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동은 요즘 뜨거운 동네다. 주변이 빌딩숲으로 둘러싸인 도심 속 작은 섬 같은 동네다. 1920년 조성된 한옥 동네가 2004년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었지만,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결국 재개발이 되지 못했다. 전화위복인지, 덕분에 우린 익선동 한옥마을 좁은 골목길의 사랑스러운 풍경을 지금도 누릴 수 있다. 익선동 한옥골목에는 멋지고 재미있는 카페나 식당이 많이 늘었다. ‘경양식 1920’에서 돈가스를 먹고, ‘식물’에서 몽환적 리듬의 음악에 빠져 있다가, ‘거북이슈퍼’에서 연탄불에 구운 먹태와 함께 가맥을 한잔 한 후, ‘열두 달’에서 파스타와 라따뚜이를 먹어도 좋다. 이러고도 아쉬우면 ‘푸르스트’에서 홍차 한 잔 하며 여운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너무도 매력적인 익선동의 카페와 식당은 전화 예약이 안 된다. 예약 자체를 받지 않고 먼저 오는 사람 순서대로 앉는다. 이 동네에는 예약 문화가 없다. 대신 카페나 식당 앞에 태블릿PC가 하나씩 있다. ‘순번이’ 앱을 쓸 수 있는 태블릿PC다. 여기에 직접 대기자 접수를 하는 것이다. 자기 순서가 되면 휴대전화에 깔아둔 순번이 앱에서 카톡 알림이 온다. 재미있는 방식이지만 예약이 안 되는 것은 확실히 불편하다.
요즘 예약을 받지 않는 레스토랑이 늘고 있다. 최근에 오픈한 곳이거나, 젊은 창업자일 경우에 이런 선택을 많이 한다. 예약이라는 편리한 제도가 없는 건 노쇼(No-Show)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전후를 비롯해 연말연시는 데이트하는 커플도 많고, 각종 모임도 가장 많은 시기다. 이 때문에 식당을 예약하는 이들도, 노쇼족도 가장 많다. 국내 레스토랑의 노쇼 비율은 20% 정도라고 하는데, 심한 곳은 50%가 넘기도 한단다. 노쇼 손님 때문에 화가 나서 식당을 접고 싶다는 말하는 이도 많고, 실제로 그런 곳도 있다. 아예 예약 자체를 받지 않겠다며 정책을 바꾸는 곳도 있다.
예약 문화는 소비자의 줄서지 않을 특권이다. 약속의 대가로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셈인데,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노쇼족 때문에 줄서지 않을 특권도 사라지는 셈이다. 노쇼는 두 가지가 문제다. 하나는 노쇼 때문에 매장 측이 직접적 손실을 본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누군가가 매장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노쇼를 작정한 고약한 심보를 가진 이도 있다. 동시에 여러 군데 예약을 잡아놓고 그중 하나를 가는 것이다. 이건 어쩌다보니 예약을 지키지 못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자신의 시간이 중요하다면 상대의 시간과 기회도 중요한줄 알아야 한다.
입장을 바꿔보면 어떨까. 식당을 예약하고 갔는데 그 식당이 예약관리를 제대로 안 해서 예약이 잡혀 있지 않았다면 어떨까. 밥 먹으러 가족 데리고, 혹은 업무상 식사 하러 갔다가 낭패를 겪는 셈이다. 바쁜 시간 쪼개서 병원 예약 시간 맞춰 갔더니 예약이 안 돼서 다음에 다시 오라고 한다면 어떨까. 휴가 때 국제선 항공편을 예약했는데, 출발 당일 공항에 갔더니 예약이 안 되어 있어서 여행을 떠나지 못하게 되었다면 어떨까. 아마도 길길이 날뛰며 항의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권리 요구는 일방적인 걸까? 노쇼에 따른 위약금이 없다면 피해는 한쪽만 보게 된다. 약속을 소홀히 한 사람의 무책임 때문에 입은 손실은 누가 보상하겠는가? 노쇼는 이른바 소비자의 갑질이다.
미국이나 유럽 등 소위 선진국에 여행을 가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을 비롯해 꽤 괜찮은 식당을 예약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예약금을 결제하라는 말을 듣는다. 꽤 오래전부터 그랬는데, 처음엔 장사 잘 되는 식당들만 그런가 했더니, 작은 레스토랑에서도 예약금을 받는 게 보편적이었다. 식당 예약 애플리케이션에서 바로 카드로 결제하고 예약을 하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노쇼는 그들에게도 문제였었고, 약속에 대한 비용을 부과하는 걸 통해 이를 해결한 셈이다. 선진국에서도 레스토랑의 노쇼가 10% 정도는 된다고 한다.
노쇼 자체가 사라지는 게 불가하다면 적어도 노쇼를 줄이거나, 노쇼로 입은 손실을 만회할 방법을 찾는 게 합리적이다. 항공사들도 10여 년 전엔 예약부도율이 20%에 이르기도 했는데, 신용카드 선결제를 통한 위약금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예약부도율이 크게 줄어 지금은 4~5% 선이 됐다. 올해 5월부터 국내 주요 항공사들은 국제선 노쇼 수수료 10만 원, 국내선은 8000원~1만 원을 부과한다. 그나마 항공이나 철도 등은 예약 취소에 따른 위약금을 부과할 수 있어서 노쇼가 꽤 줄었다. 결국 사람을 믿는 것보단 돈을 믿는 게 더 효과적인 셈이다. 좀 씁쓸하다. 역시 신뢰는 멀고 돈은 가깝나 보다.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hitchhiking@gmail.com
*TREND Insight & Business Creativity를 연구하는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이며, 저서로는 <라이프트렌드 2016: 그들의 은밀한 취향> <라이프 트렌드 2015: 가면을 쓴 사람들> <라이프 트렌드 2014: 그녀의 작은 사치> <완벽한 싱글> <라이프 트렌드 2013: 좀 놀아본 오빠들의 귀환> <트렌드 히치하이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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