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 칼럼]차병직/한자병용 원칙 다시 세워라

  • 입력 1999년 4월 11일 19시 42분


동아일보 지면이 전면 가로쓰기로 바뀐 것은 작년 1월1일부터다. 가로쓰기는 그 이전의 한글전용 원칙에 뒤이은 조치다. 신문이란 시대적 요청을 반영하는 매체인 만큼 현실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로쓰기 단행 당시 세웠던 한자병용의 표기 원칙은 지금까지 어떤 상황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지난 일주일치 신문의 1면 머릿기사의 제목에는 늘 그래왔듯이 예외없이 한자가 섞여 있다. 그러나 그것이 버리기 어려운 습관에 따른 것인지, 필요성에 의한 원칙 때문인지 불분명하다.

내각제 ‘年內개헌’과 ‘연내改憲’, 유고 ‘內戰휴전’과 ‘내전休戰’은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표기방식은 분명 가독성이나 의미전달의 오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다른 면에서 ‘권총殺人’ ‘7년만에 白旗’ ‘관리 非理’ ‘교사 不信’ 등으로 표기한 것을 ‘살인’ ‘백기’ ‘비리’ ‘불신’으로 바꿔 놓았을 때 어느 쪽이 현재의 가독성을 더 높일까.

스포츠난이나 경제란에서는 제목을 거의 한글로만 뽑고 있다. 그렇다면 ‘기량 일취월장’ ‘기관이 활황장세’와 같은 전형적 한자어의 의미전달은 수월할 것이라고 보았는가.

기사 본문에서 인명의 한자를 괄호속에 묶는 것은 고집스러운 원칙이다. 이 기회에 습관을 버리고 원칙을 다시 세울 것을 제안한다. 그럴 경우 당연히 ‘東亞日報’라는 제호부터 고려해야 한다.

6일자 1면 머릿기사는 이례적으로 박스에 넣은 기획기사였다. 현재 계류중인 정치인들의 재판 진행상황을 점검한 내용은 첫째로 다른 신문들이 최근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종성 기사였고, 둘째로 며칠 뒤의 서상목의원 체포동의안 부결과도 맞물려 시의성까지 얻게 된 적시타였다.

정치인들에 대한 사법처리의 현실적 장벽과 그 결과로 인한 법 앞의 형평성 파괴를 지적한 것은 적합성을 지닌 신문보도였다.

그러나 기사의 의도와 1면 머리라는 형식상의 돋보임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보도는 필요한 것들로 내용을 알차게 채우지 못해 미진하다. 기소된 6명의 전현직 의원들이 1회부터 15회에 이르는 공판기일에 거의 모두 불출석했다면 법치국가에서는 분명 문제 있는 사태다.

그러한 사태를 1면의 머리로 이끄는 것은 문제된 사실의 존재 자체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최초의 기사에는 불출석 사실의 나열만 있고 그 이유나 이유에 대한 평가는 없다. 독자들은 정치인들이 재판에 불응한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그 이유가 무엇이며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최초의 기사에서 적어도 한두 줄이나마 언급했어야 함에도 빠뜨린 내용은 이런 것들이다. 당해 정치인들은 무단으로 재판을 거부했는가, 아니면 연기신청과 같은 절차를 밟았는가. 연기신청을 했다면 그 사유는 무엇인가. 십여차례 이상 계속 연기를 허용했다면 재판 공전의 책임은 피고인들에게 있는가, 법원에 있는가. 재판장의 향후 진행계획은 무엇이며 구인할 의사는 없는 것인가. 비교적 제대로 재판을 받고 있는 정치인들과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러한 일련의 의문은 다행히 이틀 후인 8일자와 9일자 사회면의 후속보도로 조금은 해소됐다. 작년 의정부 법관 비리사건을 파헤친 동아일보 법조팀의 저력과 노련함을 보여줬다고 할까. 그렇지만 후속보도에서도 정치인들과 재판부에 대한 직접 취재는 여전히 부족함이 느껴진다.

차병직(변호사,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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