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에서 회사 얘기, 일 얘기 자꾸 꺼내는 사람은 눈치를 받는다. 눈치가 문제가 아니다. 그건 술자리 분위기를 망치는 주범이다. 원래 회사 얘기는 회사에서 근무시간에만 하는 거다. 술집에서는 즐겁고 유쾌한 얘기만 하는 게 매너다. 그런데 과거보다 요즘 퇴근 이후에도 일 얘기하고, 업무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심지어 술자리에서 카카오톡이나 이메일로 업무 이야기를 계속 주고받는 이도 있다. 물론 그들이 하고 싶어서 그러겠나. 상사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겠지. 초연결사회가 낳은 참 슬픈 일이다.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는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 등의 진화로 사람과 사물 등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회를 말한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다. 아침에 눈뜨면 제일 먼저 스마트폰을 잡는 것으로 시작해 밤에 잠잘 때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것으로 하루가 끝난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 인터넷과 연결되지 않은 시대에는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연결이 곧 우리의 존재 이유처럼 되어버렸다. 사물인터넷이니 인공지능 음성비서니 자율주행 자동차니 미래 유망하다는 비즈니스도 모두 초연결사회의 산물이다. 즉 우린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동안 소통, 연결은 만능 키워드처럼 쓰였다. 실제로 연결은 우리에게 굉장히 많은 편리함을 안겨줬다. 언제 어디서나 일도 하고, 은행 업무도 보고, 가스불은 껐는지 확인하고, 집에 강아지가 혼자 잘 놀고 있는지도 지켜볼 수 있다. 이런 놀라운 연결의 편리함은 반대로 스트레스도 안겨준다. 사생활에 간섭하기도 너무 쉬워졌고, 휴가를 가건 퇴근을 하건 상대가 언제 어디에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상관없이 업무지시를 한다. 그래서 꾸준히 논의된 것이 ‘연결되지 않을 권리’였다.
이제 프랑스에서는 업무시간 이후에 업무 메일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말 그대로 퇴근 시간 이후에는 회사와 상사로부터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13년 독일 노동부는 업무시간 이후엔 비상시가 아니면 상사가 직원에게 전화나 이메일로 연락하지 못하도록 하는 지침을 발표한 바 있다. 다임러벤츠그룹의 경우 휴가 중인 사람의 메일 수신을 자동 응답하고, 제거하는 시스템을 운영한다. 휴가 중인 사람에게 보낸 메일을 분석했더니, 업무상 정말 중요한 메일은 20% 정도이며, 이것들도 상사나 다른 동료들이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휴가 간 사람에게는 업무 메일이 안 가도록 하는 걸 조직 내 제도로 만든 것이다.
여러 정부와 다수의 기업이 이런 법적 제도나 지침을 만들어내는 건 결국 자발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독일이나 프랑스는 우리나라보다 노동환경이 훨씬 좋다. 굳이 법제도를 만들지 않아도 기업들이 나서서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해주기도 한다. 그런 나라에서 더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려고 법과 제도까지 바꾸는데, 상대적으로 열악한 노동환경인 우리나라로선 더 시급히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린 가뜩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동시간 선두를 다툴 정도로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하는 데다, 나이 서열화와 직급 서열화 등 수직적 위계구조가 조직문화에 팽배하기 때문에 퇴근 후 업무지시도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가장 고약한 게 금요일 퇴근 후 카톡으로 월요일까지 뭘 해놓으라는 업무지시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전체 근로자의 86.1%가 퇴근 후에도 스마트폰 등으로 업무를 본다고 했다. 업무시간 외에 업무 목적으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컴퓨터를 이용하는 시간이 평일에는 하루 평균 1.44시간, 주말에는 하루 평균 1.60시간이었다. 1주일로 환산하면 10시간이 넘고, 연간으로 계산하면 무려 540시간이나 된다. 이러니 한국의 직장인이 유독 번아웃 증후군이 심할 수밖에 없다.
이건 직장인만 손해가 아니라 기업에도 손해다. 더 이상 밥 먹듯 하는 야근이 득이 되는 비즈니스 환경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이니 IT가 모든 산업을 다 바꾸는 뉴 노멀 시대라느니 하는 이런 판국에 우린 너무 시간의 물리적 양만을 중시한다. 요즘 한국 경제의 위기를 얘기하면서 가장 많이 제기되는 건 차세대 산업에 대한 대비가 늦다는 것과 한국 특유의 조직문화가 뉴 노멀 시대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은 노동자뿐 아니라 기업 입장에서도 필요하다. 단순히 긴 노동시간이 아니라 생산성과 효율성이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분명 세상은 바뀌었다. 산업적 변화도 거세다. 우리 경제와 기업들은 큰 위기를 맞았다. 이 위기는 허리띠를 졸라맨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월화수목금금금 야근한다고 극복될 것도 아니다. 이젠 일하는 방법이 바뀌었다. 길게 일한다고 더 좋은 답을 찾아내는 시대는 끝났다. ‘연결되지 않을 권리’의 내용이 포함된 근로기준법 일부개정법률안은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물론 법이 없어도 알아서 잘하면 되겠지만, 있는 법도 잘 안 지키는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할 거란 건 말도 안 된다. 그래서 법과 제도가 필요한 거다. 트렌드는 사람들 욕망의 흐름이기도 하지만, 정책이나 법이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기도 한다. 퇴근 후에는 제발 일은 좀 잊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려보면 좋지 않겠나?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hitchhiking@gmail.com
*TREND Insight & Business Creativity를 연구하는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이며, 저서로는 <라이프트렌드 2016: 그들의 은밀한 취향> <라이프 트렌드 2015: 가면을 쓴 사람들> <라이프 트렌드 2014: 그녀의 작은 사치> <완벽한 싱글> <라이프 트렌드 2013: 좀 놀아본 오빠들의 귀환> <트렌드 히치하이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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