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과천의 집에서 일하느라 두문불출하던 이들이 모처럼 짬을 내 나들이 나선 것은 2월 26일 개봉한 영화 ‘아메리칸 뷰티’ 때문. 이 영화는 작품상 감독상 등 미국 아카데미 8개 부문 수상 후보작이어선지 국내 개봉 10일만에 18만명(서울 관객기준)을 넘어섰다. 특히 미국판 ‘콩가루 집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가 94년 ‘평등부부상’을 타기도 한 이들 부부에게 흥미로워 보였던 모양이다.
▽최정현〓지난 여름 ‘스타워즈 에피소드Ⅰ’을 본 뒤 극장에서 영화보기는 처음이네. 영화평론가께서 먼저 이야기를 하시지.
▽변재란〓영화가 그리는 가정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 특히 레스터(케빈 스페이시 분)네는 공유하는 게 거의 없어. ‘대 놓고 이야기하는 게 대화’라는 말이 있잖아. 레스터 가족은 꽤 엄숙하게 꾸며 놓은 식탁 앞에서 모처럼 대화를 하자고 하면서도 결국 그 말 때문에 싸우더라구.
▽최〓나는 도입부에 레스터의 부인 캐롤린(아네트 베닝)이 꽃꽂이를 위해 장미를 자르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 꽃꽂이용 장미는 아름답긴 하지만 뿌리가 없어 곧 시들잖아. 그 장미들은 마치 풍요롭지만 안에서 썩어가는 미국 중산층 가정을 상징하는 것 같았어.
▽변〓레스터가 딸의 친구에 대한 사랑에서, 캐롤린이 성공한 부동산업자와의 외도에서 각각 위안을 얻는 장면은 어땠어?
▽최〓부부의 모습이 이해는 가. 꼭 딸의 친구는 아니더라도, 원조교제니 뭐니 가정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잖아. 이런 위기를 넘기려면 물질의 풍요말고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동양 철학이 필요한 것 같아.
▽변〓하지만 ‘부부는 일심동체’와 같은 말은 좋지 않다는 게 내 지론이야. 레스터의 가족처럼 남편과 부인, 자식이 서로에게 뭔가를 강요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그 차이를 줄이는 게 아닐까. 대신 대화의 통로나 규칙, 코드 같은 게 꼭 필요하다고 봐.
▽최〓사실 우린 이 영화 볼 필요없잖아. 우리 집이야 내가 워낙 성격이 좋고 잘하고 있으니까(웃음).
이 대목에서 제동이 걸렸다. 평소 최씨는 만화를 통해 자신은 착하고, 부인은 바쁘기만한 악처로 그렸기 때문일까. 변씨는 “맨날 남편 잘 만난 복받은 여자로 인사받는 게 억울하다”면서 “당신도 두고 봐야 한다”며 뼈있는 한 마디를 날린다.
▽변〓얘기가 샜나. 나는 이 영화 속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존재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장식용 가구처럼 있는 옆집 리키의 어머니라고 생각해. 하다 못해 캐롤린은 자신이 성공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부동산업자와 외도라도 하잖아. 영화는 또 찌그러진 남편(케빈 스페이시)의 모습을 통해 정말로 불쌍한 건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어.
▽최〓나도 그렇게 생각해.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터지면서 불었던 ‘아버지 바람’이 생각났어.
▽변〓그런데 요즘 왜 이렇게 남성들의 서글픈 자화상이 인기지? ‘박하사탕’이나 성적인 집착에 시달리는 ‘거짓말’도 그렇고. 최근 60만명이 넘었다는 ‘반칙왕’도 남자들 얘기잖아.
▽최〓아무래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반영하기 때문인 것 같아.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내 집앞의 불’이지. 아버지들도 예전보다 훨씬 힘들어진 것 아냐.
<정리〓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