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 “징용 배상 韓이 하고, 日은 사과한 후 교과서에 게재해야”

  • 신동아
  • 입력 2019년 8월 18일 14시 39분


[ 인터뷰 ] 김종훈 前 통상교섭본부장이 말하는 해법
“지소미아 폐기, 日에 엄청난 빌미 줄 것”

● “노련한 외무성 배제 탓 허점 많은 조치 내놔”
● “日 관료들, 아베 눈치 보며 하라는 대로 따르는 듯”
● “장기전 되면 韓이 日보다 피해 더 심각”
● “日 전직 관료들, ‘WTO 가면 日 엄청난 리스크’ 인정”
● “트럼프, 동맹 가치 아는 지도자였다면 벌써 중재”
● “금융 보복 대신 비자 심사 강화 가능성”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아베 신조 내각이 한국을 두고 단행한 수출규제의 막후에는 통상 관료들이 있다. 이번 조치의 설계자로 꼽히는 이마이 다카야 정무담당 비서관은 ‘총리 관저의 최고 실세’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1982년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에 들어가 24년간 재직하다 2006년 ‘아베 1기 내각’에 합류했다. 아베 총리 실각 후 경제산업성(경산성)으로 복귀한 그는 ‘아베 2차 내각’이 출범하자 재차 발탁됐다.

그는 경산성 후배인 사이키 고조가 최연소 총리비서관이 되는 데도 다리를 놨다. 하세가와 에이이치 총리보좌관도 경산성 출신이다.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이 현 국면에서 선봉에 서 있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현재 일본에서 경산성은 재무성, 외무성을 제치고 ‘1등 부처’로 불린다.

저간의 사정이 이렇다면 한국에서도 통상 관료의 시각에서 상황을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김종훈(67) 전 통상교섭본부장을 만난 건 그런 이유에서다. 김 전 본부장은 8회 외무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했고 외교통상부 지역통상국 국장과 주(駐)샌프란시스코영사관 총영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수석대표를 역임했다. 2007년 8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장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일했다. 이후 새누리당 소속으로 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와 8월 13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마주앉았다.

장군 멍군

- 정부가 일본을 한국의 백색국가(수출절차 우대국)에 해당하는 전략물자수출입고시상 ‘가’ 지역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상응 조치 아닌가?

“상응 조치로 봐야 한다. 우리말로 하면 장군 멍군이다. 장군 멍군해야 서로가 교정할 건 하고, ‘백다운’도 할 수 있다. 국민감정을 고려하더라도 정부가 그 정도 조치를 안 하면 (국민들이) 가만있기 힘들었을 거다.”

사토 마사히사 일본 외무부 대신은 8월 12일 자신의 트위터에 한국 정부가 백색국가 명단에서 일본을 제외한 것과 관련해 “일본의 수출관리 조치 재검토에 대한 대항 조치라면 세계무역기구(WTO) 위반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썼다.

- 일본 고위 관료는 도리어 WTO 위반이라고 문제 삼더라.

“글쎄,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라고 할까.”

김 전 본부장은 “아베 총리가 작심하고 준비했고 경산성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면서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노련한 일본 외무성은 (조치에서) 배제돼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조치가 굉장히 거칠다. 세련되지 못했고 허점이 많다. 또 아베 총리 개인을 봐야 한다. 워낙 우익이기도 하고, 어떤 각도에서도 친한(親韓)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정치인이다.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오랫동안 가져온 사람이다.”

이어 그는 일본의 조치가 “명백한 보복”이라면서 “삼성전자가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수입한 불화수소 등이 북한이나 다른 적성국가 손에 갔다는 사례나 혹은 우려라도 있나? 일본이 거기에 대해 아무런 근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 아베 내각이 글로벌 공급망 훼손이라는 비판을 감수한 꼴이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 기업에도 리스크로 비화할 텐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우선주의를 추구하면서 WTO의 기능을 무력화하고 있고 세계무역 증가세가 주춤하고 있다. 우리 경제는 수출 비중이 크다. 당연히 (이와 같은 세계경제 흐름에) 영향 받는다. 특히 반도체의 경우 지난해까지 (업황이) 굉장히 좋았지만 지금은 수요가 줄고 가격이 하락하는 등 반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하필 이 찰나에 이 문제가 불거졌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물론 일본도 손해를 본다. 다만 객관적으로 볼 때 일본 경제 규모가 우리보다 훨씬 크다. 서로 간 상응 조치를 할 때 경제 규모가 큰 쪽이 대미지를 더 잘 흡수할 수 있다. 문제가 장기화하면 양쪽 다 코피를 흘리겠지만 흘리는 양은 일본이 우리보다 적을 수 있다.”

