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노무현·박근혜가 구축한 新애치슨라인 무너뜨려
● 평택·제주기지는 미국의 중국 봉쇄 핵심
● 남중국해 미국 지지 = 인도·태평양 전략 참여
● 21세기 新동맹시대 연 박근혜의 한일관계 정상화
● 한민구, 사드 배치로 한미일 군사공조 대못 박아
● 안보 유산 걷어찬 文, 반일·친중으로 역주행
2015년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남중국해에 인공섬 7개를 건설한 중국을 전방위로 압박했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아세안 확대국방장관 회의(2015년 11월 5일)에서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와 관련해 미국을 대놓고 지지했으며 박근혜 정부는 한일 위안부 협상(2015년 12월 28일)을 타결했다. 북한이 4차 핵실험(2016년 1월 6일)에 나서자 한국은 개성공단 폐쇄(2016년 2월 11일)와 사드 배치 결정(2016년 7월 8일)으로 대응했다.
북한이 5차 핵실험(2016년 9월 9일)을 실시한 후 탄핵 국면이 시작됐다. 한민구 장관은 당시 야권의 극렬한 반대에도 한일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2016년 11월 23일)과 사드 배치(2017년 4월 26일)를 밀어붙임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남재준 국정원장을 대미특사로 파견한 이래 진행된 신(新)애치슨라인 안보 구상을 본궤도에 올려놓았다. 신애치슨라인은 한국의 북핵 폐기전략과 미국의 아시아 중심 정책(Pivot to Asia)을 조율한 것으로 한미일 안보 공조와 개성공단 폐쇄가 이 구상의 핵심이었다.
애치슨라인과 한미동맹 결성
강대국이 중소국의 경제와 국방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중소국이 강대국의 패권에 공조하는 게 약육강식의 생존 경쟁이 구조화한 국제정치의 본질이다. 흔히 국내 정치를 생물에 비유한다. 변화무쌍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제정치 역시 생물이다. 동맹도 변화한다. 시대가 바뀌면 강대국과 중소국의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따라서 동맹 조정은 국가 간 이해관계를 재편성하는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는 △동맹 실패 △동맹 결성 △동맹 조정의 역사로 집약된다. 조선은 청의 보호를 믿다가 일본에 강점당했다. 치열한 동맹 경쟁이 본질인 근대국가 국제 체제에서 동맹의 대상국이 되려면 최소한의 경제·국방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조선의 경제와 국방은 구한말 완전히 붕괴했다. 반면 일본은 서구와의 현격한 국력 차이에도 서양의 동맹국이 됐다. 동아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과 유럽은 중국을 침략하고 러시아의 동방 진출을 막고자 동맹국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서양의 동맹국이 됐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근대화에 실패한 조선이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제1·2차 세계대전 기간 조선의 지도층은 한반도는 물론이고 미국과 중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국제사회와 전승국에 올바르게 인정받지 못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 일본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조선은 해방됐으나, 한반도는 분단됐다.
1947년 3월 미국이 공산주의로부터 위협받는 국가를 지원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내놓으면서 냉전이 표면화했으며 대소(對蘇) 봉쇄정책도 공식화했다. 유엔은 38선 이남의 총선거(1948년 5월 10일)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를 유일한 합법정부로 확인했다. 그러면서 미·소 점령군의 조기 철수를 권유했다.
소련군이 군사고문단 3000명을 잔류시킨 후 북한에서 먼저 철수(1948년 12월 26일)했다. 미국도 군사고문단 500명을 남긴 후 미군을 철수(1949년 6월 29일)시킨 후 유엔에 한반도 문제를 이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3월 미국에 군 병력 40만, 공군기 100대, 함정 50척에 달하는 규모로 국군 전력을 증강해달라고 요구했다. 국군이 정규군과 중장비를 보유할 경우 북침(北侵)할 수 있다고 우려한 미국은 이 같은 요구를 거절하고 국군의 규모를 8개 사단, 9만5000명으로 제한했다.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하자 알류산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선을 미국의 극동방위선으로 천명했다(1950년 1월 12일). 이른바 애치슨라인(AJO Line)이 그것이다.
