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초미술관 설립자 J회장은 O관장을 일본 오사카에 데리고 갔다. “옛날에 흘러간 물견(물건)들을 도로 사올라꼬!” “일본에 나간 미술품이 많았나 보지요?” “국보급 문화재가 수두룩하지….” “그런 귀중한 물건은 공식 경매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가요?” “국보급 진짜배기는 암암리에 사고팔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요. 소다비(소더비), 쿠리스티(크리스티)에서 경매되는 기(기) 전부는 아니지….”
오사카의 고색창연한 전통 요정. 입구에 들어서니 늙은 고양이가 하품을 하더니 눈을 껌벅거리며 J회장을 바라본다. J회장은 10대 소년 시절에 형님으로 모시던 문화재 밀매업자인 재일교포 N옹을 만났다. “헹님 연세가 몇인데 아직도 정정하시네예?” “망백(望百)이라네. 지팡이 없이도 걸음은 똑바로 걷지만 정신은 오락가락한다네.” “지(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지팽이 없이는 걷기 에렙습니더(어렵습니다). 헹님보다 먼저 숟가락 놓을 팔자인 모양입니더.” “이 사람아! 좋은 세상에 백 살 넘게 살아야지!”
N옹은 O관장을 슬쩍 훔쳐보고는 눈을 찡긋하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J회장의 젊은 애인으로 본 모양이다. J회장은 이를 눈치 채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헹님, 의심하지 마소! 이 여성은 우리 미술간(관) 간장(관장)인데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요! 하하하!” “내가 큰 실례를 저질렀구먼.” N옹이 사과한다는 뜻으로 O관장에게 술을 한 잔 따라줬다.
O관장은 아흔 한 살 노인인 N옹이 여전히 어깨가 떡 벌어지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해 놀랐다. “어르신, 건강 비결이 무엇인지요?” “청년 시절엔 운동깨나 했다오. 역도산처럼 스모와 레슬링도 했고… 중년 이후엔 매일 맨손 체조를 해 왔소. 요즘 말로는 수투레칭구(스트레칭)… 그리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지요. 오래 살려 하면 소식(小食)하라는데 나는 굳이 음식량을 제한하지는 않는다오.” “역도산?” “불세출의 프로 레슬러요! 요즘 젊은이들에겐 생소한 인물인 모양인데 우리 세대에겐 우상이었소. 한국인이어서 내가 더욱 존경한 영웅….”
J회장은 지장보살도, 수월관음도 등을 되사고 싶다고 밝혔다. 고려불상, 고려청자, 조선백자 등도 구할 수 있는 물량을 모두 사겠다고 말했다. “대동아전쟁 때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은행 임원들이 기국(귀국)할 때 조선 국보를 엄청나게 챙겨갔다카데요! 헹님이 애들을 풀어 그 물견들 좀 찾아주소!” “대한민국 국립박물관에서 해야 할 일을 왜 아우님이 하시나?” “국립박물관 문화재 구입 여산(예산)이 멫(몇) 푼 안 되는데다 암시장 물견들을 살 수가 없다 아입니꺼? 지(제)가 마음 묵고 사는 기(게) 헐씬(훨씬) 빠르지예.” “자네가 설치는 게 공권력에 대한 도전 같은데?” “도전이 앙이라 반란입니더! 하하하!” “자네 기개(氣槪)가 대단하구만! 요새 일본에서는 노인 강력범들 때문에 골치 아픈데 자네는 초강력범일세!” “지(저)는 학신범(확신범)입니더! 잡범 말고 국기(國基)를 흔드는 양심범!” “가질 것 다 가지고, 누릴 것 다 누리는 자네가 늘그막에 웬 과격한 발상인가?” “지가 흙수저 출신 아입니꺼? 요새 한국에서는 소수(少數) 금수저는 설치고 다수(多數) 흙수저는 찍소리 못하는데 이래서 ‘헬조선’이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옵니더. 지가 이런 판세를 확 바꾸는 데 앞장설라꼬예.”