“나는 혼자인데 일본에는 세 명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운데)가 8월 2일 각의(국무회의)에 참석한 모습. [AP=뉴시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운데)가 8월 2일 각의(국무회의)에 참석한 모습. [AP=뉴시스]

- 통상 관료로 일하면서 일본 통상 관료들을 겪어보지 않았나?

“외무성, 경산성 사람들과 모두 접촉해봤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일할 때 WTO 회의를 가면 나는 혼자인데 일본은 세 명의 장관이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대외관계를 다루는 외무성과 통상을 다루는 경산성에 더해 농산물이 이슈가 되면 농업성 장관이 늘 끼었다. 그걸 보면서 ‘저 나라는 내부 조정하기 힘들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

- 그 말은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당시에는 이들이 치고 나가는 순발력은 조금 약하지만, 차근차근 준비해 꾸준히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때는 일본(통상 관료들)이 우리를 향해 부러운 눈치를 보냈다. 당시 우리가 한미 FTA, 한·EU(유럽연합) FTA까지 치고 나갈 때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에서 헤맬 때고. 지금은 오히려 역전된 상황 같다. 미국이 걸어 나간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서 일본이 좌장 노릇을 하고 있지 않나. EU와 FTA도 맺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익을 주장할 때 일본은 ‘교역 자유화가 중요하다’는 말도 했다. 내가 상대하던 과거 일본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 통상 관료들의 입김이 강해진 것 같다는 뜻인가?

“그렇다. (일본 정부 안에서) 통상에서 내는 목소리가 훨씬 더 커졌다고 본다.”

- 이번 조치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뤄졌다고 봐야 할까?

“일본 사람들 하는 말로는 경산성 출신 총리실 보좌진이 이번 조치를 주도했다. 특히 2~3명의 이름이 많이 회자되더라. 또 정부에서는 수출규제가 경산성 소관이다. 그러니 뭐랄까, 정돈되지 않은 모습은 보인다. (물론) 큰 그림에서 볼 때 일본(관료들)은 예나 지금이나 순발력 있게 치고 나가는 움직임은 약한 것 같다. 부처 간 여러 협의도 필요하고. (하지만) 아베 총리가 워낙 장악력이 강해서 (관료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하자는 대로 다 따라가는 것 같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제2차장은 8월 12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노무현 정부 당시 한·일 FTA를 체결하지 않은 이유를 두고 “부품·소재와 핵심 장비 분야에서 일본에 비해 우리가 너무 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체결했을 경우 제2의 한일 강제 병합이 될 것 같다고 대통령께 보고했다”고 말했다.

- 김현종 차장이 한일 FTA를 체결하지 않은 이유를 언급했더라. 당시 김 전 본부장께서 통상 부서에 있지 않았나.

“(한일 FTA를 체결하지 않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구조적으로 우리가 일본에 늘 무역적자였다. 당시 (통상 연구하는) 박사들과 경제학자들, 정부에서 관련 업무 하는 사람들이 모여 논의했다. 소수 의견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 (일본에 시장을) 열면 적자 폭이 커진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게 가장 두드러진 이유였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또 현실적으로 당시 통상 현업 부서에 한미 FTA, 한·EU FTA 등 해야 할 업무가 많았다. 그러니 도움 될지 안 될지를 두고 논쟁 가능성이 있는 협상에 매달릴 수가 있었겠나.”

냉각기

이날 김 전 본부장은 냉각기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꺼냈다. 그는 “통상 문제로 국가 간에 강하게 부딪치면 가장 먼저 시작되는 절차가 냉각기”라고 말했다. “부부가 갈라서는 이혼소송에서도 냉각기를 거치듯 국가 간에도 감정이 격앙돼 (갈등이) ‘에스컬레이션’ 될 때 밟아야 할 단계가 냉각기를 갖는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 그렇지만 지금은 냉각기가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했으니 곧 냉각기를 갖는 데 적절한 시점이 오지 않겠나 싶은데, 문제는 외교적인 ‘이벤트성’ 날짜가 몇 개 있다는 점이다.”

- 가령 광복절 같은….

“그렇다. 우리는 광복절마다 대내외에 필요한 메시지를 낸다. 이날은 일본 입장에서는 패전일이다.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갈 것인가, 혹은 공물만 보낼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안할 것인가. 즉 이날 양국에서 펼쳐질 모습이 냉각기를 갖는 데 ‘벤치마크’가 될 것이다. 지금은 냉각기가 되느냐 안 되느냐를 가늠하는 단계다. 더 두고 봐야 한다.”