냉전시대의 한미동맹 조정
미국은 중국이 공산화한 후 일본을 이용해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 후 미국과 수교에는 성공했으나 워싱턴이 일본을 중시함으로써 미국과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했다. 이는 역사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며 수교했으나,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탓에 미국과의 동맹 결성에는 실패한 바 있다.
이승만은 대소(對蘇) 봉쇄의 첨병임을 자처하면서 유엔 및 국제사회와 미국의 도움으로 6·25전쟁을 이겨냈다. 미국의 원조는 신생 대한민국의 경제와 국방의 밑거름이 됐다.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 등 벼랑 끝 전술을 동원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한국 방위를 위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군사동맹이다. 이승만은 미국이 10개 국군 사단 무장안(案)을 수용하자 휴전에도 동의했다. 구한 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됐을 때 조선의 군대는 8000여 명이었다.
냉전시대의 한미동맹은 박정희 정권에서 한일수교, 베트남전 파병, 한미연합사 창설을 통해 조정되면서 발전했다. 냉전이 최고조에 달한 1960년대 미국은 한국의 군사정권에 베트남전 파병과 한일관계 정상화를 요구했다.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을 조인했다. 이로써 미국 주도하에 1951년 시작된 한국과 일본의 수교를 위한 조약 교섭은 14년의 우여곡절 끝에 성사됐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부터 1973년 철군할 때까지 8년 5개월 동안 32만여 명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한국은 파병에 대한 미국의 보상 조치를 담은 브라운 각서에 따른 한국 지원과 베트남전 특수를 통해 고용을 창출해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1969년 닉슨 독트린과 그에 따른 1970년대의 주한미군 철수 논의는 6·25전쟁 이후 한국의 최대 안보위기였다. 박정희는 북한의 침공을 저지하고 미군의 증원을 보장하기 위한 한국형 방어작전체계를 구축했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논의에 핵무장 시도로 대응한 박정희는 1978년 11월 7일 한미연합사를 창설해 한반도 전구작전(operation of theater)의 토대를 구축하는 동맹 조정에 성공했다.
탈냉전시대의 한미동맹 조정
중국 개혁·개방은 1978년 덩샤오핑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과 사상 해방에 의해 시작됐다. 덩샤오핑은 공산당 노선을 계급투쟁에서 사회주의 현대화로 바꿨다. 이후 도광양회(韜光養晦·실력을 배양하되 은거해 때를 기다린다)를 거쳐 화평굴기(和平?起·평화적 관계 및 방식으로 우뚝 선다) 노선이 확립됐다.
중국은 에너지 부족 사태와 미국과의 분쟁이 동시에 발생하는 상황을 안보의 최대 위협으로 간주한다. 과거 미국이 소련을 붕괴시킬 때 중동의 에너지를 강력하게 통제한 바 있다. 중국의 안보 전략은 미국과의 필연적 이해 충돌을 상정하고 있다. 따라서 최근 미·중의 경제 충돌은 예고된 것이라고 하겠다.
중국은 미국과의 무한전쟁·전면전에서 승리하고자 해·공군 현대화, 원거리 공중 및 해상 타격능력 향상에 중점을 두고 군사력을 건설해왔다. 특히 대만의 독립을 불허하며, 궁극적으로 통일을 지향한다. 미국이 대만 문제에 개입할 경우 무력 사용 또한 배제하지 않고 있다.
중국이 부상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국군이 북한의 군사 위협을 과장한다고 봤다. 특히 북한의 핵무장은 자위적 조치이기에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인식했다. 미·중 간 전쟁이 발발하면 한국이 자동적으로 그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는 이유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국방개혁(문민화), 병복무 기간 단축을 추진했다. 왜곡된 대북위협 평가를 바로잡고자 한국국방연구원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제외한 남북 군사력을 비교하는 연구를 하게 했다. 노무현은 북한의 1차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강행했다.