N옹은 녹색 말차를 천천히 마신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대한민국의 숨은 부자인 자네가 그런 결심을 했다니 흥미진진하네!” “정치판, 검찰, 언론… 힘 있는 기관을 모조리 바꿀 낍니더!” “허허, 자네 너무 야심이 큰 거 아닌가?” “전 재산을 바칠 낍니더. 기분 같애서는 결사대를 조직해서 엉터리 권력자들을 처단하고 싶은데….” “내가 젊었을 때 야쿠자 하수인으로 일하면서 주먹과 회칼을 자주 휘둘렀지. 때로는 의협심에서 칼침을 놓기도 했지만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이야. 고약한 놈들을 보면 때리지는 말고 망신 주고 골탕만 먹이도록 하시게!” “헹님이 운제(언제)부터 비폭력 펭하(평화)주의자가 됐심니꺼?” “인도 간디 선생에게서 배웠다!” “알겠심더. 간디 공부 좀 하겄심더.
술을 몇 잔 마신 후 J회장은 N옹에게 넌지시 물었다. “쓸 만한 기술자, 서넛 구할 수 있겄심니꺼?” “중국에서 온 천재 기술자 둘이 있어. 자네가 젊은 시절에 기술자로 활약할 때와 엇비슷한 솜씨를 가진 프로들일세.” “아이고, 젊은 여자(O관장) 앞에서 제 가거(과거) 이야기를 꺼내시니께 민망하네예.” “기술자들을 한국에 보내 주랴?” “6개월 정도 모시겄심니더.”
O관장은 ‘기술자’라는 은어(隱語)가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J회장이 젊은 시절에 기술자로 활약했다니?
이들이 술을 여러 잔 마셔 취기가 오를 무렵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늙은 여성 악사가 방에 들어와 사미센(三味線)을 연주하겠다고 한다. 일흔쯤 되었을까? J회장과 N옹은 정종을 마시며 연주를 들었다. O관장은 그 현악기의 처연(凄然)한 음색을 들으니 인생의 황혼을 연상했다. 끼~잉, 끼끼~잉…. 수십 년간 사미센을 연주했을 그 노기(老妓)는 그날 저녁이 마치 마지막 연주일이라도 되듯 이마에 땀방울이 흘리며 혼신의 힘으로 활을 켰다. 끼끼끼~잉! 피날레 부분을 그렇게 연주하고 할머니 연주가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노(老) 예술가의 절정의 순간이었다. “내 인생에서 범상(凡常)한 날은 없구마!” J회장은 그렇게 독백하고는 요정 주인을 불러 두툼한 돈봉투를 꺼내 그 연주가의 은퇴 후 요양비로 쓰라고 건네주었다.
이튿날 오전 오사카 시내 숙소인 N호텔로 찾아온 N옹은 J회장에게 큼직한 상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겉에 용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왕실 물건을 보관하는 상자인 듯했다. “이기(이것이) 멉니꺼(뭡니까)?” “열어 보시게.” J회장은 꺼낸 물건이 구중심처(九重深處)의 여성 당의(唐衣)임을 알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선의 왕비나 공주가 입었던 옷?” “자네 감식안이 날카롭군!” J회장은 옷을 펼쳐 문양과 바느질을 세세히 살핀다. 가슴 부근이 찢어졌고 거무스름한 핏자국이 남아 있다. J회장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이 옷 주인이 살해당했심니꺼?” “그렇다네.” “누구 옷인지?” “…… 놀라지 마시게. 명성황후!” “뭐라꼬예?” “최후의 순간에 입고 계시던 바로 그 예복이라네.” “허!” J회장과 O관장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하여 입을 벌렸다.
