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온 여성 미술사학자 줄리아나는 충북 단양의 부초미술관 터를 보고 천혜(天惠)의 명당이라 판단했다. ‘숲으로 둘러싸여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그러면서도 채광(採光)과 통풍이 원활하다는 점! 그리스 신전 부지와 비슷한 성지(聖地)가 아닌가?’ 줄리아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감탄했다. 여기에서 며칠 묵으니 머릿속이 알프스 산속의 샘물처럼 맑아지고 가슴이 이른 봄 움트는 새싹처럼 꿈틀거린다. O관장에게 더 머물고 싶다 하니 아예 한 1년여 미술관에 취직해서 살라고 한다.
“저희가 소장한 서양 문화재를 꼼꼼히 분류하고 해설 자료를 작성해야 해요. 줄리아나 같은 인재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오니 저희로서는 행운이죠!” “저희 가문이 고성(古城)을 활용해 만든 로마 근교의 박물관보다 여기가 경관(景觀)이 훨씬 좋습니다. 개벽(開闢)의 기운이 꿈틀거립니다.” “서양 학자분이 ‘개벽’이란 용어를 구사하시다니!” “파천황(破天荒)의 정기(精氣)를 느낍니다!” “아! 대단하세요. 풍수학까지 배우셨군요.” “진짜 대단한 분은 O관장님이에요. 이탈리아어를 마치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시니! 언어의 천재입니다.” “호기심을 갖고 노력하다 보니 그렇지요. 그래도 악센트가 강한 나폴리 방언은 알아듣기 힘듭니다.” “그건 이탈리아 원어민도 마찬가지죠.” “사실은… 일전에 줄리아나님이 쐐기문자를 암호로 사용한다 하셨는데, 그 문자를 조금 배우고 싶거든요.” “얼마든지 가르쳐 드리지요.”
줄리아나는 부초미술관 게스트하우스에 숙소를 마련하고 틈틈이 바깥으로 나와 나무, 풀, 꽃을 완상(玩賞)했다. 대자연의 기운을 얻으니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이탈리아에서 온 젊은 여성 저널리스트 소피아가 북한 지도자와 인터뷰한다면? 그것이 줄리아나 자신의 힘으로 성사된다면? 이런 일이 한반도평화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줄리아나는 여러 상상으로 행복한 현기증을 느꼈다.
𒀃𒀓𒐅𒑖𒐷𒁂𒀿𒀮
어느 날 줄리아나는 이런 쐐기문자 암호를 북한 지도자에게서 받았다. 음가(音價)를 부여하는 등 해독(解讀) 작업을 벌이니 다음과 같은 뜻으로 풀이됐다.
열흘 후 일요일 낮 12시 15분 마카오 R호텔 프론트에서 요원의 안내를 받기 바람
북한 요원이 소피아를 화상 대화가 가능한 곳으로 안내한다는 뜻이렸다! 휴대전화로 이 소식을 서울에 머무는 소피아에게 알렸다. 보안을 위해 일부러 짙은 나폴리 사투리를 썼다. 소피아는 반색하며 환호를 질렀다.
소피아가 매니저인 P씨에게 알렸더니 P씨는 기뻐하면서도 뭔가 의심스러운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줄리아나라는 여성, 혹시 허언증 환자 아닐까?” 남의 이목을 끌기 위해 무책임하게 거짓말을 퍼뜨리고도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증세…. P씨의 말을 듣고 소피아도 반신반의(半信半疑)한다.
“제가 로마에 있을 때 <소설 개마고원>이란 장편소설을 읽었는데 거기에 북한 지도자와 베른중학교 동기생이라는 한국여성이 쐐기문자 암호로 소통하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혹시 줄리아나도 그 소설을 읽고 흉내 내는 것 아닐까요?” “글쎄? 줄리아나는 한글을 몰라 그 작품을 읽지 못할 텐데.” “이탈리아어 판으로 읽지 않았을까요?” “그 작품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지는 않았을 걸? 나도 그 작품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사실에 바탕을 둔 스토리인지,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인지 헷갈리더구먼.” “의심스럽다고 해서 제가 거절한다면 영영 기회는 오지 않겠지요. 속는 셈 치고 마카오로 가겠습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방송사에서 출장 경비를 얻어낼 수 있을까?” “출장비를 받는다 하더라도 만약 줄리아나의 말이 허풍이라면 우리는 개망신 당하는 것 아녜요?” “그렇지. 코흘리개 장난도 아니고….” “보안 문제도 신경 쓰여요. 방송사에다 출장계획을 보고하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한국정부 당국에 알려질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이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우려도 있어요.” “음… 그러면 공식 루트 말고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 볼까?” “예?” “부초미술관 설립자 J회장께 지원을 부탁하면 되겠는데….”