노무현은 이른바 진보진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동맹 조정 요구의 핵심인 대(對)테러전 참여(이라크 파병)를 결심했으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결단했다. 게다가 용산기지 평택 이전과 제주기지 건설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평택은 청일전쟁 당시 청군과 일본군이 격전을 벌인 곳이다. 일본군이 제주도에 화순항과 군 공항을 건설한 것은 제주도가 일본 공군 및 해군이 상하이를 거쳐 중국 내륙을 침공하는 데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인도·태평양 전략의 탄생
평택·제주기지는 현재 미국의 대(對)중국 봉쇄의 핵심이다. 미국이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 대비한 것은 클린턴 행정부 때부터다. 클린턴은 21세기 국가안보위원회(1998~2000)를 구성해 2025년의 국가안보전략을 구상했다. 이 위원회는 2025년 전후 동아시아를 세계대전이 일어날 확률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꼽았다. 또한 중국을 잠재적 정치·군사 도전 국가로 인식했으며 북한은 다루기 힘든 국가로 분류했다.
부시 행정부는 2002년 핵정책 검토 보고서를 통해 재래식 무기로 무력화가 불가능한 지하터널 등의 전략목표 1400여 개(북한, 중국, 러시아, 이라크, 이란, 시리아, 리비아)를 선정했다. 이 보고서는 이라크에 의한 이스라엘 공격, 중국·대만 간 군사충돌, 북한의 무력남침을 저위력 소형 핵무기를 사용하는 상황으로 규정했다.
부시 행정부는 기존의 3대 핵무기 체계(대륙간탄도미사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전략폭격기)에 미사일 방어(MD)와 저위력 핵무기를 추가했다. 특히 신뢰할 만한 핵탄두(RRW·Reliable Replacement Warhead)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2007~2010년 기존 소형 수소폭탄두의 수명을 30년 연장하는 등의 소형 핵무기 개조·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현재 인도·태평양 전략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책은 이렇듯 클린턴·부시·오바마 행정부로 이어져온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역대 정부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최근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 추모 행사에 참석한 배경에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지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실정(失政) 탓에 안보 분야에서 노무현 정부의 과(過)보다 공(功)이 더 부각되는 게 현실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향후 100년간 미국에 도전하지 말라는 취지를 가진 덩샤오핑의 도광양회 노선에서 이탈해버린 후 숨겨두었던 칼을 뽑아 들었다. 시진핑은 2008~2009년 미국발(發) 금융위기 때 중국이 세계경제를 견인한 성과에 고무된 후 야심 가득한 대외관계 및 안보전략을 구상했다. 미국과 신형대국관계를 수립하고 유라시아 허브로 부상한다는 일대일로(一帶一路)가 그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은 동유럽과 중동으로 팽창하려는 러시아와 손잡고 미국의 MD를 와해시키고자 했다. 또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중립을 유도하고자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한국 가입, 한중 FTA 체결 등의 한중 협력을 강화했고, 박근혜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한중일 정상회담에도 응했다.
미·중 충돌 시기의 한미동맹 조정
오바마 행정부는 집권 1기에는 균형전략(Balanced Strategy)을 통해 금융위기 이후 국력 회복에 치중했다. 이 시기 미국은 처음으로 중국을 전략대화의 상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집권 2기에는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아시아 중시 정책으로 전환했다.
오바마는 핵우산과 MD를 기반으로 러시아와 중국의 팽창을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일본, 호주, 인도와의 안보 협력으로 차단하는 동시에 한미일 안보공조를 통해 중국의 구단선(남중국해 대부분을 중국 수역으로 설정한 중국 주장 가상의 선) 무단 점유를 무력화하고자 했다.
급기야 워싱턴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2015년 9월 25일) 전날 비공개 만찬에서 시진핑은 “중·미 양국이 신형대국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목표는 정확하고, 강한 생명력이 있다”면서 “태평양은 양국을 모두 수용할 만큼 넓다. 양국 간 분쟁은 통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 강력하게 도전한 것이다. 시진핑은 또 “양국이 불(不)충돌, 불(不)대항, 상호 존중, 협력 공영을 이뤄내야 한다”면서 ‘신형대국관계’라는 낱말을 연거푸 사용했다.