인터뷰 이틀 후인 8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은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제 74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지금이라도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보냈다.

한편 김 전 본부장은 “일본 입장도 그리 편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효과가 아베 내각이 원하는 만큼 크지 않고, 국제 여론도 유리한 국면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미국 블룸버그통신이나 월스트리트저널, 파이낸셜타임스 같은 데서도 (일본의 이번 조치에 대해) 별로 좋게 쓰지 않더라”라고 말했다. 그가 부연했다.

“(이번 조치에 영향을 받은) 일본 기업들도 장사는 해야 하지 않겠나. 정 안되면 (이들 기업들이) ‘뒷구멍’ 그러니까 제3국을 통한 거래도 생각해볼 수 있다.”

- 일본은 자국 기업 자산이 한국 국내법에 의해 강제 집행·몰수되고 있다고 본다.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압류자산을 현금화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법원 판결을 두고 가타부타할 상황도 아니다.

“미국에서 스탠드스틸(standstill agreement·현상동결합의)이라는 말이 잠깐 나왔었다. 골자는 한국은 (일본 기업의) 자산을 현금화하는 조치는 좀 참고, 일본은 백색국가에서 한국을 빼놓는 조치를 조금 ‘홀드’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지금 물 건너갔다. 그렇다면 대법원이 최종 판결했기 때문에 민사절차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가 이에 개입하면 또 다른 적폐를 만들어내는 꼴이 된다. 법률가가 아니라 자신 있게 해석할 처지는 아니지만, 결국 특별법을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돈이 궁한 나라도 아니고”

일본의 망탈리테(mentalite·집합적 무의식의 총체)는 탐구 대상이다. ‘일본의 속’을 들여다봐야 겉에 드러나는 행태의 근본을 읽을 수 있다. 국제통상의 현장에서 일본 관료들과 부대껴온 김 전 본부장은 일본이 “자기합리화, 정당화가 굉장히 강한 나라”라고 평했다.

“태평양전쟁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발발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 안 한다. 반면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해서는 지금도 매년 위령식을 한다. 자신들이 행한 잘못된 행위를 애써 외면한다. 그것이 독일과 다른 점이다. 과거에 대해 말끔히 사과하면 모르겠는데, 과거를 자꾸 덮고 미래로 가자고 하니까 우리에게도 ‘그건 안 된다’는 심정이 남아 있는 거다.”

다만 김 전 본부장은 “피해자는 도덕적 우위에서 문제를 끌고 갈 수 있다”면서 한국과 베트남 간 관계를 사례로 들었다.

“베트남과 수교가 이뤄지는 시기에 외교부에 있어 조금 관여했다. 인상적인 기억이 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과거 (한·베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다’며 먼저 말을 꺼냈다. 대화의 기승전결에서 ‘기’의 역할이랄까. 그런데 정작 베트남 쪽 반응이 ‘그런 말 하지 마라. 다 잊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하더라.”

- 베트남 관료들이 말인가?

“그렇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똑같이 배울 일은 아니겠지만, 피해자가 ‘우리가 피해 봤으니 돈 내놔’ 이러는 게 꼭 도덕적 우위를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은 아니지 않나. 지금 대한민국이 대한제국 때같이 돈이 궁한 나라도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국민이 역사에서 받은 피해가 있다면 남의 나라 돈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구제하겠다. 대신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냉철하고 철저하게 사과하고 이를 후세대에 가르치라’고 할 수 있다. 사과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되도록 말이다. 또 ‘가르치려면 적정한 등급의 교과서에 실어라.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한일관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8월 9일(현지시간) 한일 갈등과 관련 “한국과 일본이 잘 지내기를 희망한다. 두 나라는 동맹국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가에서는 “구름만 피웠다”는 해석이 나온다.

- 미국의 중재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트럼프 대통령이 한일관계에 대해 언급하긴 했는데, 실제 액션을 취한 건 없다.

“예전의 미국이 아니라 ‘대통령이 트럼프인 미국’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간 동맹의 가치에 큰 비중을 두는 지도자였다면 벌써 무슨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두 나라가 원하면 관여하겠다는 정도의 말을 했는데, 이는 한쪽이 싫으면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사전에 미국과 상당 수준으로 이야기하고 (이번 조치를) 취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지 않나.

