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과의 인연, 민간 차원에서 이어 가겠다”
일본정부 예산으로 위안부 지원해온 일본 시민단체의 마지막 행보
일본정부의 예산을 받아 한국인 위안부를 지원해온 NPO(비영리법인) 활동이 종결됐다. 이들의 마지막 일정은 3월 18일 ‘나눔의 집(사회복지법인·대한 불교조계종)’이었다. 18일 오후 3시 경기 광주 퇴촌면 가새골길. 나눔의 집은 곳곳에 태극기가 꽂힌 가새골길 끄트머리에 있다. 정문에 들어서자 위안부상과 생활관이 보였다. 우스키 케이코(69) CCSEA(Create Common Space in East Asia, Tomo) 비영리법인 대표 일행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이튿날인 19일, 서울 마포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지난 10년의 활동을 소개했다. 하지만 NHK 등 일본 언론에 기사화됐을 뿐,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만 이들의 활동은 연합뉴스의 ‘韓위안부 피해자지원 아시아여성기금 후속사업 올해로 종료’ 기사(2016년 10월 6일자)에 짤막하게 언급됐다. 기사는 ‘피해자 지원 사업의 경과’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올 3월, 日 시민단체 위안부 지원 사업 종료
‘일본 정부가 ‘아시아여성기금’ 후속사업으로 시행해오던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사업이 올해로 중단될 전망이라고 아사히신문이 6일 보도했다. 아사히는 일본 외무성이 작년 12월에 이뤄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이유로 내년도 예산안에 관련 사업 예산을 배정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한국 정부가 설립한 위안부 피해자 지원재단이 일본 정부의 출연금(10억엔, 약 107억 원)을 바탕으로 피해자 지원 사업을 실시하게 된 만큼 “유사한 사업”을 중복해 벌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게 외무성의 설명이다.’
우연히 우스키 일행의 마지막 일정을 알게 된 기자는 이들의 방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나눔의 집을 찾았다. 이날 만난 나눔의 집 김정숙 사무국장은 “여기에 할머니 열 분이 사시는데 그 중 세 분이 오래 전부터 일본 시민단체(우스키 씨 일행)와 알고 지내시는 걸로 안다”고 설명했다. 김 사무국장은 “할머니를 돕는 일본 시민단체 분들에 대해 나쁜 감정은 없다”면서도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지 않고, 이처럼 시민단체를 통해 소극적으로 행동해 애석하다”고 말했다.
우스키 케이코 씨는 CCSEA를 통해 그간 어떤 일을 해왔을까. 매거진 D는 3월 21일, 22일 우스키 씨와 함께 이 활동을 진행한 르포라이터 하라다 신이치 전(前) 아시아여성기금 관계자, 가츠야마 히로스케 사진작가, 김정임 아시아태평양전쟁희생자 한국유족회 전남본부 공동회장 등과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3월 20일 오전 출국한 일본인들은 일본에, 김 회장은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인터뷰를 종합해 보면 이들의 활동은 일본 정부가 진행한 ‘아시아여성기금(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후속사업이다. 일본 외무성은 기금을 비영리법인에 위탁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의약품을 제공하는 등 ‘아시아 분쟁 하에서의 여성 존엄 사업’을 실시했다. 각각의 비영리법인에 기금을 보조해 한국,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한 것이다. 4개국 위안부를 지원하는 1년 예산은 총 1억5000만 원 안팎이다.
하라다 신이치 씨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CCESA가 일본 외무성에서 받은 한국 위안부 지원금(위안부 피해자 지원 실비)은 2008년 610만 엔, 2009년 480만 엔, 2010년 700만 엔, 2011년 670만 엔, 2012년 820만 엔, 2013년 1230만 엔, 2014년 1200만 엔, 2015년 1120만 엔이다. 1세대 위안부 저널리스트 출신
CCSEA 활동은 ‘돌봄’이란 단어로 요약된다. 우스키 일행은 1년에 4, 5차례 30여 명의 위안부 할머니를 만나며 용돈, 약값(초기 10만 원, 후기 20만 원)과 선물(약, 과자 등)을 건넸다. 할머니 20여 명이 사망해 근래는 10여 명을 만났다. 이들은 할머니들과 안면도, 제주도로 1박2일, 2박3일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평소에는 할머니에게 안부 전화를 했으며, 할머니가 사망한 경우 장례식에 참석해 화환이나 부의금(20만 원)으로 성의를 표했다.
