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하나의 음향. ‘폭’도 아니고 ‘톡’도 아닌, 그 사이의 경쾌한 소리. 오돌도돌한 비닐 포장지를 쥐어 짜 터뜨리는 것 같은, 곪았던 여드름이 폭발하는 것 같은 소리. 바로 내 귓불의 살이 뚫려나가는 소리다.
▼구멍(狗夢?)▼
내 몸에는 후천적 구멍이 38군데. 귀(에만도 20곳)+코+혀+배꼽 등. 피어싱(Piercing·몸을 꿰뚫고 장신구를 매다는 행위)을 통해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이 강조한 ‘4주덕’을 나는 빈틈없이 실현하노라. 나의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정의’)→오감이 발달한 곳을 주도면밀하게 찾아내어(‘지혜’)→가차없는 진지함으로 구멍을 만들고(‘용기’)→뚫을만큼 뚫었으니 이제는 정지를 선언하기에(‘절제’).
피어싱을 하는 나는 심각하다. 그러나 나를 보고 사람들은 배꼽을 잡는다. 나는 이렇게 진지함 일색인 인류의 가치관에 의미있는 자극을 던지기 위해 태어났다. 웃음과 약간의 공포를 자아내는 나의 르네상스적 외모와 달리 내면에는 고요한 평정을 달성한 엘레강스가 숨어있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피어싱을) 마구하다 보면 절망의 절벽을 건너 결국 마음의 안식에 도착하는 것이니, 나는 이런 예술행위를 ‘무막’(무의식적으로 막한다)이라 일컫는다.
음반작업도 마찬가지다. 하루종일 잠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최초 5분간 비몽사몽한 상태의 감흥을 옮긴 음반을 작업하면서 애초에는 ‘비몽사몽 파라다이스 오케스트라’라고 음반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무막’ 과정을 통해 나의 카오스적 심상을 담은 음반은 결국 일정한 종착점을 향하게 됐고 나는 음반 이름을 ‘휴먼 마인드 오퍼레이션 사운드 시스템’으로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정신없어 보이는’ 외모에 이토록 수줍고 조신한 자아가 숨어있는 표리부동을 나는 즐긴다.
▼도착(倒錯)▼
‘도착’이란 어떤 사람이 삶에 대해 기울이는 애착의 크기다. ‘3’이란 숫자에 대한 나의 관심도 내 삶의 진지함의 깊이를 표시한다.
초등학교 때, 하교 길에 맨홀 뚜껑을 밟으며 그 숫자를 세는 습관이 있었다. 집에 당도했을 때 그 숫자가 3의 배수가 되지 않으면 나는 수 ㎞라도 되돌아가 3의 배수가 될 때까지 마저 밟고 왔기 때문에 하교 시간은 늘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에 인주를 묻혀 국어 공책의 네모난 칸에 한번 도장을 찍고 나면 반드시 손을 씻어줘야 했던 낭만적 강박증도 있었다. 결국 나는 한 페이지 전체(200칸)에 한칸 한칸 도장을 찍고 손을 씻는 행위를 반복해야 했다.
하루 200번 화장실에 드나드는 나를 이상하게 여긴 어머니에게 나는 “오줌이 자주 마려워서”라고 둘러댔다. 내 은밀한 행위가 들킬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자 나는 곧장 병원으로 끌려 가 8세의 여린 나이에 애꿎은 포경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도장 도착’은 “참 잘했어요”하고 과제물에 도장을 찍어주던 담임 선생님의 행위를 일상적 삶의 목표치로 받아들인 나의 도착적 퍼포먼스였는지 모른다.
▼질식(窒息)▼
자동판매기의 형광등은 빛이 고르게 뿜어져 나오지 않고 늘 착란증세를 보이며 껌벅껌벅 거린다. 나는 이것이 ‘그’가 우주에서 보낸 ‘모르스 부호’라는 사실을 간파했으므로 매일 몇시간에 걸쳐 진지하게 해독해 본다.
자판기는 이렇게 자신만의 코드로 질식할 것 같은 일상에 반항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소중한 장난감, 예를 들면 아기 인형, 헬리콥터 모형, 오토바이 모형에 돋보기를 들이대 구석구석 한 점의 먼지도 없이 청소하면서 나는 일상에 큰소리 치는 것이다. 그 때의 쾌감은 어떤 성적인 것보다 강렬하다.
치과 치료를 받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서도 나는 삶의 강한 무게감을 느끼며 다음과 같은 240쪽에 달하는 소설을 완성했다. 제목은 ‘질식 메타기’(질식의 정도를 알려주는 장치라는 뜻).
“입을 쭈욱 벌려 치아에 힘을 주어서 땀을 흘려야 해. 눈가에 잔인을 꽂아 이 친구의 상황을 살피고 있노라니 ‘하하하…’. 그러나 약간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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