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은 전설 속에서 나무꾼과 선녀가 사랑을 나눈 선경(仙境)으로 알려졌다. 또한 불보살이 머무는 금강정토로 인식됐다. 조선시대에는 문인사대부들의 풍류터로 시문학과 회화 등 예술창조의 산실이 됐다. 일제하에서는 민족의 자존(自尊)을 지켜내는 장소로 더욱 사랑을 받았다. 해방이후에도 통일의 염원으로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한’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노래해왔다.
그러나 분단 반세기 동안 금강산은 가고파도 갈수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우리에게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 금강산이 지난해부터 성큼 우리에게 친숙한 곳으로 닥아왔다. 너도나도 금강산 등정을 꿈꾸게 되었다.
그 금강산을 우리 선인들은 어떻게 묘사했을까. 지금의 미술가들은 또 어떻게 표현해낼까. 일민미술관이 ‘몽유금강―그림으로 보는 금강산3백년전’을 기획, 시대를 아우런 금강산을 국민들에게 선사하게됐다. 분단 50년만에, 나아가 겸재가 금강산을 그린지 300년만에 옛 작가들과 현대작가들이 함께 하는 금강산전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 전시회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부터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1899∼1976)에 이르기까지 300년에 걸쳐 그려진 금강산 그림을 선보인다. 금강산과 관련된 기행시문과 사진, 불교유산 등의 자료를 보태왔다.특히 미공개작품을 발굴해 내놓는다.
현대작가들이 옛작가들이 금강산을 그린 같은 지점에서 직접 사생하고 그것을 대상으로 삼은 작업도 선보인다. 과거의 금강산그림과 현대작가가 그린 금강산 그림을 비교, 금강산 예술을 재조명해보려는 기획전시회다. 이는 금강산이 민족사에서 차지하는 위상만큼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나아가 새 천년의 예술을 전망하는 첫 삽뜨기가 될 것이다.
전시기획자로는 비장된 명작을 만나는 일이 무엇보다 큰 보람이다. 고미술전의 경우 더욱 그렇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가장 큰 기쁨을 준 그림이 정선의 ‘비로봉도’이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동아일보지면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다.
그림에 작은 글씨로 ‘비로봉(毘盧峰)’과 ‘중향성(衆香城)’이라고 써넣은 것처럼 중향성 위로 솟은 금강산의 최정상 비로봉을 포착한 그림이다. 금강산은 화엄경에 등장하는 담무갈보살이 중향성을 쌓고, 만이천명의 권속과 함께 살아가는 이상향을 뜻한다. 비로봉이라는 이름도 화엄경에서 중요한 부처로 등장하는 ‘비로자나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비로봉도’와 그 대상이 됐던 실경을 비교해보니 ‘비로봉도’는 인근 백운대에서 본 중향성과 비로봉의 모습을 토대로 구성했음을 알겠다. 금강산의 주산답게 매바위가 있는 비로봉의 정상을 웅건하게 과장하여 형상화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중향성 연봉들을 낮게 깔아 비로봉의 위용을 극대화했다. 소품이면서도 대작 못지 않은 감명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60대 이후 정선의 무르익은 필묵(筆墨)의 분위기가 잘 어우러져 있다. 또한 정선의 그림 가운데 이처럼 절제된 필선에 담묵을 은은하게 구사한 그림도 드문 편이다. 정선의 금강산 그림 중 대표작 반열에 오를만한 명품이다.
조선시대 어느 문인은 비로봉에 올라 “천봉만학 그 사이를 오고가며 맴돌아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한쪽면이 고작이라, 어찌하면 이 몸에 날개가 돋혀서 하늘을 날아 올라 안팎 금강을 굽어볼까”(삼명 강준흠·三溟 姜浚欽·1798∼?)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과연 금강산 전체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안타까운 심경을 그림을 통해 극복하려한 화가가 바로 겸재 정선이다.
정선은 우리 강산의 명승절경을 중국화풍에서 벗어나 우리식으로 그린 진경(眞景)산수화의 전형을 창출한 화가이다. 진정한 의미의 조선산수화는 그로부터 시작됐다하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정선은 특히 금강산도를 통해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정선의 내금강을 담은 크고 작은 ‘금강산도’가 여러 점 전하지만 회화적으로 평가할만한 작품으로는 고려대박물관 소장품을 들 수 있다. 근경화면의 오른편에 내금강 입구 장안사가, 왼편에 표훈사 정양사가 있는 토산을 붓끝을 뉘여 툭툭 친 진한 점의 반복으로 입체감을 살렸다. 바위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붓을 곧추세워 날카롭게 죽 죽 내리그은 수직준법(垂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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