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 조치에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 교란 우려 ● 한·미·일·중 상호의존적인 ICT 생태계 ● 삼성 메모리 반도체 생산 차질, 美 기업에도 유탄 ● “日 부품소재 기업 생존하려면 한국과 협조해야” ● “日 경제인들, ‘골치 아프다’ 생각” ● “100% 국산화, 자유무역 역행” 주장도 ● 삼성전자 “국산화 TF 없지만 다양한 방안 강구 中”
일본 아베 신조 내각은 한국 경제의 급소를 찔렀다.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포토레지스트(PR·감광액)’와 ‘불화수소(에칭가스)’,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 등에 쓰이는 ‘플루오린폴리이미드’에 대해 수출규제를 단행한 것이다. 해당 제품을 한국에 수출하려는 일본 기업은 일본 당국의 까다로운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 반도체는 2018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약 7.8%를 차지하는 한국의 최대 먹거리다.
아베 총리는 8월 6일 원폭 투하 74주년을 맞아 히로시마에서 열린 희생자 위령식에 참석한 뒤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일방적으로 한일청구권협정을 위반하면서 국제조약을 깨고 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가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 처리를 강행한 뒤 한일관계에 대해 발언한 건 이때가 처음이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이 이번 조치의 배경임을 시사한 셈이다.
아베 내각은 국제통상 질서를 왜곡했다. 정치는 국민국가 단위로 이뤄진다. 국제경제는 이와 비교할 수 없이 복잡다단하다. 미국이 주도한 자유무역은 글로벌 공급망(Supply Chains)을 빚어냈다. 기업은 비용 절감과 기술력 확보를 공히 충족해줄 거래처를 찾아 부지기수로 국경을 넘는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라면 “자본은 초지리적이고, 가볍고, 모든 짐을 훌훌 벗어던진 채”(‘액체근대’ 중) 세계를 항해한다.
역사는 담론이지만 경제는 삶이다. 한국 기업은 일본산 부품·소재를 들여와 중간재를 만들어 미국·중국 등에 수출해 돈을 벌었다. 미국과 중국 기업은 이를 활용해 스마트폰과 PC 등 첨단 전자제품을 만들어 세계시장에 내다 판다. 침략과 전쟁, 식민 지배, 수탈, 원폭 투하의 역사가 얽히고설킨 네 국가는 상대에 의존한 채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이상에 다가갔다.
아베 내각은 촘촘히 엮인 ICT(정보통신기술) 산업 생태계에 칼을 들이댔다. 생태계의 그물망이 찢어지면 여러 국가가 나눠 먹는 물고기가 강제 방류된다. 아베 총리는 이와 같은 리스크를 감수한 채 전쟁에 나섰다. 한데 바로 그런 이유로 칼날은 무뎌질 공산이 크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열쇳말은 메모리 반도체와 삼성전자다.
반도체는 메모리와 비메모리(시스템)로 나뉜다. 메모리 반도체는 IT 기기의 기억장치 노릇을 한다. 많은 양을 기억할수록 기기의 성능은 진화한다. 오늘날과 같이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가 보편화된 시대에 메모리 반도체의 위상은 부쩍 크다. 향후 AI(인공지능), 빅데이터, IoT(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기술이 본격화하면 데이터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데 필요한 부품이 더 중요해진다.
책상과 책장
메모리 반도체에는 정보를 읽고 수정할 수 있는 램(RAM)과 정보를 읽을 수만 있는 롬(ROM)이 있다. 램(RAM)은 정보 저장 방식에 따라 D램과 S램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D램과 S램은 전원이 꺼지면 기억된 정보를 모두 잃어버린다. 그래서 ‘휘발성 메모리’라고 한다.
반면 롬(ROM)의 일종인 플래시 메모리(Flash Memory)는 전원이 끊겨도 데이터를 보존한다. 이에 ‘비휘발성 메모리’로 분류된다. 고로 데이터 저장이 필요한 전자 제품에는 플래시 메모리가 필수로 쓰인다. 플래시 메모리는 칩 내부의 전자회로 형태에 따라 낸드플래시(Nand Flash)와 노어플래시(Nor Flash)로 나뉜다. 이 중 낸드플래시에 저장된 정보는 전원이 꺼져도 최장 10년을 버틴다.
스마트폰으로 사진·동영상을 촬영하고 이를 저장하는 경향이 늘자 낸드플래시 수요가 많아졌다. 곧 스마트폰에서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을 자유롭게 구동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려면 질 좋은 낸드플래시를 써야 한다.
데이터를 많이 저장하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반도체는 없다. 낸드플래시는 데이터를 처리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에 데이터를 빨리 쓰고 지우는 메모리 반도체가 필요하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이 D램이다. 스마트폰이나 PC에서 응용 프로그램을 구동하거나 인터넷 검색을 할 때 주로 사용된다.
