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의 중신 쿠쿠초스는 통일 전 몽골의 어지러운 상황을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사람들은 제 이불 속에서 잠들지 못하고/모든 부족은 밤낮 없이 서로 공격하고 있었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통일로 약탈과 살육과 보복의 악순환이 몽골고원에서 종지부를 찍었고 몽골은 몽골인들의 땅으로 영구확정됐다. 오논강 상류일대에서 유목하던 일개 부족의 이름 몽골은 그가 통일한 고원의 주민 모두와 그 주민들이 1206년 대칸으로 추대한 칭기즈칸이 함께 세운 위대한 나라의 이름이 됐다.
이때부터 모든 몽골인은 칭기즈칸의 영욕과 몽골의 흥망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게 됐다. 칭기즈칸은 몽골인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민족단결의 구심점이 됐다.
원(元)패망후 몽골 고원으로 돌아와서도 그들은 칭기즈칸의 직계후손만을 대칸으로 인정했다. 청(淸)에 복속돼 있을 때나 1920년대 이후 70년간 몽골국의 모든 것이 소련의 간섭을 받던 질곡의 시절, 1910년대 독립운동기나 1990년대 민주화운동기 같은 격변기에는 항상 칭기즈칸이 몽골인과 함께하며 그들의 마음을 붙들어 주었다. 소련 영향권내의 모든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추잡한 범죄 취급을 받던 불행한 시대에도 칭기즈칸은 변함없이 몽골민족의 최고영웅이었다.
1962년 봄 몽골 티베트 중국 사료를 두루 상고한 역사학자들과 몽골불교의 중심 간단 테그친링(완벽한 기쁨)사 별자리 연구가들이 칭기즈칸의 탄생을 1162년5월31일 오전 6시경으로 추정했다. 이에 따라 탄신 8백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됐다. 5월31일에는 탄생지로 알려진 델리운 볼닥에서 남으로 3㎞ 떨어진 몽골국 헨티아이막 다달솜(아이막, 솜은 우리의 도 군에 상당) 고르반 노르휴양소에서 12m 높이의 기념비가 제막됐다. 기념비 앞면에는 칭기즈칸의 초상과 몽골인들의 술드(수호 영령의 표상) 그리고 「한길 내 몸이 잘못되면 되었지 내 나라가 잘못될 수는 없다」는 그의 유언이, 뒷면에는 「몽골을 건국한 칭기즈칸의 탄신 8백주년을 기념한다」는 글이 새겨졌다.
이같은 모든 일은 몽골인민혁명당 정치국원이며 당중앙위원회 서기인 투무르오치르가 총괄했고 이는 1962년2월 당 정치국에서 결정된 일이었다. 칭기즈칸 사당이 있는 중국 내몽고 오르도스의 에젠호로(주군의 뜰)에서도 탄생 8백주년 기념행사가 중국공산당 내몽고자치구 제1서기 올란후 주재로 대대적으로 거행됐다.
그러나 당시 몽골인민공화국(1924∼1992년)은 몽골인민혁명당이 독재하고 있었고 그 당은 소련공산당이 조종했기 때문에 칭기즈칸 추모행사로 인해 몽골인들은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1962년9월8일 당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투무르오치르는 개인숭배자 민족주의자 반당행위자로 비판받고 수도 울란바토르 거주가 금지됐다. 기념우표도 회수됐다. 같은해 11월1일자 소련 프라우다지는 그의 죄상을 낱낱이 공개했다고 한다.
1963년7월에는 그의 당원자격이 박탈됐다. 당에서 지정한 고장을 떠돌며 살던 투무르오치르는 병든 몸을 치료받기 위해 울란바토르 이주허가를 청원했으나 1985년 집에서 혼자 의문의 죽음을 당할 때까지도 허가는 나오지 않았다. 몽골에서는 바트문흐가 대통령이 돼 있었고 소련에서는 1984년 몽골의 최고실력자 체덴발을 실각시키고 대신 바트문흐를 내세우는 일을 직접 지휘한 고르바초프가 실력자가 돼있는 때였는데도.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의 동요와 함께 몽골에서도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 몽골인민혁명당의 일당독재를 거부하고 소련의 정치 경제 문화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이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열에 칭기즈칸의 대형초상화가 등장했다. 칭기즈칸이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으로 등장한 것이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90년은 마침 칭기즈칸과 그 시대에 대한 기록으로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상세하고 가장 오래된 「몽골비사」를 쓴지 7백50년이 되는 해였다. 책을 쓴 곳으로 추정되는 헨티아이막 델게르한솜 아라샨 옥하라는 벌판 가운데 칭기즈칸의 초상과 칭기즈칸의 대몽골국 건국에 참여한 각 씨족의 문장(낙인), 「몽골비사」의 마지막 구절을 새긴 높이 5.2m, 한면의 폭이 각 70㎝인 사면비를 지름 12㎝인 둥근 돌 바탕 위에 세웠다. 그리고 오치르바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씨름 말달리기 활쏘기로 구성되는 나아담(축제)이 대대적으로 거행됐다.
투무르오치르의 수난이래 30년 동안 몽골인들이 감추어 두었던 칭기즈칸에 대한 존경과 몽골인이라는 자부가 글로 말로 노래로 쏟아져 나왔다. 특히 자르갈사이항의 「칭기즈칸」 「칭기즈의 영웅들」이라는 노래는 몽골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대 이름을 말하기가 두려웠습니다/그대 모습을 그려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당신의 죄와 덕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당신에 대한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조국 몽골을 위하여라고 한 대칸의 잘못입니까/조국의 역사를 위하여라고 한 당신과 우리의 잘못입니까…」(자르갈사이항의 「칭기즈칸」).
새로 나오는 지폐마다 칭기즈칸의 초상이 사용됐다. 몽골에서 생산되는 가장 좋은 술도, 외국과 합작으로 세운 최고급 호텔도 칭기즈칸이라 이름지었다.
1996년2월2일 오치르바트 대통령은 이날을 몽골국 수립 7백90년이 되는 날로 선포했다. 특별사면도 있었다. 몽골국의 역사는 1921년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모든 몽골인들이 칭기즈칸과 함께 국가를 건설한 1206년부터 시작됐다는 천명이었다.
「아아, 나의 몽골의 운명/불속에 빠져버린 경이의 운명/물에 타버린 진리의 운명/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나의 너의 우리모두의 몽골의 운명…」(자르갈사이항의 「칭기즈의 영웅들」).
柳元秀 <한국외국어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