이윽고 J회장은 정신을 차려 입수 경위를 물었다. N옹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느릿느릿한 말투로 대답했다. “내 대부님이 가보(家寶)로 간직하던 것이야. 대부님의 증조부께서 청년시절에 낭인 협객이었는데 조선에 가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직접 가담한 당사자였다고 하네. 황후는 시해당한 후 시신이 불태워졌지. 불태우기 직전에 증조부가 겉옷을 벗겨 보관하였다고 하네.” “이 옷을 헹님이 와(왜) 갖고 계십니꺼?” “대부님은 언젠가 한국에 다녀오시더니 부활한 명성황후를 보았다는 둥, 황후께서 입던 옷 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둥 실성한 듯한 소리를 내뱉으시는 거야. 대부님은 자택에 명성황후 추모 사당을 짓고 속죄 기도를 올리며 살았지. 작년에 작고하셨는데… 임종 때 나에게 이 옷을 주시면서 한국에 가서 되살아난 명성황후를 만나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기셨어.“ “항당(황당)무계한 스토리네예.” “이 옷에는 황후의 처절한 원(怨)과 한(恨)이 배어 있어 기(氣)가 약한 여성은 만지기만 해도 쓰러진다는군.” “섬뜩합니더!” “자, 이 옷을 자네에게 주겠네. 부활한 명성황후를 찾아 주인께 드리시게!”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J회장의 딸 J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그녀는 O관장을 의식한 듯 아버지 팔짱을 끼고 아양을 떨며 달라붙었다. “니는 부간장(부관장)잉께네 앞자리 조수석에 앉거라. 간장(관장)님이 니보다 상석에 앉아야제.” J회장과 O관장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J여사는 얼굴을 뒤로 돌려 묻는다. “아빠, 일본에서 물건 많이 찾았어요?” “일단 부탁만 하고 왔다. 요 메칠(며칠)새 공부 마이(많이) 했나?” “권력가 안팎을 쑤셔서 목에 힘깨나 준다는 분들이 소장한 문화재들을 확인했어요. 몇몇 장․차관, 정치인, 법조인들이 뇌물조로 받은 정황을 파악했구요.” “그래? 제법이구만. 내물(뇌물)이 학실(확실)하모 한수(환수)해야지.” “누가 환수하나요?” “그걸 몰라서 묻나? 내가 해야지, 안 그렇나?” “아빠가 무슨 자격으로?” “정의(正義)의 대리인으로….” “그들은 모두 칼을 가진 분들이니 조심하셔야 해요.” “‘정의는 힘이 쎄다’라는 말을 못 들어봤나?” “아빠가 이젠 마치 정의의 사도 같으시네!” “잔소리 말고 권력가들이 가진 미술품 리스트 만들어 바라(봐라).”
J여사가 작성한 리스트에서 1번에 오른 전직 권력부처 장관 H씨. 그의 소장품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물건은 백제 금관이란다. 일제 강점기에 도굴된 것으로 문화재 밀매업자들의 입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물건이다. 물론 문화재로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았고 ‘양지’에서 공개된 적이 없다. H장관이 어떤 경위로 이를 입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 재벌이 알짜 공기업을 불하 받도록 힘써준 대가로 받았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그러나 J회장이 파악한 정보인 소수설은 금수저 출신인 H장관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란다. H장관의 친가, 처가 가계는 모두 구한말부터 권문세가(權門勢家)다. 백제 금관 도굴꾼은 몇 푼 받지도 못했고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한다. J회장은 H장관이 언젠가 대권 도전에 나설 것이란 첩보를 입수했다. 그러면 거액의 활동자금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H장관의 며느리가 J여사의 대학후배이며 르네상스회 멤버다. J여사는 그 며느리를 꼬드겨 H장관이 성북동 자택에 J회장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도록 했다. H장관과 J회장은 이런저런 자리에서 만나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으나 독대(獨對)하기는 처음이었다. “장간(장관)님,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더.” “모시게 돼 제가 영광입니다.” “장간님께서 메칠 전에 안양CC에서 홀인원하셨다카데예. 축하합니더!” “소문이 그리 빨리 퍼졌습니까? 감사합니다. 하하하!” J여사가 H장관의 며느리에게 찔러준 촌지봉투로 며느리는 S호텔에 교섭하여 저녁 식사를 마련했다. 풀코스 프랑스 요리로 식사를 마치고 코냑을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
H장관의 머릿속에는 ‘이 영감탱이가 뭘 노리고 나에게 접근했나?’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고(古)미술계의 큰손이라고 하니 혹시 백제 금관에 대해 냄새를 맡았나? J회장은 H장관의 표정을 읽고 심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럴 때는 에둘러 말하지 말고 단도직입(單刀直入)이 효과적이다! “장간님께서 대한민국을 위해서 큰일을 하시야지예! 그랄라카모(그러려면) 필요한 기 많을 낀데… 톡 까놓고 말씀드리겄심니더. 백제 금간(금관), 한 번 구경시켜 주실랍니꺼?“ “백제 금관이라뇨?” “다 알고 왔심더! 가보 아입니꺼?” “…….”
