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前민노당원이 본 집권 86세대 “선악이분법·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이비 교주, 탐욕 가득한 제사장”

  • 신동아
  • 입력 2019년 11월 24일 10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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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람들의 역사적 소명은 ‘한풀이’
● ‘자칭 진보’ 세력과 만신전(萬神殿)
● ‘대깨문’은 이념 아닌 정서로 뭉친 집단
● 복수심의 서사로 외교·경제 다뤄
● 정치선동을 종교적 광신으로 끌어올려
● 제3세계 수준의 민족주의 레토릭만…



집권 86세대는 현재 한국 사회의 주류다. 나는 이들이 한국 사회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를 자임하면서도 조선시대 유교적 도덕주의를 답습한다.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인상, 탈원전정책, 한일 무역갈등, 자사고 폐지 논란 등에서 보듯이 사회 중요 현안을 정(正)과 사(邪)의 관점에서 인식한다. 또한 자신을 청류(淸流)로, 반대파를 탁류(濁流)로 취급한다. 상대를 대화와 설득이 아닌 공격과 절멸의 대상으로 삼아 끊임없는 정쟁을 만든다.

○ 싸구려 한풀이로 대중의 지지 가로채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1980년대 잉태됐다. 자신이 경험한 군사정권과 학생운동의 ‘가해-피해 관계’를 한국 근현대사 전체로 확대해버렸다. 친일, 독재, 기업은 항상 가해자이고 항일, 민주화, 노동은 언제나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역사관 위에 자신을 피해자로 정체화하고, 피해자의 한풀이를 자신의 역사적 소명으로 삼는다. 이것이 86세대의 기본적 세계관이다.

한때 대한민국을 엎어버리자는 혁명론의 신봉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이가 오십 줄을 훌쩍 넘다 보니 가진 게 많다. 이미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약자의 대변자이자 악의 무리와 싸우는 ‘성자’ 쯤으로 알고 있다.

이처럼 허위의식에 빠져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정의로운 가치로 본인 치장에 열중한다. SNS에서 싸구려 공감과 거짓된 결기로 대중의 지지와 후원을 가로챈다. 문제는 SNS와 실제 삶 사이의 간극이다. 언행 불일치를 넘어 ‘언행 배치’가 일상이다. ‘조국 사태’ 때 끊임없이 소환되던 조국의 SNS 어록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조국은 ‘예외적인’ 인물이 아니다. 86세대 정치인의 표준이다. 자사고 논란에서 보듯이 ‘네 자식은 평준화, 내 자식은 자율화’가 86세대 정치인의 교육을 바라보는 기본 태도다. 어디 그뿐인가? 이들이야말로 부동산 규제하는 투기꾼이자, 자식을 미국 유학 보낸 반미주의자며, 성폭력을 저지르는 여성주의자, 태양광 운운하며 민둥산 만드는 환경론자, 부패한 도덕가다.

86세대는 이와 같은 ‘내로남불’을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는다. 자신은 언제나 악과 투쟁하는 선한 세력이고, 자신을 향한 비판은 악의 책동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언제나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 예컨대 조국 사태 국면에서 자칭 진보 세력은 ‘오직 조국만이 검찰개혁을 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 자신이 선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조국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보수 세력의 반격으로, 검찰 수사는 개혁을 거부한 ‘검란(檢亂)’으로 치부한다. 악의 책동이라는 것이다. 조국 가족의 범죄 혐의에 대한 지적마저 ‘한 가족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는 신파조의 피해의식으로 얼버무린다,

선악의 이분법, 복수심의 서사

86세대가 갖고 있는 선악의 이분법과 피해의식, 복수심의 서사는 외교와 경제 문제까지 야기했다. 지난여름 한일 무역갈등과 지소미아 연장 종료 논란이 대표적이다. 그 사람들은 식민지 말기 징용 문제와 한일협정 및 청구권에 대한 문제, 국제관계에서 힘의 역학 등을 진지하게 분석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죽창, 국채보상운동, 독립전쟁, 의병, 이순신을 언급했다. ‘다시는 지지 않는다’며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가 수준의 언사를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냈다. 자신들의 실책을 지적하면 ‘친일’ ‘토착왜구’ 등 낙인을 찍어 도덕적 징벌의 대상으로 삼았다.

