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맨/정보와 속도]「스피드」로 승부건다

  • 입력 1999년 9월 27일 18시 44분


해외출장을 앞두고 BC카드를 해외에서도 쓸 수 있도록 바꾸려던 김모씨(28·회사원). 한빛은행 창구직원 박선영씨(가명)로부터 “카드를 갱신하면 그동안 적립된 포인트가 사라진다”는 퉁명스러운 대답을 들었다.

BC카드 본사에 전화를 걸어 ‘포인트는 계속 누적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한빛은행 홈페이지에 ‘사건 전말’을 써올렸다. 2시간 뒤 전화벨이 울렸다. “저 한빛은행 박선영인데요. 사과드릴께요….”

▼속도의 시대

박씨의 사과전화를 받은 뒤 김씨는 은행 홈페이지를 확인했다. ‘박씨를 재교육시키겠다’는 답장이 올라 있었다. 30분 뒤,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엔 본사. “김고객님,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예전 같으면 은행을 몇번씩 왔다갔다 하거나 현장에서 한바탕 싸웠을 법한 일. 디지털맨인 김씨는 컴퓨터로 조용히, 두시간반만에 세번의 사과를 받아냈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는 않았다. ‘카드를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갱신해 주겠다’는 핵심조치가 빠져있었던 것.

빌 게이츠는 저서 ‘생각의 속도’에서 80년대가 질(質)의 시대요, 90년대가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속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확언했다. 비즈니스의 본질이 빠른 속도로 바뀌고 소비자의 생활양식과 기대치가 빠르게 변화하며 또 이에 따라 제품의 질적 향상도 훨씬 빨라질 것이기 때문.

컴퓨터 정보의 입력과 출력이 즉시 일어나는 실시간(Real Time)개념속에 사는 디지털맨에게 느림은 일종의 ‘죄악’이다. 접속 속도가 더딘 것도 못참을 만큼 성급한 이들에 맞춰 스포츠음료회사는 ‘강한 건 힘이 아니라 속도’라고 광고해댄다. 그러나 속도에 따른 질적 향상이라는 ‘핵심’이 빠진다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한 속도인가”를.

▼윈도 라이프

윈도가 움직이는 컴퓨터와 친한 디지털맨. 한번에 명령어 하나밖에 수행하지 못하는 도스와 달리 윈도는 서로 다른 기능과 업무를 합리적 효율적으로 동시에 처리할 수 있도록 압축해놓고 있다. 따라서 윈도식 업무처리방식에 익숙한 이들에게 어설픈 단선적 언행이나 불합리함은 통하지 않는다.

이같은 윈도는 알게 모르게 역으로 디지털맨의 사고방식을 결정짓기도 한다. 덕성여대 학생생활연구소 김미리혜교수(임상심리학·medehae@hanimail.com). “윈도의 자극은 일회적이지 않으면서 하루 몇시간씩 지속된다. 더구나 컴퓨터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엄청난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면서 인간의 ‘제어욕구’를 만족시키므로 이용자가 인식하는 것 이상으로 이용자의 사고방식을 지배할 수 있다.”

특히 성격상 제어욕과 지배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윈도식 사고방식에 빠져들기 쉬워 일상속의 비효율성을 못견딜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김씨가 현장에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인터넷을 이용한 것은 ‘싸움’과 일을 동시에 하기 위해. 한빛은행이 김씨의 E메일을 처리하는 동안 김씨는 일을 하는 윈도식 ‘멀티태스킹’을 선택한 것이다.

▼멀티태스킹맨

데이콤 EC사업팀 김정국대리(30·jland123@bora.net)는 회사일과는 별도로 ‘컴맹’인 생산자와 ‘컴도사’인 소비자들을 연결시켜주는 전자상거래회사인 ‘세일즈 에이전트’를 경영한다. 그는 10∼12가지 업무를 동시에 진행하는 전형적인 ‘멀티태스킹맨’.

‘한 우물만 파라’ ‘화끈하게 일하고 놀 땐 놀자’는 등의 A→B→C식 산업사회적 일처리는 김씨에게 맞지 않는다. 윈도의 ‘Alt’―‘Tab’을 누르듯, A―B―C―B―D―A식으로 이 일 저 일을 왔다 갔다했을 때 나타나는 ‘시너지 효과’를 믿는다. 전화도 통화상대와 1대1로 말하는 동안에는 다른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E메일은 수시로 체크.

“한 업무에만 집중해서 매달리면 오히려 일에 매몰돼 아이디어가 안나올 수 있어요. 전자상거래를 진행하면서 택배를 이용한 마케팅 아이디어가 갑자기 떠오르면 바로 마케팅기획으로 ‘화면’을 바꾸죠.”

▼너희가 윈도를 믿느냐

일처리를 최대한 효율적 합리적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디지털맨의 윈도식 정보처리방식에 대해 전문가들은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윈도의 멀티태스킹은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기 위한 것. 디지털맨은 때로는 심리적 유아기 속의 ‘피터팬’으로, 때로는 다중인격의 ‘멀티태스킹맨’으로 폭주하는 정보를 빠르게 뒤지면서 자기가 선택한 일에 대해선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어떤 ‘권력’도 이들의 삶과 사고를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그러나 만약 도구(윈도)를 독점 생산하다시피하는 기업이 윈도에 특정 정보를 살짝 끼워 넣거나,특정 정보를 보도록 ‘이정표’라도 세워 놓는다면 이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올 것”이라고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최혜실교수(choi@sorak.kaist.ac.kr)는 경고한다.

사람을 지배하는 새 밀레니엄 ‘파워’는 폭력도, 돈도, 지식도 아닌 정보처리 도구 그 자체에서 나올 수 있으며 이 파워를 충실히 실행하는 계층은 바로 디지털맨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나성엽기자〉newsda@donga.com

▼다음편은▼

종합상사인 D사의 박모대리(30)는 최근 인터넷에 새로운 오픈한 전자상거래 장터 발표회를 앞두고 업계 관계자 60여명에게 E메일 초청장을 발송했다. 발표회 당일, 행사가 시작된 순간 박대리는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E메일 초청장을 받은 관계자 60여명 중 겨우 15명 만이 모습을 나타낸 것. 박대리를 지켜보던 한부장(45)은 혀를 끌끌 차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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