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 Opinion] 메릴 스트립과 유재석의 공통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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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년 1월 11일 15시 43분


박세회의 Outsight/Infight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 수상 후 소신 발언으로 화제가 된 유재석. / 동아일보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 수상 후 소신 발언으로 화제가 된 유재석. / 동아일보
지난 9일 영화배우 메릴 스트립이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했던 수상소감은 다른 사람들과 좀 많이 달랐다. 감사함이 아니라 분노가 눈에 보였다. 스트립은 이렇게 말했다. “올해 절 깜짝 놀라게 한 연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 연기는 제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좋아서가 아니었죠. 좋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노린 바를 효과적으로 이뤄냈어요." 그녀가 분노하며 끄집어 든 건 바로 도널드 트럼프가 장애인 기자를 비하했던 사건이다.

이 사태의 참담함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조금 멀리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2001년 9·11 사태가 있은 직후 당시 워싱턴포스트에 있던 세르지 코발레스키 기자는 ‘13명의 사람이 뉴저지 북동부에서 강 건너(세계무역센터가 있는 맨해튼)에 벌어진 참사를 구경하며 이를 축하하고 파티를 벌인 혐의로 구금 조사받았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경선에서 이 기사를 언급하며 ‘뉴저지에서 9·11 사태가 터졌을 때 수천의 무슬림들이 환호하는 걸 봤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 어이없는 과장과 왜곡에 해당 기사를 쓴 코발레스키가 바로 답변을 내놨다. 지금은 뉴욕타임스에서 근무 중인 코발레스키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수천은커녕 수백 명이 있었다고 말한 사람도 없다’며 자신의 기사를 부풀린 트럼프를 비판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도널드 트럼프는 곧바로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 집회 연단에 서서는 코발레스키를 가리켜 “자기가 한 말도 기억 못 하는 불쌍한 사람이죠. 이 사람이 어떤지를 봐야 해요”라며 팔목을 꺾어 혀를 꼬고는 “제가 무슨 말 했는지 모르겠거든요. 전 기억 안 나요”라며 이상한 몸짓을 취했다. 코발레스키는 손목의 관절이 꺾인 상태로 굳어버린 ‘선천성 관절만곡증’을 앓는다. TV 카메라 앞에서 말이다. 관중은 트럼프의 머저리 같은 연기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코발레스키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메릴 스트립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기자는 대다수 트럼프 지지자의 마음에 불쌍한 거짓말쟁이로 기억됐을 것이다.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처럼)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 강한 사람이 굴욕감을 주려는 본능을 드러내면, 그건 모든 사람의 삶에 스며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도 된다는 허가를 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발언을 들으며 중학교 시절 반에서 일어났던 난장판이 생각났다. 우리 반엔 깡패 같은 애가 하나 있었는데, 시험 때 답안지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옆자리에 있던 애를 두들겨 팼다. 힘이 약한 우리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을 때, 농구부였던 한 친구가 나섰다. 평상시에 조용히 운동만 하던 이 친구는 때리는 애를 번쩍 들고는 교실 밖으로 들고 나가서 던져버렸다. 남자가 멋지다고 생각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결국, 같은 구도다. 트럼프가 공적인 자리에서 뉴욕타임스의 기자를 두들겨 패고 있다면 누가 나서서 말려야 하나. 대통령 당선인과 일개 기자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누가 바로 잡아줘야 하나. 트럼프만큼, 혹은 그에 준할 만큼 ‘공적이고 강한 사람’이 아닐까. 이 권력의 구도에서 “연예인은 빠져 있으라”고 주장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연예인은 정치인도 아니고 공직자도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게 ‘공적인 자리에 있는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메릴 스트립 같은 사람, 도널드 트럼프에게 “주먹으로 한 방 먹여주고 싶다”고 말했던 로버트 드니로 같은 사람, “공룡들로 가득 찬 우주선이 레드카펫에 떨어질 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톰 행크스 같은 사람 말이다.

최근 연예인의 이런 강함과 공연성을 가장 잘 보여 준 사례는 유재석 씨다. 유씨는 지난달 가장 정권과 밀접하다는 MBC의 방송연예대상에서 연예 대상을 품에 안고는 “나라가 힘이 있을 때 나라를 구하는 것은 국민이고,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고 말했다가 특정 커뮤니티에서 좌빨 연예인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박사모에 “잘됐다. 이참에 확실하게 좌빨 연예인이 누군지 알게 됐으니 유재석이 광고 출연하는 제품 불매운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는 글들이 올라오며 공격을 받았다.

유재석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소셜테이너 금지 규정’으로 도마 위에 올랐던 MBC는 화가 단단히 나서 고정 출연을 다 잘랐을 것이고 광고주들은 모델을 교체했을 것이다. 그러나 MBC의 간판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얼굴인 유재석은 달랐다. ‘박사모가 유재석의 수상 소감을 비판했다’는 기사가 몇몇 매체에 나가고 나자 오히려 박사모가 집중포화를 맞았다. 심지어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박사모에는 ‘유재석을 건드린 건 실수’라는 글들이 속속 올라왔다. MBC도 광고주들도 별 반응이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별 반응이 있어도 뭐 어쩔 것인가.

우리나라에선 그동안 연예인이 정치적 발언을 하면 방송사에서 고정 출연을 제한하고, 광고주들이 압력을 넣고, 미디어가 ‘소셜테이너’ ‘폴리테이너’라는 딱지를 붙여 분류해 폐기 처분하는 시스템이 정말 잘 돌아갔다. 사실 이 시스템을 견뎌낼 강함을 가진 연예인은 별로 없었다. 생업을 두고 누군가의 부작위를 질책할 순 없다. 남이 맞는 걸 보고만 있었던 이유는 그도 그저 맞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다만 최근에는 최순실 씨와 박근혜 대통령의 도움으로 이 시스템 자체가 붕괴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인다. 문체부의 블랙리스트가 드러났고, 공영방송 막내 기자들이 윗선에서의 보도 왜곡을 고발하고 일어섰다. 맞고 있는 사람과 때리는 사람이 분명한 상황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벌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반할 준비가 돼 있다. 멋지게 나서서 싸워 줄 운동부 친구에게 말이다.

박세회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뉴스 에디터 rapidmove81@hotmail.com
*연예, 음악, 영화, 섹스의 영역에서 정치와 사회적 이슈를 읽는 데 관심 많은 그냥 사람. 가장 좋아하는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생일이 같은 선택 받은 팬이자, 가장 좋아하는 밴드 틴에이지 팬클럽의 한국 수행을 맡았던 성공한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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