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화장품 브랜드 로레알은 자사 대표 모델로 1945년생인 영국 여배우 헬렌 미렌(Helen Mirren)을 선택했다. 백발을 멋지게 빗어 넘기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당당한 표정의 그녀를 일컬어 언론은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노인이라 칭하기도 했다.
패션 브랜드 셀린은 광고모델로 당시 81세이던 미국의 유명 작가인 조앤 디디온(Joan Didion)을 선택했고, 생 로랑은 72세의 캐나다 포크락 가수 조니 미첼(Joni Mitchell)을, 케이트 스페이드는 심지어 94세의 디자이너 아이리스 아펠(Iris Apfel)을 모델로 선택했다. 마크 제이콥스는 1949년생인 제시카 랭을, 코스메틱 브랜드 나스는 1946년생인 샬럿 램플링을 모델로 썼다.
이뿐 아니다. 2016년 5월호 보그 영국판 화보모델은 100세 할머니 보 길버트였다. 여전히 현역 모델로 활동하는 카르멘 델오레피스는 1931년생이다. 테슬라의 CEO 엘론 머스크의 어머니기도 한 메이 머스크도 1948년생이지만 여전히 현역 모델로 활동 중이다. 20대 못지않은 몸매를 유지하며 여전히 란제리나 수영복 모델로도 활동하는 야스미나 로시는 1955년생이다.
이들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을 듯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할머니의 이미지와는 크게 다르지만 모두 실재한다. 그것도 극소수의 특이 현상이 아니라 점점 보편화된다. 전 세계적으로 할머니 모델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건 노인의 소비 세력화와 관련 있다. 주요 선진국에선 전체 소비의 절반이 60대 이상에서 이뤄진다. 노령화가 소비 세력의 지형도를 바꾸고, 노인 모델의 약진도 이뤄낸 것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1927년생인 박양자 할머니는 모델 경력 10년 차다. 80에 모델에 데뷔한 셈이다. 그밖에 6070대 노인 모델 수십 명이 활동 중이다. 그들이 설 무대는 매년 늘어난다.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 1위가 한국이지만, 모든 노인이 다 빈곤한 건 아니다. 결국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가 생긴 노인들은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난다.
2015년 기준 신세계백화점의 60세 이상 고객 비율은 13.0%인데 2010년에는 11.3%였다. 현대백화점도 2010년 9.6%에서 2015년 12.8%로, 롯데백화점도 2010년 8.0%에서 2015년 10.4%로 늘었다. 노령화에 따라 노인인구가 계속 늘기에 고객 구성비에서 노인의 비중이 높아지는 건 당연하다. 심지어 주요 백화점마다 영패션 부문의 60대 이상 고객이 최근 5년 새 2배 이상 증가했다. 60대에서 2030 패션을 소화하는 이들이 계속 늘어나는 건 이제 나이와 패션을 관성적으로 연결 짓는 태도를 버리는 이가 늘었기 때문이다.
60대 이상 노인 10명 중 7명이 인터넷을 쓰고, 8명이 카카오톡을 쓰고, 4명이 페이스북을 한다. 모바일과 인터넷 이용에서도 급성장했다. 모바일에 능한 60대는 4050대와의 간극도 좁고, 심지어 2030대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60대 이상의 구매 신장률은 어느 연령대보다 높다. 자동차에 돈을 쓰는 연령대별 소비 증감률에서도 60대 이상이 가장 높다. 늘 쓰던 사람보다 안 쓰던 사람이 갑자기 쓰면 증감률이 크게 높아지는데 지금 60대 이상이 바로 그렇다. 그만큼 한국의 60대 이상도 소비 세력으로서 점차 가능성을 보이는 것이다.
지금 60대가 20대이던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당시 20대의 패션은 어땠을까? 1970년대는 분명 경제적으로 풍요와는 거리가 먼 시대였다. 그런데 유행하는 패션은 멋졌다. 1970년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패션 자료를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특히 여성들이 입은 미니스커트와 핫팬츠, 미니원피스가 정말 70년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과감하고 세련됐다. 요즘 20대가 입어도 손색없을 스타일을 40여 년 전 당시의 20대가 입었던 것이다. 당시 대학생들에게 미니스커트와 청바지는 가장 인기 있는 패션 아이템이었고, 그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와 히피문화, 미국 문화, 팝송 등으로 청년문화를 이뤘다.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번진 히피문화의 일환으로 한국의 20대도 청바지와 미니스커트, 장발 등을 스타일 코드로 받아들였다. 그랬던 그들이 결혼을 하고 자식 먹여 살리랴 내 집 마련하랴 자식과 가족을 위한 삶만 살게 되었던 것이다. 패션이고 멋이고 다 내려놓은 듯했던 그들이 지금 60대가 됐고 퇴직을 했으며 풍족한 시간을 얻게 됐다.
1950~60년대는 명동의 고급 양장점이 한국 패션을 주도했던 시기였고, 1970년대는 청바지와 미니스커트가 패션의 중심이 되고 패션이 산업화가 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결국 요즘 60대가 멋쟁이가 되는 게 이상할 게 전혀 없다. 이미 멋은 지금의 2030보다 더 먼저 부려본 멋 선배야말로 지금의 60대 이상인 것이다. 멋 좀 부리고 좀 놀아봤던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나이가 들었어도 예쁘고 멋진 것 좋아하는 눈은 그대로다. 그래서 멋쟁이로 거듭날 60대를 더 주목해야 한다. 이들이 60대이자 곧 70대의 문화도 바꿔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멋쟁이로 거듭난 뉴 식스티(New sixty), 이들은 패션뿐 아니라, 여행이나 취미, 새로운 학업이나 취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과거에 하지 못한 것들에 도전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이들의 사회적, 정치적 태도도 달라진다. 촛불집회 때 60대가 꽤 나오는 것을 보라. 새로운 6070 문화가 트렌드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이들이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지켜봐야 한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hitchhiking@gmail.com
*TREND Insight & Business Creativity를 연구하는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이며, 저서로는 <라이프트렌드 2016: 그들의 은밀한 취향> <라이프 트렌드 2015: 가면을 쓴 사람들> <라이프 트렌드 2014: 그녀의 작은 사치> <완벽한 싱글> <라이프 트렌드 2013: 좀 놀아본 오빠들의 귀환> <트렌드 히치하이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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