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빠르게 변화한다.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유행어의 유통기한은 한 달이 채 못 될 정도이고, 어제의 유머가 오늘은 구식이 되어버리는 곳이니까. 변화는 너무 빠른 속도로 문화와 산업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펼쳐진다. 혼밥, 혼술, 젠더 문제, 다양한 포비아, 정치적 충격 등 요즘 유행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제대로 답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트렌드를 분석하는 와중에 트렌드가 바뀐다. 그렇다고 다이내믹한 변화를 불평할 수도 없다. 그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의 하소연처럼 취급된다. 모든 분야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키워드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시대에 콘텐츠 제작자들의 관점에서 하는 작은 변론이다.
얼마 전 tvN 코미디 프로그램 ‘SNL 코리아’의 코미디언이 방송 중 성추행과 관련해 자진 하차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채 안되어서 같은 프로그램의 다른 코미디언이 암 환우를 희화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방송 제작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깊은 요즘 시청자들은 연기자를 질타하기 보다는 해당 각본을 쓰고, 제작한 제작진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제작진의 부족한 검토와 취재가 사건을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비난의 방향에는 조직의 약자를 무고한 피해자로 만들지 말아야한다는 무언의 약속도 깃들어 있다.
다른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은 있었다. 성차별적인 발언을 앞세운 코미디 코너들은 이미 뭇매를 맞았고, 그와 비슷한 콘셉트의 코너들도 자취를 감췄다. 기존에 콘텐츠를 제작하던 제작진은 이러한 변화를 쫓는 것이 힘들기도 할 것이다. 방송의 선정성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수준에서만 다루어져야 하는데, 그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20, 30대의 연애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였다. 하지만 요즘은 다루기 까다로운 소재가 됐다. 어느 한 쪽의 입장만을 강조할 수도 없고, 양쪽의 입장을 강조하는 것도 어렵다. 남녀의 연애에는 성차별로 해석할 수 있는 요소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이걸 정면 돌파하기보다는 시도를 안 하는 것이 제작진 처지에서는 안정적인 선택일 것이다. 젠더 문제, 사회계층 문제, 정치적 문제 등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주제는 피하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방송에서 성, 외모, 인종 등 선택할 수 없는 타고난 것들을 향한 희화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시청자, 그러니까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기 때문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못생긴 여자와 키 작은 남자, 뚱뚱한 사람을 희화하는 코미디는 인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우리는 죄책감을 갖는다. 타인이 약점을 지적당할 때, 또 차별을 당하고 그것을 방관할 때 불편함을 느낀다. 그것이 부도덕한 행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 스스로도 자신이 사회적 약자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내가 사회적 약자라고 말을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느낄 때는 종종 있다.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반찬을 더 달라고 하면 민폐는 아닐까? 혼자 4인용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면 식당 주인이 싫어하지 않을까? 혼자 극장에 가거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할 때도 일행이 없다는 이유로 주변을 의식하게 될 때가 있다. 혼자인 것이 주는 자유로움을 느끼며 동시에 주변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내 외모나 차림새 등을 더 의식하게 된다. 약자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같은 맥락에서 외모, 체형, 성별, 나이도 약자로 느낄 수 있는 여지는 다분하다.
유머의 종류에는 상대를 희화하는 방식이 있다. 타인의 다른 점을 지적하는 것이 그렇다. 뚱뚱한 사람의 행동을 희화하며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뚱뚱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동안 다른 집단을 향해 화살을 날릴 때 죄책감을 갖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과체중이 될 줄 몰랐으니까. 성숙하지 못했다.
이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해보면 ‘내가 속한 집단이라는 게 정말 존재할까?’라는 의문도 든다. 학교, 학교 내 그룹, 또는 회사, 사는 지역, 브랜드 아파트 등이 있지만, 그것이 더 이상 내게 소속감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한때는 소속 집단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집단이 주는 결속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끈끈한 연대감을 불태우던 학과 동기들은 연락처도 남아있지 않고, 힘들게 들어간 대기업은 얼마나 다닐지 알 수 없다. 직장이 주는 것은 안정이 아니라 불안이다. 내 소속은 지금은 분명하지만 내년에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분명한 소속감을 주는 것은 친구한테 글 좀 남기라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알림일 뿐이다. 하지만 그곳 역시도 끈끈한 연대감을 주진 않는다. 프로필 사진만 본 사람이 얼마나 내 편이 되어주겠나. 그러니 나 역시 외롭고 쓸쓸한 사회적 약자가 아닌가.
사회적 약자가 만연한 시대가 오니 독한 예능은 사라졌다. 현실이 지독한데, TV에서도 독한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다. 예능은 순해졌다. 시골에서 소담소담 떠들며 요리를 하거나 외국인들이 나와서 한국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그것이 웃기지는 않다. 재미는 있어도 웃음이 나오지는 않는다. 정 웃고 싶다면 인터넷을 하면 된다. 자극적인 유머, 불쾌한 유머 모두 있다. 남을 비하하며 웃고 싶다면 그런 유머가 통용되는 성격의 커뮤니티에 들어가면 된다. 그 곳의 유머 패러다임은 정말 빠르고 웃긴다. TV가 쫓기 어려울 정도다.
과거 코미디 프로그램의 기능을 온라인 커뮤니티가 대체했으니, 굳이 그 역할을 다시 뺏어올 필요는 없다고 본다. 듣는 이가 불편한 말은 결코 유머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시청자가 불쾌해하는 코미디는 당연히 실패한 코미디다. 실패한 코미디는 재생산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극을 피하고 싶은 순간 TV를 켜고,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그러니 눈치 빠른 제작진이라면 활시위를 다른 방향으로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성과 외모를 희화하는 것 말고도 웃길 건 많다.
조진혁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에디터 radioplayer@naver.com
*사춘기 이전부터 대중문화에 심취했다. 어른이 되면 고급문화에 심취할 줄 알았는데, 더 자극적인 대중문화만 찾게 되더라. 현재는 인터넷 문화와 B급 문화뽕까지 두루 맞은 상태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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