반면 오바마는 정상회담 당일 “보편적 규범과 인권 등을 토대로 한 공정한 경쟁이 양국 번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시진핑의 신형대국관계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은 중국이 남중국해에 건설 중인 인공섬에 대해 주변국을 위협하는 패권 확장 행위라며 비판했다. 반면 시진핑은 “인공섬 건설은 항행의 자유와 안전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반박했다. 남중국해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중국몽+강군몽=新중화주의
시진핑은 집권 1기부터 개인 권력을 공고화(군 부패 청산, 군부 충성 및 복종 강화)하고 군을 현대전에 부합하는 조직으로 개편하고자 했다. 신속한 배치와 보급, 합동성 제고, 군령 간소화(중앙군사위→전구→각 군종 부대), 우주·전자·사이버 전력 강화, 원양 작전 능력 제고 등을 목표로 한 고강도 군사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이는 중국군을 싸워서 이기는 군대(能打仗 打勝仗)로 육성해 중국몽(中國夢)과 강군몽(强軍夢)을 달성하기 위함이다.
시진핑의 중국몽·강군몽 구상에는 미국이 2014년부터 시작한 아시아·태평양 재균형 전략과 2015년 발표한 분쟁 개입 및 해양 안보와 관련한 협력적 해양전략 및 ‘제3의 상쇄전략’에 의거한 전력 증강, 일본의 안보 법제 제정 및 개정과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2015년 4월),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위한 자위대법 확대(2015년 9월)가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다.
현재 중국은 세계 2위 경제·군사대국이다. 중국의 대외전략 목표는 대국(大國) 위상 회복, 에너지 공급선 확보, 대만 문제 해결, 외연 확장 및 이양(二洋·인도양, 태평양) 진출이다. 따라서 중국 대륙에 대한 ‘접근거부능력’을 강화하고, 정밀타격능력을 향상시키며, 핵 억지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원거리 공정작전능력을 확충하고 있다.
이를 위해 1000해리 해양감시, 500해리 해양거부(해·공군), 200해리 이내 해상봉쇄 능력을 구비하기 위한 군사력 건설을 추진한다. 현재 대만 및 황해(서해) 해양봉쇄, 대(對)일본 분쟁지역거부, 대(對)동남아 군사위협 능력을 구비하고 있다. 이러한 안보전략 기조하에 중국은 2013년 11월부터 파라셀·스프래틀리 군도의 암초를 매립해 인공섬을 건설하고 있다.
이에 대해 동남아 영토 분쟁 당사국과 미국·일본·EU는 “규범에 기초한 기존 질서를 흔드는 불법 군사화 활동”이라고 비난한다. 중국이 건설 중인 7곳의 인공섬은 완성 단계에 있으며, 그중 3곳에는 활주로와 병력 2000여 명이 주둔할 막사가 건설돼 있다. 2013년 1월 필리핀이 중재 신청한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대해 2017년 7월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는 구단선을 포함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은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중국은 이 판결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미국은 PCA 판결의 법적 구속력을 주장하면서 2015년 10월 26일 미군 구축함 라센호가 수비 산호초 해역 12해리 이내를 통과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계속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펼치고 있다. 중국은 2018년 5월 “주권 보호와 안전상 필요한 조치”라며 인공섬 3곳(피어리 크로스, 수비, 미스치프 암초)에 최신예 미사일을 배치하고, 군사 전파 교란 시설을 배치해 항행의 자유 작전에 맞대응하고 있다.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지지한 한국
오바마는 박근혜의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석(2015년 9월 3일) 이후 열린 한미 정상회담(2015년 11월 2일)에서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와 관련해 미국에 대한 지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한국의 미국 지지를 21세기 한미동맹 조정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2010~2012년 센카쿠 열도 영토분쟁 이후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수출 금지 보복을 당한 일본은 일찌감치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동참했다.
