양에 오면 위험하다’는 사인을 보내기 위해 목사님 몇 분 이름을 열거했다.”
캐나다 총리 전용기에 수술 장비 실어 보내
임 목사는 다른 재소자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평안북도 소재 외국인 특별 교화소 독방에 감금됐다. 감시카메라가 방에 2대, 화장실에 1대, 그 외 바깥 공간에 수십 대가 설치됐다. 그를 감시하던 간수 50명 중 40명이 권총을 소지했다. 간수들의 언어폭력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석 달 동안 설사를 계속했다. 임 목사는 수감된 지 두 달 만에 체중이 20㎏이나 빠졌다.
일주일에 6일, 하루 8시간씩 하루도 예외 없이 강제 노동이 시작됐다. 한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은 땅을 깨고 구덩이를 파는 작업을 했다. 상체는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손가락과 발가락은 동상에 걸렸다. 몸이 혹사당한 탓에 2~3개월간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외로움이었다고 한다. 임 목사는 “그동안 항상 베푸는 자로 살아서 북한 주민들이 겪는 고통을 잘 몰랐다. 교화소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주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 어떻게 석방됐나.
“2001년 캐나다는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가 북핵 문제로 수교를 끊었다. 내가 수감돼 있어도 캐나다 정부는 북한과 연락할 채널이 없어 중립국인 스웨덴 대사관을 통해 북한과 협의를 시도했다. 스웨덴 대사가 두 번이나 면회를 와서 캐나다 정부의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석방은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의 특사단이 방북한 직후 이뤄졌다. 캐나다 정부가 나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총리 전용 비행기 2대에 특사 14명을 파견했다. 건강 상태가 위급할 경우 비행기 안에서 수술할 수 있게끔 현역 외과 여의사와 수술 장비 2대를 함께 보냈다.”
극적으로 북한에서 석방된 임 목사는 “선교사, 탈북자를 포함해 국군포로와 납북어민 등 현재 북한에 억류돼 있는 한국 국적자가 수십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북한에 억류돼 있는 한국 국적 선교사 6명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들 중 김국기 선교사와 최춘길 선교사는 벌써 4년째 북한에 억류돼 있다. 이 중 3명은 한국 국적을 취득한 탈북자들로, 선교 목적으로 북한에 다시 들어갔다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임 목사는 “한국 정부가 억류자 송환 문제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싸움과 타협 혼동하면 비핵화는 물 건너가
-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두 가지 시선을 가져야 한다. 하나는 북한 주민이 우리 형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의 97%가 우리 동족이고 골육이고 형제다. 그들은 그 땅에 태어난 죄밖에 없다. 볼모로 잡혀 있는 것이다. 나머지 2~3%에 해당하는 정권 수호자들은 ‘악’을 떠받드는, 우리가 대적해야 할 대상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비전을 이룬다는 차원에서도 싸워야 할 대상이지 타협 대상이 아니다. 이를 혼동하면 북·미 대화는 물론 비핵화 가능성도 사라진다.”
- 앞으로의 계획은.
“지난 4월 서울에서 ‘통일전문가 연합네트워크’ 첫 모임을 가졌다. 나에게 이 활동은 북한 구호 및 선교 활동을 통해 통일운동에 본격 나선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통일운동에 나서면서 내가 한국 교회에 강조하는 메시지가 있다. ‘회개 운동에 나서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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