J회장의 흔쾌한 지원 약속으로 ‘마북 작전’은 일사천리로 추진됐다. ‘마북’이란 작전명은 ‘마카오, 북한 지도자’의 합성어인데 P씨가 한때 거주한 용인시 마북동이 연상되기도 해서 그렇게 명명했다. 참가자는 인터뷰어 소피아, 보조자 무기고, 촬영자 Y감독, 조명 및 총무 담당 P씨 등 4명. 홍콩에서 선편으로 마카오로 가기로 하고 인천-홍콩 왕복 항공권을 예약했다. 홍콩과 마카오에서의 숙소는 5성급 호텔로 잡았다. “겡비(경비)는 넉넉하게 디릴낑게(드릴테니) 펜(편)하게 댕기오시이소(다녀오세요).” J회장의 말에 따른 것이다. 출발 이틀 전에 J회장은 부초미술관 O관장도 대동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겐문(견문) 넓히도록 덱고(데리고) 가주모 좋겄심더.”
인천 발, 홍콩 행 항공기 내부. 북한 지도자를 인터뷰하기로 한 소피아는 옆 자리에 앉은 남자친구 무기고를 의식하지 않고 질문 내용을 북한 사투리로 중얼거리며 연습한다. “고모부를 왜 처형했습네까?” 이 질문을 들은 무기고가 소피아의 팔을 흔들며 묻는다. “너무 센 돌직구 질문 아냐?” 소피아는 대답 대신에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의 인터뷰 묶음책인 <역사와의 인터뷰>를 무기고에게 내밀어 보인다. ‘팔라치는 독재자에게 타협하지 않았어!’ 소피아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는다.
P씨와 O관장은 나란히 앉아 각자 둘 사이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상념에 빠진다. ‘이런 걸 인연이라 하나?’ P씨가 이렇게 느슨한 공상에 잠겨 있을 즈음에 O관장은 훨씬 밀도 높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흙수저 소녀를 오늘날 금수저 자리에 올리게 한 인물! 이 남자의 옆구리에 붙어 미래를 함께 보내고 싶다!’
홍콩에 도착해서 호텔에 짐을 맡긴 다음 이곳 사정에 정통한 Y감독의 안내로 F호텔의 그 유명한 딤섬을 먹으러 갔다. 온갖 종류의 딤섬이 향기를 풍겼지만 일행은 ‘마북 작전’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입맛을 잃었다. ‘딤섬이란 조그만 만두 한 점 가격이 자장면 한 그릇 값과 맞먹는군!’ P씨는 배를 곯아가며 노래 공부를 하던 청소년 시절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 역경을 뚫고 라 스칼라 극장 무대에까지 섰건만 오늘날 다시 비루한 일상을 보낸다고 여겨지자 식도를 넘어가던 딤섬이 도로 밖으로 토해 나오려 한다.
눈치 빠른 O관장이 물컵을 얼른 건넨다. “선생님, 물 좀 드세요.” P씨는 물을 천천히 마시고 한숨 돌린 다음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이라 부르지 말랬는데!” “그럼 뭐라 부를까요?” “…….”
마카오. 포르투갈이 1887년부터 1998년까지 111년 동안 통치해 유럽풍 시가지를 지닌 곳. 한때 북한이 마약밀매, 위조 달러 유통거점으로 삼았던 도시.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1837년부터 5년간 신학을 공부한 장소. 요즘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처럼 카지노와 호텔로 번쩍이는 유흥의 메카.
일요일 낮 12시 마카오 R호텔 로비. 소피아 일행은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호텔에 도착해 로비에서 주변 사람들을 살폈다. 카지노로 꽤 유명한 호텔인데 그날따라 손님이 그리 붐비지는 않았다.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줄리아나라는 뻥쟁이의 장난에 놀아나는 것 아닐까?’
소피아가 이런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데 웬 건장한 체격의 사각턱 사나이가 나타나 말을 건다. “이딸리아에서 온 소피아 동무?” “그렇습네다!” “따라 오시라요.” 일행이 사각턱을 따라 호텔 밖으로 나오니 정문 앞에 20인승 미니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무술요원으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 대여섯 명이 타고 있었다. 버스로 아시아 최대 수영장인 갤럭시 리조트 앞을 지나 20분가량 어디론가 가서 외벽 페인트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허름한 빌딩 앞에 도착했다. 음습한 빌딩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 하니 께름칙했지만 이미 각오한 상황이다.