선악이분법과 피해의식은 정치 팬덤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동력이다. 정치 팬덤은 이념과 노선이 아닌, 정서와 서사로 뭉친 집단이다. 정치적 아이돌을 숭배하며 본인과 정치인을 일체화한다. ‘대깨문’으로 불리는 정치 팬덤은 보수에 대한 혐오 정서를 기반으로 자기 아이돌이 어떻게 싸우는지, 그 ‘서사’에 집착한다.

이들에게 서사란 여지없이 선과 악의 투쟁이다. 세상은 오직 우리 편과 반대편, 단둘밖에 없다. 복잡한 세상을 달랑 둘로 나누어놓으니, 정치 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음모론에 집착한다. 자기편과 정치적 아이돌이 힘든 건 어떤 악마들의 음모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때 ‘김어준류’의 자칭 진보 스피커가 등장한다. ‘합리적 추론’이라는 핑계로 ‘썰’을 풀며 음모론을 완성시킨다. 대개 여기서 악마 역할은 이명박, 박근혜, 아베, 자유한국당, 삼성, 기무사, 국정원, 검찰이 맡는다. 여기에 홀려버린 정치 팬덤은 악마들의 간악함에 몸서리를 치며 전의를 불태우고, 이슈가 있을 때마다 자칭 진보 세력 주류에게 시간과 돈, 정신을 농락당하며 상시적 동원이 가능한 인적자원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내년 총선은 한일전’이라며 부화뇌동하는 것이다.

86세대의 세계관은 자칭 진보 세력 내부의 새로운 경향인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주의’로까지 전이됐다. 86세대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선악의 이분법과 피해의식, 한풀이로 세계관을 구성한다. ‘넷페미(웹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전략이랍시고 애용하는 ‘미러링’이 이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미러링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세상은 남녀 둘밖에 없고(이분법) 한국 남자들이 우리를 괴롭혔으니(피해의식) 이제는 당한 만큼 갚아주자(한풀이)’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친일과 반일로 나누고(이분법) 저 친일의 후예들이 우리를 괴롭혔으니(피해의식) 이제는 당한 만큼 갚아주자(한풀이)’는 86세대 세계관과 판박이다. 그뿐이 아니다. 자칭 진보가 ‘친일’ 공수표를 남발하며 반대파를 모욕하듯이, PC주의자들 역시 비판자들에게 ‘여성혐오’ ‘한남충’ ‘호모포비아’ ‘인종주의자’ 낙인을 여지없이 찍어버린다.

토템으로 가득한 만신전(萬神殿)

나아가 PC주의자는 자기 존재 자체를 금기로 만들어버린다. 예를 들어 ‘나는 보수주의를 반대한다’라는 말에 우리 사회는 별 반응이 없다. 다들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나는 페미니즘을 반대한다’고 하면 지적·도덕적 야만인 취급을 받는다. 비판을 거부하는 이념, 우리는 이것을 도그마라고 한다. 성폭력에 대한 ‘폭로’는 도그마의 극단적 표출이다. 폭로가 되자마자 피해자와 가해자가 정해진다. PC주의자들은 범죄의 진위를 가려보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성인지감수성’ ‘피해자 중심주의’를 들먹이며 입에 재갈을 물리고자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이러한 원칙은 당파적으로 적용된다. 올해 4월 문희상 국회의장이 임이자 자유한국당 의원의 얼굴을 감싸며 희롱한 일이 있었다. 자유한국당 여성위원회가 즉각 문 의장을 규탄하고 나서자, 여성단체들은 도리어 “미투운동의 정신을 훼손하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정쟁의 도구로 삼는 자유한국당 규탄한다!”고 응수했다. PC주의란 무엇인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 반대하는 것이다. 한국의 자칭 진보 세력에 PC주의는 무엇인가? 당파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중잣대다.

선악의 이분법과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86세대의 세계관,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적극적 지지를 보내는 정치 팬덤, 86세대 세계관을 충실하게 계승하는 PC주의자들, 이들이 바로 한국 사회 자칭 진보 세력의 주축이다. 이들은 친일파, 촛불, 노무현, 세월호, 위안부, 징용, 독도, 미투 등 상징을 좋아한다.