이 활동을 이끌어온 우스키 씨는 1984년 배옥수 위안부 피해자를 인터뷰해 일본 언론에 소개한 1세대 위안부 저널리스트다. 한국 언론에는 신동아 1992년 3월호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당시 우스키 씨는 ‘실록·비극의 위안부 정신대’ 기사에 일본인 위안소 경영자, 일본인 해군 견습사관의 인터뷰를 실었다. 신동아는 기사 전문을 통해 우스키 씨를 ‘일본의 시사지와 방송사의 프리랜서로 일하며 한국 전쟁피해자들의 진상을 일본에 알리고 소송문제를 돕는 민간단체 ‘일본의 전후책임을 확실히 하는 회’ 대표’로 설명했다.
“1990년 한국 전쟁피해자들을 취재하면서 이들의 생사 확인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시민단체 ‘일본의 전후책임을 확실히 하는 회’를 만들었다. 시민에게 모금해 한국 유족들의 재판비용과 일본 체류 비용을 마련했다. 지원활동은 재판이 시작된 1992년부터 재판이 끝난 2004년까지 이어졌다. 이때 재판을 준비하며 위안부 할머니들의 실상을 알게 됐다. 1996년 2월경 토토리현 지방공무원 노조에게 500만 엔(5000만 원)을 지원받아 한국 유족회와 함께 서울 용산에 위안부 피해자 케어 센터를 만들었다. 이곳에 할머니들이 찾아오셨지만 일본 정부지원금으로 운영된다는 오해를 받았다. 이곳은 운영비, 내부 갈등을 이유로 1년도 채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그가 한국 단체들과의 관계가 틀어진 건 아시아여성기금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담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강제 연행을 인정하고 사죄한 뒤 1995년 아시아여성기금을 조성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기금과 총리 명의의 사과 편지를 전달했다. 우스키 씨는 ‘전쟁에 책임을 느끼는 국민과 정부 모두 기금을 내는 이 방식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 단체들은 생각이 달랐다.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일본의 보상금 지급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우스키 씨를 남편처럼 기다리는 위안부 할머니
한국단체와 견해 차이를 보인 우스키 씨는 1997년부터 2년간 한국 입국이 금지됐다(관련 이야기는 연합뉴스 1997년 7월 24일자 ‘정부, 위안부 일시금지급 관계자 입국금지’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스키 씨는 “나는 아시아여성기금 운영자들에게 피해 당사자들의 의견을 들으라고 조언했을 뿐 할머니들에게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으라고 설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인 위안부 61명이 각각 받은 500만 엔에는 국민모금 200만 엔과 일본정부 예산 300만 엔이 포함돼 있다”면서 “이 기금을 받은 할머니들은 어느 정도 일본 정부의 마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한국에서 기금 수령 거부 운동이 이어지면서 2007년 3월 종결됐다. 우스키 씨는 2007년 4월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기 위한 단체 CCSEA를 만들었다(2009년부터 이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우스키 씨는 1990년대부터 알고 지낸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은 아파트, 주택에서 홀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유족회 활동에 대한 지원을 받으려 우스키 씨와 협력 관계를 이어왔다”는 김정임 회장은 “엊그제 만난 할머니는 우스키를 남편 기다리듯 기다린다면서 우리를 무척 반겼다”고 전했다. 우스키 씨는 “할머니의 관계를 평생 이어가겠다”고 말한다.
“일본 정부가 우리 단체를 통해 작은 돈이라도 할머니들을 위해 비용을 써왔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크게 뭔가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어떻게든 그 행동을 지속했다는 것도 의미 있지 않나. 지금까지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을 이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민간 차원에서 할머니들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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