“날래(어서) 오시라요!” 책임자로 보이는 사내가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송충이 눈썹’을 가진 그는 일행을 시청각실로 안내했다. 대형 모니터 앞에 놓인 의자에 인터뷰어인 소피아가 앉았다. Y감독은 인터뷰 장면을 촬영하려고 카메라를 만지작거린다. P씨, O관장, 무기고는 참관인이므로 눈을 껌벅거리며 모니터를 바라볼 뿐이다.
팟! 드디어 모니터가 밝아지면서 웬 30~40대 남자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북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회견에 앞서서 줄리아나 선생, 얼굴 좀 봅세다.” 소피아는 어리둥절해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줄리아나는 여기에 없고 한국에 있시오. 인터뷰는 내가 하는데 줄리아나는 왜 찾는기요?” “줄리아나 선생과 먼저 인사를 나누고 회견을 진행하려 합네다.” “뭔가 의사소통에 차질이 빚어진 모양인데 줄리아나 인사는 생략하고 시작합세다. 빨리 지도자 동지에게 카메라를 맞추시라요.” “안 됩네다. 내일 이 시간에 줄리아나를 모시고 옵시오.” 그 말을 끝으로 화면의 전원이 꺼졌다. 예상 밖의 돌발사태다.
‘송충이 눈썹’이 다가와 재촉한다. “준비가 덜 된 상태로 오신 모양입네다. 돌아가시라요.” 소피아는 눈을 부릅뜨고 항의한다. “도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시오?” “우리 공화국 당국에서 안 된다 하는데 왜 이리 고집을 피우시오?”
실랑이를 벌이다 일행은 쫓겨나다시피 했다. 일행이 순순히 떠나려 하지 않자 건장한 어깨 대여섯이 몰려와 윽박질렀다. 이러는 과정에 무기고와 요원 사이에 서로 밀치는 몸싸움이 잠시 벌어지기도 했다. O관장은 무기고의 팔을 끌어당기며 하소연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갑시다.”
일행은 할 수 없이 빌딩 앞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도로 R호텔로 돌아왔다. 소피아가 한국에 있는 줄리아나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일어난 사태를 설명했다. 역시 억센 나폴리 원단 사투리로 말했다. 이탈리아어에 능통한 P씨와 O관장도 소피아의 나폴리 방언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소피아는 통화 내용을 다시 찬찬히 설명했다. “줄리아나가 인천 발 직항편으로 내일 오전에 마카오로 도착한다고 하네요. 속는 셈 치고 내일 다시 시도해 보기로 해요.”
P씨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북한은 국제협상에서 늘 이런 식으로 골탕 먹이며 상대방을 길들인다고 하더니….” O관장은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이에요. 내일을 기다려 봐요.” Y감독이 기분 전환 겸해서 마카오의 명문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한다. “미슐랭 가이드의 최고 등급인 별 3개를 받은 곳으로 안내할게요. 리스보아 호텔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입니다.”
이튿날인 월요일 낮 12시 마카오 R호텔 로비. 하루 전과 같은 시각인데 손님은 훨씬 줄어 썰렁하다. 마카오에 도착한 줄리아나는 숨을 헐떡이며 O관장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사각턱이 다시 나타나 자기를 따라오라는 시늉으로 턱을 호텔 정문 쪽으로 돌렸다. 일행은 어제와 같이 미니버스를 타고 그 낡은 빌딩으로 갔다.
‘송충이 눈썹’이 능글능글 웃으며 일행을 맞는다. “줄리아나 선생이 뉘기요?”그는 줄리아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짐짓 그렇게 물었다.
어제처럼 시청각실에 들어가니 모니터가 훤히 빛나고 있었다. 먼저 줄리아나가 북한 지도자와 인사하기 위해 중앙의 의자에 앉아 모니터 상단의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챙! 금속성 소리와 함께 화면에 북한 지도자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엄청나게 큼직한 책상 앞에 앉은 모습이어서 카메라에서 멀어 얼굴이 아주 작게 보였다. 그는 영어로 말을 걸었다. “줄리아나? 오랜만이야!” “오랜만인데… 우리, 영어보다도 독일어로 말하는 게 더 편하지 않아?” “독일어는 까먹었어. 남조선엔 뭣 하러 왔냐?” “네 목소리가 많이 바뀌었는데?” “웬 목소리 타령이야? 나이가 들면서 목소리가 좀 굵어졌지.” “아니, 좀 이상해서….”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그럼 그 이딸리아 보도일꾼 좀 바꿔봐!”