즉 IT 기기에서 낸드플래시는 기억을, D램은 속도를 책임진다. 낸드플래시는 ‘최대 용량’이, D램은 ‘초고속·초절전’이 기술 진화의 시금석이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D램과 낸드플래시를 책상과 책장의 관계에 빗댄다. 책상은 일종의 작업대다. 책장은 책과 논문 등 자료를 꽂아놓는 저장 공간이다. 당연하지만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책상과 책장이 모두 있어야 한다.
책상과 책장을 모두 세계 최고 품질로 만드는 업체가 있다. 삼성전자는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독주하는 기업이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전 세계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 점유율은 45.7%였다. 이는 2017년 4분기(46.0%)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2위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은 28.7%다. 미국 마이크론이 20.5%의 점유율로 3위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 난야는 4위지만 점유율이 2.7%에 그친다.
‘도대체 저게 뭐야(What the hell is that?)’
또 다른 시장조사업체 IHS 마킷은 올해 1분기 전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 순위를 삼성전자(34.1%), 일본 도시바(18.1%), 미국 웨스턴디지털(15.4%), 마이크론(12.9%) 순으로 발표했다. SK하이닉스는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5위권(9.6%)이다. 메모리 반도체에 관한 한 삼성전자 쏠림 현상이 뚜렷하다.
점유율은 시장지배력을 숫자로 나타낸 지표다. 이는 곧 기술력에서 삼성전자가 시장을 이끌고 있음을 방증한다. 삼성전자는 지난 7월 말부터 ‘12GB(기가바이트) LPDDR5(Low Power Double Data Rate 5) 모바일 D램’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현재 최고급 스마트폰에 탑재된 기존 모바일 D램보다도 1.3배 빠른 속도로 동작하는 제품이다. 낸드플래시의 경우, 업계는 삼성전자와 여타 업체 간 기술 격차를 6개월에서 1년으로 본다.
지난 6월 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헬기를 타고 이동하다 경기도 평택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발견하고는 “여태까지 본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것 중 하나였다. ‘도대체 저게 뭐야(What the hell is that?)’”라고 말했다. 공장 규모는 삼성전자가 가진 ‘초격차’의 물리적 실재다.
익명을 원한 반도체업계 고위 관계자는 “일본이 다시 메모리 반도체를 제조한다고 잘할 수 있을까? 나는 못할 거라 본다. 메모리 반도체 투자는 타이밍이다. 삼성전자는 오너 중심 기업으로 투자 결정이 빠르다. 덕분에 그간 번 돈을 계속 투자해 공장을 지어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반면 미국·일본 기업들은 투자를 두고 심사숙고하다 공장을 안 지었다. 그러니 한발 늦을 수밖에 없고 (한국 기업에 비해) 경쟁력이 뒤처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고급 IT 기기를 생산해야 하는 기업들은 삼성전자 반도체를 쓸 수밖에 없다. 구글과 애플, 아마존 등 유수의 미국 기업이 삼성전자의 고객이다. 중국 화웨이 역시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를 쓴다. 특히 애플은 아이폰에 쓰이는 올레드 패널 대부분을 삼성전자 자회사인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공급받고 있다. 애플이 아이폰을 많이 팔수록 삼성전자 부품사업(반도체·디스플레이) 마진이 많이 남는 까닭이다. 애플과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경쟁자지만, 이보다 큰 ICT 생태계에서는 서로 의존하는 비즈니스 파트너다.
이는 곧 일본발 수출 규제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면 미국과 중국 IT 기업의 완제품 개발과 출시 일정도 어그러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가 바보가 아닌 이상…”
미국 전자업계의 몸이 먼저 달았다. 지난 7월 말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와 전미제조업자협회(NAM)를 비롯한 6개 단체는 일본 경제산업상과 한국 통상교섭본부장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들 단체는 “글로벌 ICT·제조업은 촘촘히 짜인 공급망에 의존해 적시 생산방식(JIT)으로 돌아가고, 한국·일본은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중요한 플레이어들”이라며 “(일본의) 일방적인 수출통제정책이 이 같은 공급망과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장기적으로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썼다. 이 중 SIA에는 인텔과 퀄컴이 가입해 있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이 국면에서 쓸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카드는 삼성전자다. 삼성전자의 반도체·디스플레이를 많이 쓰는 기업을 우군으로 만들면 된다. 이번 사태가 되레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가진 위상을 확인해줬다는 해석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아베 내각이 최소한 ICT 산업에서 더 공세적 행동을 취하지는 못할 거라는 전망이 많다. 앞선 반도체업계 고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일본 정부가 글로벌 공급망에 악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실제 만들까요? 바보가 아닌 이상 국제사회가 (일본이 글로벌 공급망을 교란했다는) 의심을 할 수준으로 행동에 나서지는 않을 거라고 봐요. 지금까지는 안보 이슈를 명분 삼아서 수출 절차를 바꾼 거잖습니까. 그런데 (일본 정부가) ‘도장’을 안 찍어서 소재가 한국에 못 들어오고 이로 인해 (삼성전자에) 생산 차질이 생기면 (국제사회에서) 욕은 일본이 얻어먹겠죠. 그렇게 되면 얼마나 창피하겠어요.”