한민구 국방장관은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과의 제47차 한미 안보협의회의(SCM· 2015년 11월 2일)에서 남중국해 문제와 한미일 안보공조와 관련해 한국의 미국 지지를 명확하게 밝혔다. 이로써 6·25전쟁 이후 미국의 숙원인 한미일 안보 공조라는 동북아 신(新)동맹체제가 출범했다.
SCM 회의 직후 기자회견에서 한민구 장관은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와 관련해 “우리의 입장은 남중국해 지역은 우리 수출 물동량의 30%, 수입 에너지의 90%가 통과하는 중요한 해상 교통로로서 우리의 이해관계가 큰 지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지역에서 항해와 상공의 자유가 보장돼야 하고 분쟁은 관련 합의와 국제적으로 확립된 규범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하며 남중국해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국제회의 등 여러 계기를 통해서 촉구해왔다”고 말했다. 남중국해 문제에서 미국에 대한 지지를 명확히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카터 장관은 “한민구 장관이 남중국해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잘 요약해준 것 같다. 지금 말한 것은 대한민국의 원칙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광범위한 국가들의 원칙, 미국도 거기에 포함되는데, 그 원칙을 바로 한 장관이 말한 것이다. 미국은 어떤 영토에 분쟁이 났을 때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 미국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평화적인 해결책을 원한다. 물론 거기에는 한 장관이 말한 ‘항행의 자유’도 있다”고 밝혔다.
한민구 장관은 2015년 11월 4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3차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에서 미·중이 정면으로 충돌한 공동 선언문 내용과 관련해 ‘남중국해에서 항행과 상공 비행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는 문구를 넣어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에 찬성했다. 이틀 전 오바마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한국의 ‘선택’을 공개적으로 밝히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 미·중 국방장관 앞에서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미국 지지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보수 정권이 구현한 ‘균형외교’
박근혜 대통령은 한미일 안보 공조와 한중일 정상회의를 병행 추진했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2013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한일관계를 개선하고자 최초의 한미일 정상회담(2014년 3월 25일)도 추진했다. 그 결과 북한은 6·25전쟁 이후 최대의 외교적 고립에 빠지게 된다.
이후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유사시 미일 합동작전이 이뤄질 경우에 대비한 한미일 협의 논의(2014년 10월 8일), 한일군사공조약정(2014년 12월 29일), 한일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2016년 11월 23일), 위안부 협상(2016년 12월 28일)을 일사천리로 타결시켰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한중 정상회담(11월 10일) 때 한중 FTA 타결을 선언했으며 한중일 외무장관회담(2015년 3월 21일)을 계기로 삼아 한중일 정상회의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한중일 정상회담은 2015년 11월 1일 열렸다.
박근혜 정부가 한미일 안보 공조와 한중일 정상회의를 병행해 추진한 것은 한미일 안보 공조가 중국의 소외감을 유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북아에서 평화 구조가 정착되려면 한중일 협력은 필수적이다.
박근혜 정부가 한미동맹을 강화하면서 중국과의 협력을 동시에 강화하는 것에 대해 많은 전문가가 중국에 경사되고 있다면서 우려를 표명했다. 박근혜의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석이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과 사전 조율을 통해 열병식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박근혜의 전승절 참석은 북·중관계에도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2017년 4월 중국 관영 언론들이 대북 석유 공급 중단 가능성을 시사하자 북한은 박근혜와 시진핑이 함께 톈안먼 망루에 오른 것을 두고 “(한국과) 세상 보란 듯이 입 맞추며 온갖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고 맹비난했다. 또 “조·중(朝中) 관계의 ‘레드 라인’(금지선)을 우리가 넘어선 것이 아니라 중국이 난폭하게 짓밟으며 서슴없이 넘어서고 있다”고 지적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2013년 6월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동시에 추진하는 투 트랙(雙軌?行) 전략을 북핵 문제 해법으로 제시했다. 2017년 3월에는 투 트랙 전략의 1단계로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과 한미연합군 합동 군사훈련을 동시에 잠정 중단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한미일 안보 공조는 일대일로와 강군몽 전략을 추진하는 시진핑에게 비수와 같은 조치인데도 중국이 북핵 폐기 전략에 동참한 까닭은 무엇일까.