일행은 줄리아나와 북한 지도자의 밀도 높은 대화를 잔뜩 기대했다가 이렇게 싱겁게 끝나자 실망했다. 소피아가 중앙 의자에 앉아 상대방에게 전투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북한 사투리를 익혔다지만 서울말과 뒤섞여 뒤죽박죽이다.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핵무기, 그만 개발하면 안 되갔습네까?” “미제국주의자와 남조선 괴뢰도당이 우리 공화국을 죽이려 하니 자위권을 행사할 뿐이오.” “지도자 동지의 오마니가 제주도 출신이어서 순수 백두혈통이 아닌지 알고 계시지 않습네까?” “외할아버지가 제주도 출신… 오마니는 일본에서 태어난 북송 재일교포… 아니, 그런데 왜 그런 쓸데없는 걸 물으시오?” “오마니 고향을 핵미사일로 까부수겠다는 게 말이 됩네까?” “염방진(건방진) 질문이구만!” “그럼 염방지지 않게 묻겠습네다. 북한 인민들이 헐벗고 굶주리는데 어떡할 작정입네까?” “그런 헛소리 마시라요! 날씬한 우리 인민들이 당신 눈에는 굶주린 사람으로 보이오?” “당신은 지도자라는 사람이 호의호식해서 과잉 체중 아닙네까?” 그러자 상대방은 벌떡 일어서서 목소리를 높인다. “이딸리아 처자! 당신은 수준 이하 인간이구만! 체중 운운하는 게 국가 지도자에게 물을 질문이오?” “그럼 체중 이야기는 취소하고… 그 도토리 머리 스타일, 촌스럽게 보이는데 좀 바꾸지 않갔시오?” “종간나….”
팟! 화면의 불빛이 꺼졌다. 인터뷰가 갑자기 끝난 것이다. 줄리아나, P씨, Y감독 등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을 상기하는 듯 눈알을 멀뚱거렸다. O관장은 ‘올 것이 왔다’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송충이 눈썹’이 얼굴을 붉히며 고함쳤다. “도대체 이렇게 무례한 질문이 어디 있소? 당신은 우리 공화국을 모독한 죄로 극형에 처해질 것이오!” 후닥닥 소리가 나더니 검은 옷 정장 차림의 어깨 몇몇이 나타나서 소피아의 손에 수갑을 철컥 채웠다. “이 자식들이 뭐하는 짓이야?” 각종 무술로 단련된 이탈리아 청년 무기고가 이렇게 일갈(一喝)하며 몸을 붕 날려 수갑 열쇠를 쥔 ‘사각턱’의 턱을 발로 걷어찼다. 퍽! 불의의 공격을 당한 사각턱이 쓰러지자 무기고는 잽싸게 수갑 열쇠를 빼앗아 소피아의 수갑을 풀어주었다. 무기고가 이탈리아 특수부대에 있을 때 이런 훈련을 익힌 덕분이었다.
상대방 어깨들의 반격도 만만찮았다. 그들은 한꺼번에 무기고에게 달려들어 요절을 낼 듯 주먹을 휘둘렀다. P씨와 Y감독도 문약(文弱)하나마 무기고를 돕는답시고 어깨들에게 발길질을 퍼부었다. 좁은 공간에서 얽히다보니 주먹 가격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몸이 서로 엉켜 용만 쓰는 꼴이었다.
탕! 천지를 진동하는 총성이 울렸다. 일순 주위는 적요(寂寥)에 빠졌다. 모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무기고가 얼른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뜻밖에도 O관장이 권총을 들고 꼿꼿이 서 있는 게 아닌가. “모두들 손을 머리 위에 들고 바로 서!” 어깨들이 주춤거리며 일어서자 O관장은 그들에게 총을 겨누며 위협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팔을 뻗어 만세 자세를 취했다. O관장은 구국 소녀 잔다르크라도 되는 듯 입을 앙다물고 섰다.
‘송충이 눈썹’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조심스레 말했다. “안전하게 나가시도록 안내하겠습네다.” O관장은 그를 한참 노려보더니 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돈봉투처럼 보였다. 그에게 건네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수고했어요.”
