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영원한 가객’ 가수 고(故) 김광석의 음악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올해는 김광석의 20주기. 대중문화계에서는 콘서트와 전시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삶을 조명한다. 뮤지컬 업계에서도 이런 흐름을 놓칠 리 없다. 김광석의 주옥같은 명곡을 뮤지컬 넘버로 엮은 창작 주크박스 뮤지컬 ‘그날들’이 그의 20주기에 맞춰 다시 돌아왔다.
듣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는 김광석의 노래는 대부분 잔잔하고, 극적인 구성이 있는 곡은 많지 않은 편이다. 이 때문에 단시간에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하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에는 맞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제작진은 청와대 경호실을 소재로 삼음으로써 화려한 액션을 가미해 볼거리를 만들어냈다. 뮤지컬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 ‘형제는 용감했다’ 등 다양한 작품을 히트시키며 창작 뮤지컬의 저변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장유정의 연출을 통해 김광석의 ‘노래’는 어떻게 ‘이야기’가 되었을까.
작품은 청와대 경호실을 배경으로 20년 전 ‘그날’의 미스터리한 사건을 쫓는 현재의 이야기를 다룬다. 1992년, 청와대 경호원이 된 정학은 자신과는 다른 자유분방한 동기 무영을 만난다. 라이벌이자 친구로 우정을 쌓아가던 두 사람에게 한중 수교를 앞두고 신분을 알 수 없는 ‘그녀’를 경호하라는 임무가 내려진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사라졌다. 무영도 함께 말이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2012년, 경호부장이 된 정학에게 대통령의 딸과 수행 경호원이 함께 사라졌다는 긴급한 소식이 전해진다. 마치 20년 전 그날처럼.
2013년 초연 이후 지난해 재연까지 누적 관객 28만 명을 돌파하며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제7회 더뮤지컬어워즈 올해의 창작 뮤지컬상, 극본상 외에도 제19회 한국뮤지컬대상 베스트 창작 뮤지컬상, 연출상 등을 수상했다.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 정학 역에는 유준상, 오만석, 이건명, 민영기가, 정학의 경호원 동기이자 여유와 위트를 지닌 자유로운 영혼 무영 역에는 지창욱, 오종혁, 이홍기, 손승원이 캐스팅됐다.
주크박스 뮤지컬답게 작품 속 인물들은 김광석의 노래 가사로 감정을 표현한다. ‘부치지 않은 편지’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 ‘먼지가 되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 귀에 익숙한 노래들이 장소영 음악감독의 과감한 편곡과 만나 색다른 느낌을 준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사건이 쉴 새 없이 전개되다 보니 이야기가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는 건 아쉬운 부분이다. 주인공을 제외한 주변 인물들은 지나치게 전형적이고, 가사와 상황을 맞추려다 보니 다소 억지로 끼워 넣은 듯한 곡도 있다. 그럼에도 김광석의 노래를 다채로운 변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은 ‘그날들’만의 힘이다. 유명 가수들의 곡으로 빚어낸 수많은 창작 주크박스 뮤지컬의 대다수가 관객과 제대로 교감하지 못하고 흥행 실패의 쓴잔을 맛보는 가운데 이 작품이 승승장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산속에서 혼자 남은 무영이 그녀를 생각하며 부르는 ‘사랑했지만’을 듣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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