H장관의 지하 벙커 개인미술관에 소장된 백제 금관을 보고 J회장은 견물생심(見物生心)이 꿈틀거렸다. “값은 얼마든지 쳐줄 모양이니께 지한테 넘기시이소!” “저희 가보여서….” “이거 밀거래 시장에서 50에 거래됩니더. 지가 열 배인 500 드리겠심니더.” “500억 원이라….” H회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장간님, 그라고 기중(귀중)한 문화재를 자택에 나두모(놓아두면) 곤란합니더. 누군가가 들이닥치모 우짤라꼬 그랍니꺼?” “그럼 어디에다 맡기겠습니까?” “지가 운영하는 미술관에 맽기시이소. 완벡(완벽)한 보안 시수템(시스템)이 작동한께네 안심하셔도 됩니더.”
그래서 일단 그 백제 금관은 부초미술관에 임시로 소장됐다. 중국에서 온 ‘천재 기술자’는 미술품 위조 전문가였다. D씨는 그림, F씨는 조각, 금속공예 담당이었다. F씨는 H장관 소장품인 백제 금관을 보름만에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1500년 전 왕관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푸르스럼한 녹도 만들어 붙였다.
H장관은 금관을 바깥에 맡긴 뒤 밤마다 꿈자리가 뒤숭숭해 낮에는 머리가 멍했다. 낮잠에도 조상들이 나타나 질책하는 악몽을 꾸었다. ‘가보를 팔았다간 천하 불효자가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영감탱이를 믿을 수 있을까?’ 이런 불안감 때문에 결국 J회장에게 금관을 돌려달라고 했다. “혹시 앞으로도 팔 의향 있으모 지한테 연락하이소!” J회장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뜨리며 금관을 반환했다. 며칠 후 H장관이 J회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제 편하게 잠을 잡니다. 금관이 제겐 수호 무사 역할을 하는가 봅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J회장은 혼자서 쓴 웃음을 지었다. ‘가짜 금관을 붙들고 수호 무사라고? 하하하!’
J여사가 작성한 리스트 2번의 주인공은 모 사립대학재단 L이사장. 조선의 ‘3원 3재’ 화가의 명작 다수를 소장하고 있다 한다. 3원이라면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 등 3명이고 3재라면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관아재(觀我齋) 조영석 등 3명이 아니겠는가. L이사장의 별명은 ‘비리 백화점’이다. 교수 채용 때 금품 강요는 약과이고, 공금 유용과 입시 부정은 다반사, 폭행과 성희롱은 취미이다. 무수한 고소, 고발을 당해도 요리조리 무혐의로 빠져나온다. 친가, 외가, 처가, 사돈댁은 모두 권가(權家)이다.
J회장은 L이사장 같은 인간말종은 언젠가 자기 손으로 응징하고 싶었다. 그런 인간을 공권력이 봐주니 ‘정의의 사도’가 나서서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할 것 아닌가! 그러던 차에 리스트에서 L이사장의 이름을 발견하곤 응징을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작정했다. 기분 같아선 L이사장을 발가벗겨 놓고 회초리로 볼기짝을 찰싹찰싹 때리고 싶다. 아니면 똥침이라도 찌르고 싶다. 그러나 그런 물리적 린치는 자제해야 한다고 간디 선생이 가르치셨지!