일행은 마카오 숙소로 돌아와 커피숍에 모여 앉았다. 무기고와 소피아, P씨와 Y감독 등은 O관장의 방금 전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줄리아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P씨가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큰 소리로 물었다. O관장은 난처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 대단히 죄송합니다. 사실은….” O관장이 털어놓은 요 며칠 사이의 일은 다음과 같다.
B그룹 S회장은 아내 J여사와 함께 장인인 J회장을 부초미술관으로 찾아뵈었다. “아버님, 여기 무릉도원 같은 데 계시니까 방외(方外) 도인(道人) 같습니다.” “내가 속세 풍진(風塵)을 피해서 여기에 살러온 기(게) 아이라카이! 심신을 가다듬어 대사(大事)를 도모할라꼬!” “미술관 확장사업?” “자네 눈엔 내가 단순히 미술관 일에만 매달리는 것 겉이(같이) 보이나?” “그럼 무슨 대사를?” “한반도 펭하(평화) 구축, 청년실업 해결, 부정부패 척결….”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셈이네요.” “내 여생을 그렇게 불태워 볼라꼬!” “공권력에 반항하시는 거지요?” “반항이라니? 수케이루(스케일)가 더 커야제! 반란이야!” “반란! 삼족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합니다.” “지금이 조선시대는 아잉께 걱정 말게.” “반란군도 조직하시는지요?” “우리 구릅(그룹) 겡호헤사(경호회사) 임직원들이 반란군 정예부대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할배 겔사대(결사대) 전력도 만만찮아. 할 일 없어 빈둥거리는 영감탱이들한테 군복 입히고 계급장 달아준께네 죽기를 불사하고 싸우겠다는 거야!” “뜻은 좋으나 자칫 잘못하면 현행법 위반….” “자네 왜 그리 쪼잔한가? 민족 번영을 위한 거룩한 성전(聖殿)에 한 몸을 초개(草芥)매이로(처럼) 바치겄다는 기개가 와(왜) 없는가? 탈세범으로 콩밥 묵는 거보다 내란음모 수괴로 몰려 처단당하는 기(것이) 사나(사내)대장부 아잉가?” “아버님의 큰뜻을 미처 몰라 죄송합니다.” 사위인 S회장은 미간을 좁힌 진지한 표정의 J회장이 ‘돈 키호테’처럼 보여 쿡쿡 웃음이 나왔으나 억지로 참고 머리를 조아렸다.
S회장은 이탈리아에서 온 미술사학자 줄리아나 박사가 북한 지도자와 암호로 교신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당무계’ ‘혹세무민’ 이 두 단어가 떠올랐다. O관장이 보충설명을 했다. “저도 처음엔 믿지 않았답니다. 그러다 줄리아나에게서 쐐기문자 암호 소통법을 배워 제가 스위스 베른중학교 동창생 사이트에 들어가 교신도 해봤고요. 답신을 받긴 했는데 북한 지도자가 직접 작성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관장님, 자꾸 그런 황당한 스토리로 저희 아버님을 현혹하지 마세요!” S회장이 눈알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이자 J회장이 나섰다. “가만가만! 그라모(그러면) 소피아 아가씨가 북한 지도자하고 인타뷰한다 치고… 이거를(이것을) 연극처럼 우리가 맹글어보모 우떻겄노?” “아버님, 가짜 인터뷰를 진행하겠다고요?” “자네, 용어 선택에 신중을 기하게! ‘가짜’가 아니고 ‘모의 인타뷰’야!” “그런 연극이 왜 필요합니까?” “진짜로 벌어질 때를 대비해서 연습하는 거 앙이가?” “…….” “마카오 R호테루(호텔)에서… 진행 여산(예산)은 모도(모두) 내가 부담할낑게. 진행 총감독은 O간장(관장)이 맡고!”
S회장은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제는 O관장에게 아쉬운 부탁을 하는 처지가 됐다. “관장님, 모의 인터뷰에서 제가 북한 지도자 역을 맡으면 어떻겠습니까?” “연극에 출연한 적이 있으신지요?” “그런 경력은 없지만 제가 김정일 닮았다고 ‘똥자루’라는 별명까지 붙었답니다. 제 머리를 도토리처럼 깎아 북한 지도자처럼 분장하겠습니다.” O관장은 S회장의 둥글넓적한 얼굴과 짜리몽땅한 몸매를 유심히 살피고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잘 준비하세요.”
O관장은 줄리아나에게 마카오 R호텔로 오라는 쐐기문자 암호를 보냈다. 또 마카오 사정에 밝은 르네상스 회원에게 부탁해 ‘마북 작전’을 수행할 여러 배우들을 구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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