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미국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끈 연설은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사가 아니라, 코미디언 아지즈 안사리가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이하 ‘SNL’)에서 한 8분59초짜리 모놀로그였다. 후폭풍이 대단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안사리가 ‘방송과 미디어는 무슬림이 기도할 때 쓰는 음악(‘아잔 Azan’)을 폭력적인 장면에 사용해선 안 된다’라고 꼬집은 걸 서두로 약 6000 자짜리 칼럼을 발행했다. 워싱턴포스트뿐 아니라 뉴욕타임스와 타임매거진 역시 해당 방송이 나오자마자 아지즈 안사리의 모놀로그를 전문 받아쓰기해서 발행했다. 심지어 뉴욕타임스는 ‘관중의 갈채’가 어느 시점에 나왔는지를 세심하게 표시하는가 하면 ‘안사리 씨가 하늘을 향해 뻗었던 주먹을 나치의 경례처럼 바꾸며 서서히 내렸다’며 행동 하나하나를 묘사했다.
NBC의 SNL이 1975년에 시작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코미디 쇼 중 하나고, 누군가가 이 쇼의 ‘호스트’로 초대 받는다는 것 자체로 뉴스가 되긴 하지만,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은 드물다. 사실 아지즈 안사리는 10년 전만 해도 먹고 살기 위해 직장에 다니면서 밤무대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던 빛나지 않는 별이었고, 2015년 넷플릭스에 ‘마스터 오브 제로’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이름을 제목에 건 작품 하나 없던 조연급 배우였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아지즈 안사리는 롤링스톤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이 CK나 크리스 록 급의 작가(Author)’ 반열에 올랐는데, 그 시기는 정확하게 미국 내에서 혐오세력이 득세하고 그 세력을 기반으로 트럼프가 정치에 발을 들였던 기간과 겹친다.
안사리 역시 “트럼프의 취임식 다음날 제가 SNL의 호스트를 맡았다니 믿을 수가 없다”며 포문을 열었다. 이건 두 가지 의미다. 일단 이 쇼에서 호스트를 맡았다는 게 곧 A급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는 의미라, 꽤 기뻤을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트럼프의 취임식 다음 날’에 찍힌 방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어서 “그래도 트럼프가 집에서 갈색 피부를 가진 남자가 자신을 비웃는 걸 보고 있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좋기도 하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줄곧 ‘무슬림의 입국을 완전히 통제해야 한다’며 혐오를 조장했는데 아지즈 안사리가 바로 인도계 무슬림 이민자 2세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우리 역시 일상에서 간혹 잘못 사용하는 ‘무슬림’이란 단어는 ‘중동 사람’이 아니라 ‘이슬람교도’를 뜻한다. 이슬람은 종교, 무슬림은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아지즈 안사리는 트럼프가 부추기는 혐오세력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2016년 6월 무슬림인 오마르 마틴이 올랜도의 한 게이 클럽에서 총기를 난사해 50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당국이 ‘외로운 늑대’(자생적 테러리스트)의 범행으로 볼 것이냐 동성애 혐오자의 범행으로 볼 것이냐를 두고 수사를 벌이는 사이, 트럼프는 망설이지 않고 그 다음날 바로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올렸다. “극단적인 이슬람 테러리즘에 대한 제 생각이 옳았다고 축하해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수많은 이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애초에 테러를 막기 위해 무슬림의 입국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고 내가 얘기하지 않았느냐’며 스스로 자랑한 격이다.
트럼프는 이 사건 이후 한동안 곳곳에 연설을 다니며 “(미국 내에 있는) 무슬림 커뮤니티는 나쁜 사람들(테러범)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라고 미국 내 모든 무슬림을 공범으로 매도했다. 나중에 오마르 마틴이 ‘억눌린 동성애자’였다고 주장하는 그의 전 남자친구가 나타나는 바람에 ‘조직적 무슬림 범죄’라는 의혹은 거의 사라졌지만, 이미 혐오의 감정은 곳곳에 퍼진 후였다.
안사리와 그의 가족은 직접적인 피해자 중 하나였다. 한 유명한 매체에 쓴 글에서 안사리는 당시 자신의 어머니에게 “모스크(무슬림 회당) 근처에도 가지 마세요. 기도는 무조건 집에서 하세요”라는 문자를 보내야만 했다고 썼다. 이어 그는 “9․11 이후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은 절반 이상이 백인 남성”이라며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는 자기 친구인 백인 남성들에게 범죄자가 누군지 불라고 말하지는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렇게 그는 뉴욕타임스에 글을 쓰는 코미디언이 되었다.
아지즈 안사리를 좀 더 깊이 이해하려면, 하나쯤 있는 ‘미국 고모’를 생각해보면 쉬울 듯하다. 어바인에 사는 삼촌, 오렌지 카운티에 사는 숙모, 그리고 숙모랑 같이 미국에 간 영어 하나도 못하는 할머니 말이다. 이들은 대부분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 국토안보부의 이민자 연감을 보면 1960년대에 미국 시민권을 딴 한국 사람은 대략 2만7000명인데, 70년대에는 24만 명, 80년대에는 32만 명으로 껑충 뛰었다. 이 기간 미국의 이민법이 바뀌며 문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안사리네 부모도 198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가 1983년에 안사리를 낳았다. 2007년 4월 16일 버지니아 공대에서 이민자 1.5세대 조승희가 오전 7시 15분부터 9시 45분까지 약 2시간30분 동안 32명, 자신을 포함해 33명을 죽였다. 만약 그때 미국의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한국인들은 테러리스트 내지는 공범, 불교가 문제’라고 했다면 어바인에 사는 사촌 형들, 오렌지카운티에 사는 오촌 당숙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아지즈 안사리는 이날 그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트럼프를 향한 분노를 거의 쏟아내지 않은 셈이다. 그는 이날 연설을 마치며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거대한 변화는 대통령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변화는 분노한 군중에게서 시작됐습니다.”
그가 넌지시 언급한 건 트럼프의 취임식 다음날 열린 거대한 반대 시위다. 트럼프의 취임식에는 약 90만 명이 참석했지만 바로 다음 날인 21일 트럼프의 반대 시위에는 약 300만 명이 참석했다. 안사리는 2016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재밌는 사람이 된다는 건 슈퍼파워를 갖는 것과 비슷하다’라고 말했다. 트럼프의 뒤에 악당의 그림자가 보이고, 안사리의 아우라 속에 슈퍼맨의 망토가 펄럭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나뿐은 아닐 것이다.
박세회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뉴스 에디터 rapidmove81@hotmail.com
*연예, 음악, 영화, 섹스의 영역에서 정치와 사회적 이슈를 읽는 데 관심 많은 그냥 사람. 가장 좋아하는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생일이 같은 선택 받은 팬이자, 가장 좋아하는 밴드 틴에이지 팬클럽의 한국 수행을 맡았던 성공한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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