J회장의 지휘에 따라 L이사장 골탕 먹이기 작전은 착착 진행됐다. 먼저 O관장과 J여사가 L이사장을 방문해 ‘3원 3재 특별전’ 계획을 설명했다. L이사장의 소장품도 출품해달라고 요청했다. L이사장의 처제가 르네상스 회원이어서 그녀를 앞세우니 접근하기가 수월했다. J여사는 L이사장의 처제와 부인에게 미리 벤츠차를 각각 1대 선물하는 등 ‘기름칠’을 해놓았다. 부인은 남편에게 단단히 일렀다. “특별전에 당신 소장품을 꼭 내세요. 그래야 그 그림값이 올라가요.”
L이사장은 마누라와 처제가 ‘뇌물’을 먹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는 처음엔 뚱한 표정으로 O관장을 맞았으나 J여사가 최고급 골프채 세트와 올림픽 금메달 모형 10여 개를 건네자 금세 입이 쩍 벌어졌다. L이사장은 ‘3원 3재’의 그림 각 3점씩 모두 18점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절반가량은 미공개 작품이란다. 학교 박물관 특별수장고에 숨겨 놓은 그림들을 O관장이 살펴보니 과연 명작, 대작이었다. 겸재의 금강산도는 공개된 여느 금강산도보다 크고 완성도가 높았다.
이 그림들이 부초미술관에 옮겨져 전시회를 준비하는 동안 기술자들에 의해 복제됐다. 중국인 D씨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로 단원, 오원, 혜원의 그림들을 베껴 그렸다. 공예전문가 F씨는 그림 모사에도 재주를 보여 구도가 간단한 그림 3개를 만들었다. J회장도 오랜만에 왕년의 기술을 발휘할까 하다가 D씨, F씨의 심기를 건드릴까 걱정스러워 그만두었다.
L이사장 작품의 위작(僞作) 18점은 J회장 소장품 30여 점과 함께 부초미술관에서 전시됐다. 부초미술관이 비공개 시설이어서 일반관람객은 받지 않았다. L이사장의 친인척 등 극소수 인사만이 초청됐다. 남성 손님에겐 최고급 와인을, 여성 손님에겐 명품 핸드백을 선물했다. 관람객 가운데 그 그림이 가짜라는 사실을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L이사장은 가짜그림 18점을 받아갔다.
리스트 3번은 사채업, 부동산업 등으로 떼돈을 번 M회장. 뇌물은 아니었으나 고리채 놀이를 하면서 상대방의 궁박한 상황을 악용하여 미술품을 갈취했단다. 특히 외환위기 때 부도위기에 몰린 대기업 총수들의 컬렉션을 시가의 100분의 1 값으로 ‘폭풍 흡입’했다고 한다. 소장품은 고미술품을 비롯하여 현대 화가들의 명작들도 수두룩한 것으로 알려졌다.
M회장에게 접근하는 방편은 J여사의 인맥을 총동원해도 찾을 수 없었다. J회장은 극장 껌팔이 소년 출신인 O회장이면 M이란 자와 연결될 것 같았다. 예상이 적중했다. “그자는 한때 연예 흥행업계에서 저와 라이발(라이벌)이었지예. U마담을 사모해 눈물까지 흘리며 구애했으나 개맹크로(처럼) 차였고…. 그자는 마누라도 죽고 자석(자식)들도 모두 미국에 가뿌려서 요즘 독거노인 신세라카데예. 그 많은 재산이 다 무신 소용이 있겠심니꺼?”
U마담! J회장의 머리엔 번쩍 스치는 상념 같은 게 있었다. ‘룸살롱계의 여왕’ 출신인 그녀의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에서 황후의 기운을 감지했었다. 일본에서 갖고 온 명성황후의 옷을 그녀에게 입혀볼까? 부초미술관에 U마담을 초대했다. 황후에 대한 예우로 눈을 가리지 않고 모셔왔다. 그녀는 부초미술관 주변의 단양 풍경이 마음에 드는 듯 콧노래를 불러가며 풀밭을 걸었다.
“U여사님, 멀리 오신다꼬 욕봤심니더!”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군요!” “인간 가운데는 여사님 겉은(같은) 황후급은 계실 수 있십니더!” “무수리 출신인데요, 호호호!”