실제 일본 경제산업성은 8월 8일 수출규제 품목으로 지정한 반도체·디스플레이 품목 중 반도체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수출 1건을 전날 승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신청 내용을 심사한 결과, 군사 전용의 우려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승인 배경을 설명했다. 수출 심사가 까다로워져 최장 90일까지 걸릴 것이라고 봤던 예상을 뒤집고 빠르게 허가 내준 셈이다.
업계는 일본 정부가 글로벌 공급망을 뒤흔드는 무역 제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액션을 취했다고 보고 있다. 미국 등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해석이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8월 9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와 “우리가 일본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을 때에 대비해 명분을 축적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단순 계산해도 3억 엔 빠져”
판은 한국 반도체 기업에 유리하다. 김양재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최악의 경우 일본이 한국에 대한 소재 수출을 전면 중단하더라도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시장점유율은 대체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국내 메모리 생산이 차질을 빚게 되면 오히려 메모리 가격은 급등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도 반등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 변화에서 일본 IT 기업 역시 무풍지대에 있지 않다. 가격이 오르고 물량이 줄면 소니(SONY) 등 일본 기업의 주력인 PC 생산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일본 소재기업은 당장 경영상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상근자문위원은 “(이번 조치로) 한국에 수출하던 일본 소재 기업들이 제출해야 할 서류가 굉장히 많아졌고 업무량이 늘었다”면서 “만약 삼성전자가 다른 거래처를 찾으면 이들 일본 소재 기업 입장에서는 ‘비즈니스’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LG·삼성처럼 여러 사업을 하는 기업이야 괜찮지만, 소재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에는 매출 피해가 클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불화수소를 생산하는 모리타화학공업의 모리타 야스오 사장은 8월 8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으로) 한 달 수출이 막히면 단순 계산해도 3억 엔이 빠지는 셈”이라고 우려했다. 일본 국내 기업이 아베 내각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이 위원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일본 경제통이다. 그는 196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고 1985년 일본 호세이(法政)대 경제학과를, 1988년 고려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 LG경제연구원에 입사해 수석연구위원을 역임했고 ‘재팬 인사이트’ 편집장도 지냈다. 이런 이력 덕에 한일 간 경제 네트워크와 일본 재계 동향에 두루 밝다. 그와의 문답이다.
- 일본 경제인들이 느끼는 문제의식은 어느 정도인가요?
“아무래도 불안함을 느끼고 있죠. ‘골치 아프다’는 생각이 있어요.”
- 삼성뿐 아니라 LG, SK 모두 일본 소재 기업 입장에서 상당히 중요한 파트너인데요.
“그렇죠. 일본의 전자 세트(set)기업들이 없어졌으니 일본 부품소재 기업들이 살아남으려면 한국과 협조해야 하니까요. LG나 삼성과 협업해야 차세대 기술을 개발하고 비즈니스도 가능하죠.”
- 왜 아베 내각은 일본 기업들이 더 피해를 볼 수도 있는 선택을 했을까요?
“대체하기 쉽지 않은 품목을 택했겠죠. 불화수소 생산에 매우 어려운 기술이 필요합니다. 설사 (한국 기업이) 국산화하더라도 2~3년 걸리지 않겠나 하는 판단을 한 것 같아요.”
- 삼성전자가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을 텐데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돈으로 해결 못 하는 건 많지 않죠. 다만 우리가 너무 떠들면서 국산화하기보다는 조용하게 진행할 필요도 있습니다. 만약 (삼성전자와 거래가 끊긴) 일본의 (반도체 장비 및 부품·소재) 기업들이 ‘중국과 손잡겠다’고 하면 그것도 골치 아픈 겁니다. 물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의 기술굴기를) 견제하고 있어서 그런 면은 (한국에) 유리하죠.”
국산화 TF와 탈(脫)일본
이 와중에 삼성전자가 주요 소재·장비 국산화를 위한 사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탈(脫)일본’이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국산화 관련 TF는 없다. 정상적인 비즈니스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면서 “(수입선에서) 특정 국가를 배제하거나 혹은 특정 국가만 선택하는 식의 비즈니스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산화에 대한 환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8월 12일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모든 것을 내가 만들어 쓰겠다는 것은 자유무역체제를 역행하는 것이다. 소재는 국산화하면서 반도체는 사달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자유무역체제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반도체업계 고위 관계자도 “일부 품목의 경우 국산화가 가능할지 몰라도 국제 분업화 시대에 어느 나라도 100% 국산화를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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