이러한 상징이 선악의 이분법과 피해의식을 불러내기에 용이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상징을 내세워 자신은 핍박받는 선한 자로 포장하며, 정치적 반대파에게는 가해자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상징에는 비극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비판하기 힘들다. 만약 누군가 여기에 이견을 제시하면 ‘도덕적 파탄자’ 혹은 ‘백치’로 취급받는다. 그래서 이들이 내세우는 상징은 금기의 토템이 된다.

한국 사회는 토템으로 가득한 만신전(萬神殿)이다. 86세대 운동권 출신 정치인과 지식인은 토템을 숭배하는 제사장이다. 하지만 모든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그러하듯 이들도 정작 신앙심이 없다.

10월 22일 이낙연 국무총리는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즉위식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즉위를 축하하는 친서를 전달하며 “50년이 채 되지 않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의 우호·협력 역사를 훼손해서야 되겠느냐”고 일본과 관계 회복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만약 3개월 전 이런 견해를 밝힌 정치인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정치 팬덤으로부터 문자 폭탄과 18원 후원금 받고, 토착왜구 소리나 들었을 것이다.
11월 2일 서울 여의도공원 인근에서 열린 ‘제12차 검찰개혁·공수처 설치 촛불 문화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설치하라 공수처’ 등이 쓰인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뉴시스]
11월 2일 서울 여의도공원 인근에서 열린 ‘제12차 검찰개혁·공수처 설치 촛불 문화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설치하라 공수처’ 등이 쓰인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뉴시스]

제3세계 수준의 민족주의 레토릭

자칭 진보 세력이 뱉어내는 제3세계 수준의 민족주의 레토릭은 그 자체로도 위험하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마저 일관된 견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이 진짜 민족의 이익을 생각하는 민족주의자였다면 애당초 감상적인 극한 대결을 지양했을 것이다. 결국 이들에게 민족주의란 내수용, 선거용, 정적 타격용, 대중동원용 이데올로기였을 뿐이다.

86세대 운동권을 주축으로 한 집권 세력은 가치를 일관되게 추구하거나 내세울 수 있는 집단이 아니다. 그저 그럴싸한 구호를 내세우면서 대중을 동원하고자 한다. 적폐청산은 반일 선동으로, 반일 선동은 다시 검찰 때리기로 표변했다. 사실 이들에게는 구호를 외칠 자격이 없다. 적폐는 86세대 주류의 또 다른 이름이고, 반일 선동은 3개월 만에 견해가 뒤집혔으며, 윤석열 검찰총장은 자칭 진보들이 상찬해마지 않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칭 진보 세력은 자기 진영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붙잡아놓기 위해 끊임없이 열정과 광기를 자극한다. 이때 만신전의 수많은 토템은 유용한 도구다. 친일파 사냥에는 소녀상과 강제징용노동자상, 검찰 수사에는 노무현 트라우마, 서초동 ‘조국 수호 시위’에는 촛불이 동원됐다. 비판하기 어려운 금기의 토템을 전시하고, 뒤로는 당파적 이익을 챙겨가는 86세대 정치인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사이비 교주이자 탐욕 가득한 제사장이다.

이들은 정치 선동을 종교적 광신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에는 달인이지만, 정작 경세(經世)에는 실패했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와 복지 정책은 한국사회 상위 10%에 소득과 고용 안정, 복지 혜택을 집중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공무원과 공기업,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노동자가 최대 수혜자가 돼 한국 사회의 새로운 ‘양반층’을 구성했다. 이들은 부동산과 교육, 인맥을 매개로 부와 문화자본을 대물림한다. 문재인 정부는 취임할 때 평등과 공정, 정의를 외쳤으나 사실상 새로운 신분사회를 만들고 있다. 그것이 좌파인가, 진보인가.

집권 86세대가 20대 시절 숨죽이며 읽었을 ‘공산당 선언’ 한 구절은, 지금 조롱받고 있는 ‘늙은 86세대’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귀족계급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결집시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냥주머니를 깃발 삼아 흔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귀족 뒤를 따라나서자마자 그들의 엉덩이에 새겨진 봉건 문장(紋章)을 보고 불손하게 박장대소하며 흩어져버렸다.”

나연준 前 민주노동당 당원·중앙대 박사과정

《이 기사는 신동아 1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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