인사가 끝나자 J회장의 얼굴은 경건한 모드로 바뀌었다. 접견실에서 그의 왼쪽엔 딸 J여사, 오른쪽엔 O관장이 앉아 있었다. J회장 앞 탁자엔 무슨 큼직한 상자 하나, 자그마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큰 상자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명성황후의 옷! J회장은 J여사에게 옷을 건넸다. “니가 먼저 입어 바라(봐라).” 옷에서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J여사는 그 기운에 압도된 듯 몸을 덜덜 떨며 당의와 치마를 걸쳤다. “아!” J여사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비틀거렸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옷을 벗었다. “휴우!” 겨우 안색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아무나 이 옷을 입는 게 아닌가 봐요.” J여사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J회장의 눈길이 O관장에게 쏠리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색되지는 않았지만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녀의 기(氣)는 보통 여성보다는 훨씬 셌지만 황후급은 아닌 모양이다. J회장은 작은 상자를 열어 클레오파트라 왕관을 꺼냈다. 명성황후 의상을 입고 가까스로 숨을 고르는 O관장에게 왕관을 씌웠다. 동, 서양을 대표하는 여걸(女傑)의 유품을 한 몸에 걸치니 그 중량감이 얼마나 막중했으랴. O관장은 얼굴빛이 파르랗게 바뀌면서 구토를 하려 했다. 그녀는 더 버티지 못하고 옷을 벗었다.
이제는 U여사 차례. 그녀는 마치 자기가 아침에 벗어놓은 옷을 다시 입는 것처럼 편안하게 걸쳤다. 클레오파트라의 왕관을 쓰고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광채가 뿜어 나오는 듯했다. 오! 황후여! 여왕이여! J회장, O관장, J여사는 저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그녀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회장님, 왜 이러세요? 얼른 일어나세요.” U여사가 J회장을 붙들고 일으켜 세웠을 때야 J회장은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잠시 멩성항후(명성황후)님을 봤다니까!”
U여사가 옷과 왕관을 벗어 상자에 넣자 J회장이 큰 상자를 U여사에게 넘겨주었다. “이 옷은 진품 멩성항후 예복인데 여사님이 가지시이소!” “제가 무슨 이유로 이런 진귀품을 가지나요?” “여사님은 멩성항후 기운을 가진 분이어서….” “명성황후는 첫 아들이 생후 사흘만에 죽자 허전한 마음을 무당 굿풀이에 많이 의존하셨지요. 고향 장호원에서 만난 무당에게 진령군이란 벼슬을 주고 궁궐 안에 들어와 살도록 했답니다. 명성황후 자신이 신기(神氣)가 많은 분 아니었을까요? 제가 명성황후 기운을 가졌다니 어안이 벙벙할 뿐입니다.” “멩성항후에 대해 훤하시네예!”
다시 평정심을 찾은 J회장이 U여사에게 사채업자 M회장에 대해 언급했다. “그분이 미술품을 마이 갖고 있다카데예. 여사님께서 저희하고 그분하고 연결만 좀 시켜주이소.” “그분의 미술품을 사시려고요?” “산다기보다는….” “사지 않으시면서 만나려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답변은 J회장 대신에 O관장이 했다. 이 부초미술관을 한국 문화 융성의 메카로 키우려 하는데 M회장의 소장품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민초(民草)가 세운 이 미술관은 해외에 반출된 우리 문화재를 도로 가져오는 일에도 앞장설 것이라 덧붙였다. M회장의 미술품을 사지 않으면서 부초미술관이 소장하는 방법은 기증 받거나 영구임대 받거나 하는 것이었다. U여사는 돌아가는 판세를 재빨리 읽었다. “그 문제는 제게 맡기세요. 1주일 후에 M회장을 여기로 모시고 올 테니 그분 소장품을 전시할 공간을 확보하고 그날 보여주세요.”
