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이 동성애와 양성애 그리고 트랜스젠더, 소위 ‘LGBT 이슈’로 한국사회의 정치 프레임을 뒤흔들 것이다. 허투루 꺼내는 말이 아니다.
일단 몇 가지 팩트를 체크해보자. 국내 언론에는 보도가 잘 안 됐지만, 지난해 12월 UN 안보리 15개국이 모여 반기문 총장의 퇴임을 기리는 자리에서 재미있는 해프닝이 있었다. 당시 안보리는 반 총장에게 “총장님, 지난 임기 동안 여성, 청소년 그리고 LGBT 커뮤니티가 목소리를 내고,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한 데 대해, 그 덕에 지금 이 UN의 본부 내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강해지게 된 데 대해 당신께 감사합니다”라는 성명문을 읽어 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안보리 상임 이사국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동성애를 탄압 중인 러시아의 반대로 최종 원고에서 ‘LGBT 커뮤니티’라는 단어가 빠지고 ‘가장 취약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이들’로 바뀌었다. 이런 뉴스를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조금 놀랐을 수도 있겠다.
우린 잘 모르지만, 사실 반 전 사무총장은 거의 그의 임기 내내 성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헌신해온 사람이다. 그는 2014년 동성결혼을 한 UN의 모든 직원에게 결혼과 동일한 혜택을 주겠다고 밝혔고, 2010년부터 최소 9번 이상(UN 자료 참조)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공개 연설을 한 바 있으며, LGBT의 인권을 두고 러시아와 정면으로 맞선 유일한 사무총장이고, 미국의 동성애 인권단체 ‘하비 밀크 재단’으로부터 성소수자 권리를 위해 애쓴 공로로 하비 밀크 메달을 받은 첫 한국인이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메달 수여식에서 그는 재임 기간에 벌인 차별금지 캠페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캠페인을 이끄는 확고한 챔피언이며, 당신들도 챔피언이 되도록 초대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챔피언은 적어도 ‘옹호자’ 또는 ‘투사’의 의미다.
물론 그를 챔피언으로 인정하지 않는 시선도 있다. 2016년 12월 최측근인 임덕규 전 국회의원은 TV조선에 출연해 “(반 총장의 입장은) UN 입장에선 만민이 평등하다 그런 개념이지 동성애를 지지하고 찬양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라는 말을 흘렸다. 이걸 두고 TV조선은 “귀국을 앞두고 불필요한 논란을 미리 해소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하고 어떤 언론은 “한국으로 입국하는 순간 대권행보의 걸림돌이 되는 성소수자 인권은 쉽게 내버릴 수 있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다 쓸데없다. 반 전 총장이 성소수자 권익을 위한 ‘확고한 챔피언’이여서가 아니다. 그가 생각을 완전히 바꾸더라도 성소수자 이슈가 견고한 암묵의 수면 위로 치솟아 오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둘러싼 한국 정치의 지형을 보면 이렇다. 한국에서 적어도 ‘대권에 도전하는’ 정치인들에겐 빌 클린턴 정부 시절의 ‘묻지도 말하지도 마세요’(Don't ask don't tell) 규정이 철저하게 적용된다. 1993년 클린턴 대통령이 제정한 이 정책은 군대 내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밝히거나 타인이 묻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골자.
잘 살펴보면 한국의 정치에서 동성애 이슈는 ‘서로 물어서도 말해서도 안 되는 금기 사항’이다. 정치를 표를 얻는 셈법으로 계산했을 때 살짝 엮이기만 해도 손해뿐인 게 성소수자 이슈이기 때문. 예를 들어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4년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만들겠다고 했다가 180명의 전문가가 ‘성소수자 차별 금지조항’을 넣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일부 열성 기독교도들에게 수많은 전화가 걸려와 ‘동성애 옹호하냐’며 화를 냈고, 성소수자 연대는 시청 앞에서 ‘성소수자 차별 금지조항을 명시하라’고 시위를 벌였다.
결국, 박 시장은 결국 아예 헌장을 폐기하고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 조찬간담회에 가서는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며 항복을 선언했으며, 성소수자 단체 관계자들을 만나서는 “심려를 끼쳐 드린 점에 대해” 사과했다. 한국의 정치인에게 이들의 인권을 옹호한다는 건 기독교 표가 걸린 아주 위험한 유황불이며 그저 ‘리스크’일 뿐이다.
그래서 다들 무척이나 말을 아낀다. 예를 들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발언은 마크 리퍼트 미국 대사가 성소수자 축제인 2015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데 대해 “퀴어 축제에 참석했다는 기사를 봤다. 한국 사랑에 감사드린다”고 한 말이다. 그는 당시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아직 우리는 그런 축제에 익숙하지 못하다. 반대자들도 많고 정치인은 이에 대한 비난도 두렵다”라고. ‘두렵다’. 아마 그게 가장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다른 후보들도 마찬가지. 이재명 성남시장,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유승민 의원을 포함해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그 누구도 ‘동성애’나 ‘퀴어’ 또는 ‘성소수자’에 대한 견해를 공식 자리에서 언급한 적이 없다. 유일하게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한 온라인 방송에서 동성애에 대해 “종교나 이념이나 국가 그 어떠한 논리로도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정체성과 그들의 개성에 대해서 재단을 하거나 뭐라 할 권리가 없다”고 밝힌 바 있으나,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국 정치에서 성소수자들은 철저히 비가시적이었다.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내가 태어난 이후 선출된 어떤 대통령도 동성애나 양성애, 트랜스젠더에 대한 정책이나 견해를 밝히기는커녕 그 단어들을 언급한 적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성소수자 인권을 옹호하는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충분히 짐작은 가지만, 들은 바는 전혀 없다.
그런데, UN에서 성소수자와 관련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반 전 총장을 대선 후보로 모셔오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단언컨대, 반 전 사무총장이 들어오면 이 판도는 싹 다 바뀔 것이다. 언론은 최선을 다해 반 전 총장에게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을 것이고, 그가 말을 바꾸면 바꾸는 대로, 말을 바꾸지 않으면 바꾸지 않는 대로 경쟁자들이 달려들어 물고 뜯을 것이다.
대선후보 TV 토론에서는 누가 나오든 ‘성소수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올 것이고, 그 대답 여하에 따라 그 후보의 사무실엔 몇몇 종교단체로부터 ‘동성애를 부인하라’는 협박 전화가 새벽이 오기도 전에 몇 천 통씩 걸려올지 모른다. 성소수자는 물론 그들과 연대하고 지지하는 이들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끝도 없는 검증의 글을 써낼 것이고, 언론들은 ‘트렌스젠더란 무엇인가’, ‘바이섹슈얼은 존재하는가’라는 기사를 발행할 것이다. 그렇게, 이번 대선은 아마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활기차고 즐거운 레이스가 될 것이다.
박세회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뉴스 에디터 rapidmove81@hotmail.com
*연예, 음악, 영화, 섹스의 영역에서 정치와 사회적 이슈를 읽는 데 관심 많은 그냥 사람. 가장 좋아하는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생일이 같은 선택 받은 팬이자, 가장 좋아하는 밴드 틴에이지 팬클럽의 한국 수행을 맡았던 성공한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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