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의 길/몽골-몽골인]척박한 땅… 지혜로 극복

  • 입력 1997년 5월 22일 08시 09분


지금 전세계에 7백만명이 채 안될 몽골인 가운데 5백만명 이상은 러시아연방 부리야트공화국 몽골국 중국내몽고자치구에 소속돼 있다. 테무친을 칭기즈칸(1162∼1227)으로 추대, 대몽골국을 세우고 유라시아 대륙에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인의 후예 대부분은 지금도 그때처럼 북으로 바이칼호수에서 남으로 만리장성, 동으로 홍안령산맥에서 서로는 알타이산맥에 이르는 지역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몽골인들의 자주독립국은 몽골국 뿐이다. 고비남쪽 중국령 내몽고(內蒙古)는 1636년 청(淸)에 먼저 복속되면서 1691년에 복속된 고비북쪽 몽골인들에 대한 상대적 법적 개념으로 내몽고로 분류되다가 곡절을 거쳐 1947년 5월1일부터 중국 내몽고자치구가 됐다. 몽골인들은 청조와 중국의 관점에서 보는 내 외몽고라는 말 대신 각각 우브르 몽골(남몽골)아르 몽골(북몽골)이라는 말을 쓰며 아르 몽골은 할하 몽골(할하 연맹 몽골)이라는 말과 혼용되기도 한다. 내몽고자치구에는 몽골국 전체 인구보다 더 많은 3백만 몽골인이 있다. 19세기초까지만 해도 근소한 차이로나마 몽골인이 내몽고 최대민족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1천8백만명이나 돼버린 한족들 속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간다. 몽골국 북쪽 바이칼호 주변에 사는 40만 몽골인을 부리야트 몽골이라 부른다. 이곳은 1727년 청국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캬흐타 협정에 따라 러시아령이 됐고 주민들은 이제 러시아 연방내 부리야트공화국 공민으로서 자기네보다 3배는 많을 러시아인들과 섞여 산다. 부리야트 몽골인의 87% 가량은 몽골어를 사용한다. 몽골국은 전에 우리가 외몽고 또는 몽골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칭기즈칸이 태어난 헨티아이막도 이 몽골국의 18개 아이막 가운데 하나다. 몽골은 춥고 건조하다. 수도 울란바토르의 연평균 기온이 서울보다 15도 가량 낮은 영하 2.9도, 1월 평균기온이 영하 26.1도, 7월 평균기온도 17도다. 연중 강수량도 서울보다 1천㎜이상 적은 2백33㎜에 불과하다. 국토의 평균 해발고도가 1,580m나 되는 높은 곳이다. 강력한 고기압대의 중심지역이며 강수량이 증발량의 몇분의 1에 불과하다. 4월은 사람에게나 가축에게나 연중 가장 힘든 때다. 한낮의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세찬 흙바람이 불어 겨우내 추위에 시달린 사람과 가축, 특히 갓 태어난 새끼와 막 새끼를 낳은 어미를 5월까지 괴롭힌다. 그러나 6월부터 8월까지는 싱싱한 풀을 먹은 가축들이 힘을 차려 어미의 젖이 사람을 먹여 살릴 만큼 풍부해지고 사람들도 늠름한 모습을 되찾는다. 그리고 10월부터는 몹시 춥고 긴 겨울이 시작된다. 이 지역 사람들은 6천년전인 신석기 중기 시대부터 짐승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4천∼3천년전인 청동기∼철기 초기시대에는 계절의 변화와 물, 풀의 형편에 따라 가족과 함께 양 염소 소 말 낙타 같은 가축을 수십에서 수백마리씩 끌고 한번에 몇㎞에서 몇십㎞씩, 1년에도 몇차례에서 몇십차례씩 옮겨다니는 유목이 기간산업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산업이 다양해지는 지금도 몽골국 경제활동인구의 절반 가까운 40만 유목민이 3천만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기른다. 95년의 경우 국민들은 유목의 산물인 가축의 젖과 고기를 1인당 각각 1백25.5㎏과 96.7㎏씩 소비했고 곡식과 채소 감자는 모두 합쳐 1백13.5㎏씩을 먹었을 뿐이다. 남북한 면적의 7배를 넘는 넓은 몽골국에는 2백40만명 남짓한 사람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2백20만명 가량이 몽골인이다. 몽골의 인구가 이렇게 적은 것은 첫째로 「흉노 순유시대부터 내 조상들의 고향, 내가 태어난 몽골의 아름다운 땅」이라고 노래한 몽골의 윤동주, 나착도르지(1906∼1937)처럼 몽골인들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랑하는 몽골의 기후 토양 지형 생태가 곡식과 채소 농사 뿐만 아니라 사람이 늘어 나는데도 적당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흉노 돌궐 위구르 패망후 이 사람들의 주력이 몽골을 빠져 나갔고 7백∼8백년전 칭기즈칸의 아들들 손자들 대에 많은 몽골인이 원정군으로 점령군으로 유라시아 각지로 퍼져 나갔다가 그 고장 사람이 돼버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몽골인들은 인구의 증가가 나라발전과 민족번영의 필수요건이라고 믿는다. 그런 몽골인들에게는 「몽골링 우르스 맛시 올롱 볼토가이」(몽골의 후손들이 아주 많아지기를)라는 국민적 염원이 있다. 평균적 몽골인은 강한 해와 거칠것 없는 바람에 피부색이 더 진해진 것 말고는 체격과 외모가 우리와 비슷하고 엉덩이에 푸른 반점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도 우리와 비슷하다. 오늘날 몽골인의 주된 걱정거리는 오르는 물가, 늘어나는 범죄, 그리고 자녀교육문제다. 평균적 몽골인은 티베트 겔룩 바파(속칭 노랑 모자파)불교의 교리와 몽골의 토속신앙이 통합된 몽골불교의 그다지 열렬하지 않은 신도다. 신강성에서 일어난 폭동의 여파를 피해 1864년부터 알타이산맥을 넘어온 카자흐 사람들은 몽골이 청조의 지배에서 벗어남에 따라 1917년 3월23일 정규 몽골국민이 됐다. 외모와 체격은 몽골인과 차이가 없으나 투르크계 언어인 카자흐어를 사용한다. 대개 순니 이슬람교도들이며 남자들은 몽골인들이 그저 카자흐 모자라고만 하는 차양없는 모자를 쓰고 다닌다. 15만 남짓한 몽골의 카자흐인들은 소수민족으로서 유형무형의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다. 柳元秀 <한국외국어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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