U여사가 M회장의 근황을 수소문해보니 S병원 특실에 입원해 있단다. U여사는 파리의 피에르 에르메 가게에서 사 온 마카롱을 들고 병문안을 갔다. 룸살롱에서 꼽추춤을 추며 익살을 부리던 M회장의 활달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콧구멍에 비닐 호흡 줄을 낀 병자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의식은 또렷했다. “회장님, 얼른 쾌차하셔야지요!” U여사가 M회장의 비쩍 마른 손을 만지며 말하자 M회장은 물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천지개벽하겠네! U마담이 나를 보러 오니!” “마땅히 찾아뵈어야죠.” “내가 병상에서 일어나면 데이또 한 번 해주겠소?” “당연하지요. 우선 앰뷸런스를 타시더라도 1주일 후에 바람 쐬러 지방에 한 번 내려가시죠.” “U마담이 가자고 하면 장의차라도 타고 가야지! 하하하!” U여사가 건네준 마카롱을 입에 넣고 M회장은 중얼거렸다. “입속에서 사르르 녹는 이 달콤한 과자… 앞으로 몇 개나 먹고 죽겠나?”
U여사의 부축을 받고 부초미술관에 도착한 M회장은 환자복 대신에 무리를 해서라도 감색 정장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특실 당직 레지던트 의사와 간호사도 따라왔다. M회장은 J회장을 보자 눈물을 왈칵 흘렸다. 두 사람 모두 흙수저 출신인 ‘음지(陰地)의 거부(巨富)’들이다. 전경련, 대한상의 등 공식적인 경제단체의 회원도 아니다. M회장은 J회장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형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라도 용서를 빌 기회가 왔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지금 무신 소리를 하는 기요? 우리 오래 서로 존재를 알았지만 직접 거래를 한 적도 없는데….” “30년 전에 제가 북창동 나이트클럽을 뺏기듯 팔았는데 그 배후에 형님이 있는 줄 알고 애들을 시켜….” “그만!” J회장은 그때 극장 껌팔이 출신 O회장이 그 나이트클럽을 산다기에 자금을 빌려준 적이 있다. 이권 다툼이 심한 곳이었는데 당시에 J회장은 명동 롯데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 칼침 보복을 받은 적이 있다. 왼쪽 허벅지를 ‘사시미 칼’로 찔려 두어 달 고생했다. 이제 새삼 그 악연을 들먹여서 뭘 하겠는가. “기억도 안 나요! 오늘은 좋은 이야기만 합시다!”
M회장은 O관장에게서 부초미술관의 향후 활동계획에 대해 설명을 듣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U여사도 M회장과 팔짱을 끼고 경청했다. 자리를 옮겨 미로(迷路) 이곳저곳을 거쳐 텅 빈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천정, 벽, 바닥 모두 하얀 색이어서 넓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무한(無限) 공간인 것 같았다. 바닥에 놓인 상자 3개가 좌표 역할을 한다 할까. O관장이 상자를 열어 명성황후 예복을 꺼냈다. 그 옷을 정성스레 U여사에게 입혔다. 작은 상자에서 클레오파트라 왕관을 꺼내 U여사의 머리에 씌웠다. 명성황후의 부활! 클레오파트라의 환생!
U여사를 바라보는 M회장은 환희에 찬 듯 몸을 부르르 떤다. U여사는 목소리를 낮게 깔아 궁중어투로 말한다. “이 공간은 회장님의 신산(辛酸)한 삶의 결정체인 미술품이 숨 쉴 곳입니다. 그 미술품과 함께 회장님은 영생(永生)을 누릴 것입니다.” “예? 예….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J회장은 신비한 힘에 압도당한 듯 무릎을 꿇고 U여사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회장님, 결단을 내리십시오. 모든 미술품을 부초미술관에 기증하시겠다고!” “예?”
O관장이 다른 작은 상자에서 브루투스의 검을 꺼내 M회장의 손에 쥐어준다. M회장은 영문을 몰라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U여사는 목청을 높여 말한다. “회장님, 그 칼은 브루투스가 로마 공화정을 살리기 위해 시저를 찔러 시해한 세계사적인 보검입니다. 그 칼을 휘두르면 용기가 샘솟는다 합니다. 얼른 일어서서 칼을 휘둘러 보십시오.”
M회장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슬러 일어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짝! 짝! 짝! U여사, O관장, J회장 등이 박수를 쳤다. M회장은 심호흡을 한 뒤 큰 소리를 내뱉었다. “제 소장품 모두를 이곳에 기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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