트럼프는 2017년 8월 1일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를 합병한 이후 시행돼온 서방의 대(對)러시아 경제제재 연장선상에서 북한·러시아·이란에 대한 통합 제재 법안에 서명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통상법 301조 적용을 경고했다. 만약 중국이 북핵 문제에 대해 전향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러시아·이란·북한 봉쇄 라인에 중국을 포함하겠다는 뜻이었다. 최근 미국은 중국에 대해 무역·관세에 이어 환율 영역으로까지 공세를 확대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중국은 북한에 연료, 현금, 전략물자가 유입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에 묵시적으로 공조해왔다. 김정은의 2차 방중이 이뤄진 2018년 5월 이후 중국이 북한에 쌀 1000t과 비료 16만2000t을 각각 무상 원조했다고 중국 세관인 해관총서가 밝혔다(2019년 5월 19일). 이는 작은 양으로 중국은 4차례의 김정은 방중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대북 지원은 하지 않은 것이다. 러시아도 4월 북·러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10만t 식량 요구에 5만t만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성공단 폐쇄, 애치슨라인 북상시켜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2016년 1월 6일)에 대한 대응책으로 개성공단을 폐쇄(2월 11일)했다. 개성공단 폐쇄는 ‘북핵을 반드시 폐기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국제사회에 나타낸 것으로 북한의 핵실험이나 전략미사일 발사에 대해 유엔과 국제사회가 전면적 제재에 공조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은 중국의 남중국해 무단 점유와 태평양 진출을 미국·일본·호주·인도의 안보협력과 한미일 안보공조를 기반으로 삼아 일본-대한해협-대만해협-베트남-인도를 연하는 선에서 차단하고자 했다. 그런데 개성공단 폐쇄 국면 이후 미국은 대중 봉쇄선을 북상시키려 한다. 대한해협의 차단선을 압록강-두만강-홋카이도를 연하는 선으로 북상시키면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는 공고한 차단선이 형성된다.
미국의 대중 봉쇄선 북상은 북한의 핵을 반드시 폐기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전략 목표와도 완벽하게 조응한다. 21세기에도 한미동맹이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 것이다. 트럼프가 북·미 정상회담을 지속하는 핵심 이유도 중국에 대한 봉쇄선을 압록강-두만강으로 북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한미일 안보 공조와 북핵 폐기 전략은 미국이냐 중국이냐 선택의 갈림길이 야기한 국가안보적 난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둔 정책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북핵 폐기 전략의 기조와는 상반된 반일(反日)·친북중(親北中) 노선을 걷는, 안보 역주행을 지속하며 혼란을 자초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후 최초 한미 정상회담(2017년 6월 30일)과 최초 한미일 정상회담의 공동성명(2017년 7월 6일)에서 한미일 안보 공조와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미국 지지를 명문화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회 비준 동의와 환경영향평가를 내세워 사드 배치를 지연시키고 있다. 특히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3NO(사드 추가 배치하지 않음, 한미일 동맹 및 미사일 방어에 참여하지 않음) 선언을 함으로써 2017년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뒤통수를 때렸다. 또한 위안부재단 해산과 대법원의 징용자 배상 판결은 박근혜 정부가 구축한 한미일 안보 공조의 틀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있다.
文, 안보 유산 걷어차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대외정책에서 결정적 차이점은 북한과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이 남북 및 북·미 대화에 나선 것을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의 세계사적 전환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북한의 군사 위협과 중국, 러시아의 대(對)한반도 군사 정책은 변함이 없는데도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핵 문제는 거론하지 않으면서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만을 주장하는 북한 협상단의 후안무치한 행동에 대해 남북 대화를 즉각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이 같은 박근혜의 고집을 꺾느라 김관진 안보실장을 비롯한 핵심 참모들이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훗날 역사가 두 대통령의 대북 및 안보정책을 어떻게 평가할지 자못 궁금하다.
*New Acheson Line : 홋카이도-두만·압록강-평택·제주기지-대만-베트남-인도를 연하는 가상선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