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영화에서는 해설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대사를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매끄럽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읽어나간다. 화면속에서 여자가 아이를 낳거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이 사랑을 나누거나, 심지어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상관없다.
게다가 주인공이 근육질의 아널드 슈워제너거든, 깜찍한 줄리아 로버츠든 해설가는 언제나 남성이다. 여성에게 영화 나레이션을 맡기지 않는 이유는 여성은 감정에 치우쳐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하는 데 지장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폴란드의 한 칼럼니스트는 “밤에 이리 저리 채널을 돌려도 똑같은 목소리를 듣게 된다. 나중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건 브라질의 멜로드라마건 같은 영화를 보고 또 보고 하는 것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폴란드 최고의 영화해설가로 꼽히는 안드르제지 마툴은 “영화해설가가 되려면 침착하고 감정을 배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폴란드 영화팬치고 26년동안 숱한 영화배우들의 대사를 ‘낭독’해온 그의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 희한한 영화 번역 시스템의 원산지는 구 소련이다. 그러나 구 소련조차도 남주인공은 남자해설가가, 여주인공은 여자해설가가 맡았다. 한때 더빙이 시도된 적도 있었으나 제대로 하려면 인건비가 많이 드는데다 사람들의 호응도 없어 흐지부지 됐다.
90년대초에는 TV방송들이 자막삽입을 시도한 적이 있었으나 워낙 화면이 작고 흑백TV가 대부분이어서 혼란만 줬다.
‘관습의 힘’ 때문일까. 지난해 여론조사에 따르면 폴란드 국민의 54%가 나레이션 스타일의 해설을, 36%는 더빙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TV방송국이 실시한 마케팅조사에서도 시청자의 20%가 해설이 들어가지 않은 영화는 시청을 거부하겠다고 응답했다.
그래서 한 골수 영화팬은 “세계 각국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들만 영화를 들어야 하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라고 한숨지었다.
〈파리〓김세원특파원〉clai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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