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관을 찾아서②]끌려가면서도 당당했던 조선陶工

  • 입력 1998년 6월 17일 19시 13분


김포를 떠난 비행기가 한시간, 기내식 제공하랴 면세품 팔랴… 대한항공 승무원들은 마치 소방훈련이라도 하는 듯이 움직였다. 비행기가 곧 가고시마(鹿兒島)공항에 착륙한다는 말에 창 밖을 내려다보니 시가지 건너편으로 화산재를 뿜어올리고 있는 사쿠라지마(櫻島)가 손에 잡힐 듯 바라보였다. 화창한 날씨 때문에 분화구에서 뿜어나오는 재가 마치 연기처럼 선명하다. 잠시 후 불길이라도 치솟을 것 같다. 사쿠라지마, 이름은 섬이지만 지금은 섬이 아니다. 1914년 화산이 폭발하면서 그 용암이 쌓여 가고시마 시내와 붙어버렸다.

심수관가의 ‘수관도원(壽官陶院)’은 공항에서 승용차로 한시간 거리. 4백년전 도공들이 이곳으로 끌려올 때의 그 멀고도 먼 길을 나는 그렇게 찾아가고 있었다.

장미꽃을 일본어로는 ‘장미의 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가. 무궁화도 일본어로는 ‘무궁화의 꽃’이라고 말한다. 하긴 우리 어린이들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하면서 술래잡기를 하던가. 가고시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현해탄을 건너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심수관가문이 꽃피운 사쓰마야키와 함께 백자의 세계를 연 조선도공 이삼평(李參平)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가 일본에서 백자의 세계를 연 이삼평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아리타(有田)자기는 일본 백자를 상징한다. 아리타 마을에 가면 그를 기리는 거대한 기념비를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 앞에는 영광스럽게도 도예의 조상으로 추앙하는 도조(陶祖)라는 말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그 기념공원에 들렀던 것이 언제였던가. 몇 년전 여름 아리타에 들렀을 때 이삼평기념비로 오르는 언덕길에는 무궁화가…아니 ‘무궁화의 꽃’이 피어 있었다. 4백년 전의 조선인 이삼평을 기리며 꽃마저 그의 조국의 꽃 무궁화를 심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1598년 음력 8월15일, 남원(南原)성이 함락된 날은 마침 한가위였다. 남원성에 머무르던 왕자 이금광(李金光)을 호위하던 심당길(沈當吉·심수관의 선조)은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된다. 어디를 어떻게 헤맸는지 기록이 없지만 그들이 일본의 남쪽 규슈, 거기에서도 최남단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의 구시키노(串木野)해안에 상륙한 것은 12월이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이 전쟁을 일본역사에서는 흔히 ‘도자기 전쟁’이라고 말한다. 선진문물의 약탈을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도공만이 아니었다. 금공(金工) 석공(石工) 목공(木工)은 물론 세공품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으로 출병한 사쓰마 번주(藩主)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내린 문서에 의하면, 특히 자수장(刺繡匠)을 끌어올 것을 명하고 있다. 기능공을 포획(?)하기 위한 ‘인간사냥’이었던 것이다.

박평의를 비롯한 심당길 일행은, 백자를 그토록 가지고 싶어했던 사쓰마의 번주 시마쓰에 의해 끌려온다. 목적이 분명했기에, 그들의 배에는 당연히 도자기를 만들 점토와 유약이 함께 실려졌다. 사람과 함께 흙까지 싣고 간 이 만행도 그들에게는 ‘집념’일 뿐일까.

끌려온 도공들의 배는 넷으로 나누어져서 사쓰마반도에 닿는다. 그 가운데 가마를 연 곳은 세 곳, 가미노가와(神の川) 마에노하마(前の濱) 그리고 구시키노의 시마비라(島平)해안, 심수관씨의 선조가 내린 곳이다.

이들은 왜 먼 타국땅에서 그토록 뿔뿔이 흩어졌던가. 남원성이 함락될 때 일본군 첩자노릇을 한 자들이 같이 내렸기 때문에, 그런 자와는 함께 살 수 없다고 거절한 것이 이유의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선도공의 기백이 어떠했는지 서슬푸르게 다가온다.

한수산(작가·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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