물론 국무부 쪽에서는 (한일관계를 두고)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스탠드스틸’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얘기로 보인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과 심상치 않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한일이 공히 중요한 나라다. 더 곪도록 방치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향후 미국이) 할 수는 있다.”

D램 옵션과 사람 왕래

-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파기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소미아 폐기가 하나의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아주 위험한 이야기다. 지소미아를 건드리면 (일본이) 경제 문제를 벗어나 (문제를) 다른 데로 확산하는 데 엄청나게 큰 빌미를 줘버린다. ‘끝까지 가면 그와 같은 카드가 있다’는 레토릭조차 신중히 하는 게 옳다.”

- 지소미아가 미국을 움직이는 지렛대가 될 거라는 주장도 있는데.

“그런 주장이 거꾸로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더군다나 한미동맹의 결속력이 많이 이완돼 있다는 판단도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 김현종 차장은 “D램 공급이 만약 2개월 정지될 경우 전 세계에서 2억3000만 대의 스마트폰을 만드는 데 차질이 생긴다. 우리도 카드가 옵션(option)으로 있다”고 말했다. ‘D램을 안 팔 수 있다’는 뉘앙스로 읽히는데, 전략적으로 맞는 말일까?

“D램은 얼마든지 군사적으로 전용될 수 있는 품목이다. 반도체 안 들어가는 데가 어디 있나. (그래서) D램이 (군사적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일본에) 우기면 (수출규제) 논리를 만들어낼 수야 있겠지. 그런데 팔고 안 팔고는 기업이 정하는 것이다.”

- 그렇다. 결정은 삼성과 하이닉스가 하는 거다.

“‘안보에 위해가 된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정부가 수출 통제를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 없이 기업에 ‘팔아라, 팔지 말라’ 하는 건 좀 곤란하지 않겠나.”

- 여권이 ‘우리도 카드를 갖고 있다’는 뉘앙스의 말을 많이 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그 ‘우리’는 기업 아닌가?

“아마 일본 업체들도 일본 정부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거래 잘하고 있는데 왜 못 팔게 해’ 식으로 말이다. 실제 (D램 옵션을) 단행할 경우 국익에 도움이 될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다만) 협상용 즉 엄포를 놓는 목적이라면 해볼 만한 이야기다.”

- 일본이 금융 부문으로 보복 조치를 확대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로 보면 그렇게까지 갈 것 같진 않다. 물론 사태가 확산일로로 가면 (보복 조치가) 반도체가 아닌 다른 데로 튈 수도….”

- 비자 심사를 강화한달지….

“그것도 가능하다. 우리 청년들이 일본에 취업을 많이 한다. 일본에 사람이 모자란다니까. 취업비자 심사 강화는 일본이 법률로 취할 수 있는 조치다. 상품 왕래는 WTO에 룰이 있다. 사람이 왕래하는 걸 두고는 국제적으로 룰이 박약하다. 상품이 왔다 갔다 하는 수준으로 사람 왕래를 자유화하면 입국심사 등의 질서가 다 무너지기 때문이다. 또 해당 국가의 안보와 노동 문제 등 여러 이슈와 엮여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금융보다는 사람의 왕래와 관련해 일본이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일본이) 취업 비자 심사를 까다롭게 하겠다고 하면 (한국이) 당장 영향 받는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갔다는 건 사태가 더 심각해졌다는 뜻인데, 양국에 공히 좋은 시나리오는 아니다.”

“기능 마비된 WTO더라도 할 건 해야”


- 정부는 WTO 제소 준비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WTO 제소를 두고 ‘강경 대응이다’ ‘카드의 일종이다’라는 말을 하더라. 둘 다 아니다. 저쪽이 행한 조치가 타당하지 않고 우리 기업이 어려워졌는데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WTO로 넘어가면 과정마다 당사자 간 다툼이 국제 여론을 탄다. 아무래도 입장이 불리한 쪽은 부담을 갖게 된다. 개인적으로 아는 일본 전직 관료들에게 분명히 이야기했다. ‘아베 총리가 신뢰 훼손 때문에 수출규제 했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뱉어버렸고, 외교관계 경색에 대한 보복이 확실하기 때문에 무역 자유화를 기본 가치로 내건 WTO로 가면 너희들은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들도 다 인정하더라.”

