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젊은피 수혈」가로막는 政治현실

  • 입력 1999년 3월 30일 23시 09분


스무 살짜리 혈기왕성한 젊은이만 사는 사회가 있다고 하자.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해마다 한 번씩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환갑을 넘긴 노인들만 사는 세상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아마도 사회의 밑동이 썩어 넘어져도 개혁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사회는 보수와 진보 둘 모두를 요구하며 ‘인간은 누구나 늙는다’는 생물학적 현상은 두 진영 모두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추종자를 알아서 공급한다.

안정과 변화가 적절하게 결합된 사회를 만들려면 보수와 진보 사이의 견제와 균형뿐만 아니라 노장청(老壯靑)의 ‘생물학적 균형’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치적 사회적 의사 결정권의 배분에서 생물학적 균형이 지나치게 노년 쪽으로 치우쳐 있는 사회는 개혁의 지체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청년세대의 소외와 저항 때문에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빚어진 역사의 지체 때문에 70대 대통령이 60대 참모를 이끌고 나라를 운영하는 지금 우리는 바로 이런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대통령의 ‘젊은 피 수혈’ 계획은 무슨 숨겨진 카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보다 확실히 젊은 세대의 관심을 끌 만하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아 보인다. 젊은 피를 수혈 받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받는다고 해도 우리 정치에 갑자기 활력이 생긴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권력의 생물학적 균형이 깨진 것은 대통령이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다. 정치제도와 풍토가 젊은 세대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탓이다.

현역 정치인들만의 책임은 아니겠으나 우리 나라 유권자들은 ‘좋은 정치’라는 공공재(公共財) 공급자인 국회의원을 뽑을 때 사적(私的)인 기준을 적용하는 습관이 있다. 지연 혈연 학연을 찾고 평소 상가나 결혼식에 얼마나 열심히 얼굴을 내밀었는지를 따진다. 심지어는 공중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준 ‘계획된 인연’에까지도 점수를 준다. 자기 분야에서 능력을 검증받은 ‘신지식인’ 젊은이가 이런 일을 하면서까지 정치를 할 리는 없다.

정당의 분위기도 그렇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87년 평민당을 창당해 처음으로 정당의 총재가 되었다. 그 사이 이름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총재의 뜻을 잘 읽는 소수가 당론을 결정하는 풍토는 지금도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젊은 피 수혈 문제가 불거진 경위를 봐도 그렇다. 하루 이틀 묵은 문제도 아닌데 당에서는 논의가 없다 총재의 말 한마디가 떨어지자 갑자기 이 말씀의 해석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

그저 젊은 정치 지망생이라면 실세 의원에게 줄을 서겠지만 나름대로 전문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젊은이가 선뜻 이런 정당에 발을 들여놓기란 쉽지 않다.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맞붙는 소선거구제와 지역주의적 투표행태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선 가능성도 있고 ‘수혈’의 의미도 있는 선거구는 서울과 경기 지역 몇 개뿐이다. 대규모 수혈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그밖에도 허다하다. 하지만 권력의 생물학적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 그 자체는 반가운 일임에 분명하다.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동참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수혈에 앞서 정치의 국회와 정당과 관련 제도의 개혁을 먼저 해야 한다. 살아날 가망이 별로 없는 쪽보다는 회생의 조짐을 확실히 보이는 환자에게 헌혈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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