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스타]이홍렬 「開口개그」 눈물로 빚은 웃음

  • 입력 1997년 7월 2일 07시 53분


《마흔 고개의 「촉새」. 이홍렬을 그렇게들 부른다. 웃기는 것같지 않게 웃기는, 「이홍렬 표」 웃음은 편해서 좋다. 촉새라도 나대지 않는 촉새. 진작 명퇴가 당연한 나이지만풋풋한웃음 메이커로아직펄펄날고 있다. SBS 심야토크프로 「이홍렬 쇼」를 보면 출연자에게 하기 싫은 짓을 억지로 시키거나 면박을 주어 시청자를 웃기는 법이 없다. 「자연스러움과 절제」의 개그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밤11시대 프로로서는 이례적으로 20%가 넘는 시청률을 일궈내고 있다.》 『한다면 한다』 이홍렬(43)의 인생은 이 한마디로 모든 설명이 가능하다. 그가 출연했던 코미디 「한다면 한다」 촬영을 위해 1백m 절벽 위에서 고무줄에 발목을 붙들어맨 채 머리부터 뛰어내렸듯이(이름하여 번지점프). 젊은 날엔 오직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 「맨 땅에 헤딩하듯」 부산과 서울 종로거리의 음악다방을 헤집고 다녔다. TV 코미디언이 되려면 디스크자키(DJ)라도 해야 가깝게 갈 수 있을줄 알고. 하지만 DJ자리도 퇴짜 맞기 일쑤였다. 그러나 굴하지 않았고 개그 녹음 테이프를 들고 방송국을 찾아다니며 출연을 빌었다. 왜 코미디언이 되려 했을까. 어린날의 가난 때문이다. 산소용접기사인 아버지, 한복 바느질로 가계를 꾸린 어머니, 그는 신문배달 학생이었다. 아버지가 서울역 지하도에서 물건을 팔다 치도곤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린 자신은 넣지 말라는 신문을 쑤셔넣다 뺨따귀를 얻어맞고 다녔다. 공고를 마치고 대학도 포기해야 했다. 빈한한 집안에서는 우울했지만 학교 가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자신의 재치있는 말 한마디에 친구들이 배를 잡고 떼굴떼굴 구를 때면그렇게기분이좋을수 없었다. 『TV에서 구봉서 서영춘선생님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중2때부터 남을 웃기는 직업을 갖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런 밑바닥을 헤맸기에, 79년 방송데뷔 이후 그는 행복했다. 그리고 빠르게 떴다. 「촉새」라는 별명으로 한참 잘 나가던 87년 그는 서른 넘은 나이로 대학(중앙대 연극영화과)공부를 했고 91년엔 일본어 하나라도 꽉 붙잡기 위해 집팔아 유학을 다녀왔다. 오십이 되기 전에 자기이름 붙은 토크쇼 맡는 것이 꿈이었는데 마흔 넘은 지금 「이홍렬 쇼」는 물론 「거꾸로 전성기」를 맞아 「아저씨 부대」까지 거느리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니까 어느날부터인가 뒤가 묵직했다. 돌아다보니 엉덩이에 돈이 붙어있더라』는 덧붙임. 이홍렬의 웃음은 편안하다. 가파른 언덕과 수렁을 헤쳐온 삶이 풍기는 「넉넉함」같은 것일까. 이홍렬은 하는 일이 잘 될수록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다고 했다. 지긋지긋하게 고생만 하다 그가 데뷔하기 두달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때문에. 『맨처음 자가용으로 엑셀을 사서 백미러를 조정하는데 눈물이 왈칵 솟더라고요. 저 뒷자리에 어머니를 모셨어야 하는데 싶어서요』 어려서부터 일기를 썼다는 그는 요즘도 일본어로 매일 일기를 쓴다. 일본어를 잊어버리지 않을 겸 누군가의 일기장에 「뺑코아저씨도 했는데 나라고 못하랴」라는 말이 쓰였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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