여기서도 문제는 미국이다. 미국은 WTO의 최종심인 상소기구 위원 선임에 응하지 않고 있다. 애당초 상소기구는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현재는 3명만 남아 있다. 12월 10일이면 3명 중 인도, 미국 출신 위원의 임기가 끝난다. 이렇게 되면 중국 출신 위원 1명만 남게 돼 사실상 상소기구 기능이 정지된다. 한일 분쟁에도 변수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이를 두고 김 전 본부장은 “최종심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일본이 ‘끝난 게 아니야. 우리는 재심 신청했어’ 이렇게 주장하면 그 케이스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야기’가 돼버린다”고 우려했다.

- 정말 수년이 걸릴 수도 있겠다.

“그렇다. 그렇다 하더라도 WTO 가서 따질 건 따져야 한다. 할 건 해야지.”

- 여당은 한일 갈등 대책위를 ‘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라 명명했다. 정치권이 나서 ‘반일 레토릭’을 구사한다는 지적도 있다.

“넓은 의미에서 여당은 정부나 마찬가지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과연 그것이 국익에 맞는 행동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간 경제협력으로 평화경제가 실현되면 단숨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안의 시급성과 비교하면 무슨 꿈속 이야기하는 것 같다. 어느 세월에 경협해서 또 어느 세월에 평화를 만들어 일본을 누르나. 현실성이 좀…. 그 이야기 듣고 솔직히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기업 입장에서 한일 갈등은 불확실성을 뜻한다. 생산라인 재배치 등 큰 비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김 전 본부장은 공직에서 물러난 후 현대자동차 특별자문위원과 SK이노베이션 이사회 의장으로 활동했다. 그가 통상 전문가의 시각에서 기업에 불어닥칠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를 점검했다.

통상과 新냉전

“현재 우리 기업이 걱정하는 불확실성은 일본이 우리한테 ‘악심’을 품고 나서지 않는 한 합리적으로는 (실제 벌어질 거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캐치올(catch-all·상황허가)은 전략물자가 아니더라도 군사 목적으로 전용된다는 의심만 있으면 심사 절차에 적용하겠다는 뜻 아닌가. 그러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일본 수출업자가 ‘내 거래선이 수상해’ ‘구매 목적과 달리 다른 데 돌려 팔고 있어’라면서 신고하면 심사가 시작될 수 있다. 혹은 일본 경산성이 ‘수상하다’고 하면서 심사를 강화할 수 있다. 그러려면 증거나 혹은 합리적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을 제시해야 한다. 정신이 똑바로 든 나라라면 의혹도 없는데 ‘저기 조져’ 그럴 리는 없다. 일본이 그렇게까지 비합리적인 행동에 나설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혹은 기업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품목으로 불똥이 튈지 우려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해당 기업 제품이 제3자 손을 거쳐 북한으로 가서 ‘핵 개발’하는 데 쓰였는지 따져봐야 하는데, 글쎄 나는 그런 이야기는 못 들어봤다.”

그는 “(기업들이) 일본 의존이 심각한 상황은 타개해보자는 생각에서 국산화건 수입산 다변화건 (소재 수급을 위해) 여러 군데 보험을 들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 100% 국산화가 자유무역체제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국산화를 하면 코스트(비용)가 더 드니 차라리 사오는 게 좋다’는 말인데, 70% 이상 일본에만 의존하는 제품의 경우 의존도를 내릴 필요는 있다. 일본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점을 두고는 코스트만 따질 게 아니라는 걸 기업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깨달았을 거다. 그렇게 되면 한일 간 분업체제에 장기적으로 많은 변화가 올 것이다.”

- 미·중 갈등에 한일 갈등까지 통상을 둘러싼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신(新)냉전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미중 간 다툼은 관세에서 시작해 미래 기술로 나아갔다가 이제는 안보와 환율로 번졌다. 다음 세계 질서를 누가 쥐고 끌고 갈 거냐의 싸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냉전이라는 표현에 동감한다. 냉전의 특징은 진영논리다. 두 개의 큰 덩치가 으르렁거리면서 ‘줄 서라’ 외치며 각 캠프가 만들어지는 거다. 외교적으로 우리 스탠스를 잘 잡아야 한다. 지금이 신냉전 상황이라고 판단한다면 그 스탠스는 명확하다.”

“우리 관료들이 노력 많이 해”

- 미국을 택해야 한다?

“그렇다. 미국이 우리의 동맹이다.”

- 한일 갈등 때문에 통상 관료들의 존재감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통상에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관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문제가 생길 때만 관료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통상 관료들이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다만) 정부 전반적으로 보다 대외지향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 국내 문제에 매몰돼선 안 된다. 늘 대외관계를 관찰하고, 판단하고, 정부 안에서 공유해야 한다. 교과서적인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 잘 되면 여러 문제가 풀린다.”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9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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