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환(金潤煥)의원 등 민국당 주축들이 모두 나서 강의원을 끌어당겼지만 강의원은 “한나라당이 누가 만든 당이냐. 억울해서도 못나간다”고 버텼다. 강의원의 합류 거부는 적어도 TK지역에서는 민국당의 왜소화로 이어졌고 두고두고 민국당 관계자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TK의 차세대 주자.’ 언제부터인가 강의원에게는 이런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13대부터 16대까지 내리 4선째인 그는 민정 민자 신한국 한나라당을 거쳐온 구 여권의 ‘총아(寵兒)’. 무엇보다 김영삼(金泳三)정권 이후 권력의 주역자리에서 밀려난 허탈감이 팽배한 TK에서 그는 지역정서에 부합하는 스타일과 ‘인간됨됨이’로 다른 선배들을 제치고 관심인물로 부상했다.
충청출신인 이회창총재도 내심 강의원을 견제해온 게 사실. 사법연수원의 교수와 제자 사이였던 이총재와 강의원 사이는 97년 대선 당시 강의원이 이총재의 정치특보를 맡을 정도로 가까웠으나 대선 패배 이후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선이 끝난 뒤 강의원은 “대선 패배를 몰고 온 세사람이 있다. 이인제(李仁濟)와 김종필(金鍾泌), 그리고 이회창”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이번 총선 결과에 대해서도 “영남권을 빼면 승리했다고 볼 수도 없다”면서 “이총재가 공천만 제대로 했다면 우리 당이 과반수가 됐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의원이 과연 제1당 고지 탈환으로 형성된 ‘이회창 대세론’의 틈바구니에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대구출신인 박창달(朴昌達)의원은 “TK 지역, 특히 대구의원들의 뜻부터 모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강의원은 98년 한나라당 총재경선 때 ‘질투’까지 섞인 TK 위원장들의 비협조로 중도포기의 아픔을 겪었다.
당시 경선 중도포기 등으로 우유부단하게 비친 이미지를 극복하는 일도 강의원의 부담. 경선 때 ‘강재섭 추대’에 앞장섰던 마산출신 강삼재(姜三載)의원도 아직 당시의 아쉬움과 실망감을 얘기한다.
이번 총선 후에도 강의원은 여전히 특유의 신중함을 지킨다. “맨땅에 헤딩할 수는 없지 않느냐. 총재 경선이든, 부총재 경선이든 당의 중심에 들어가 일하겠다는 것이 현재의 입장”이라는 게 그의 얘기다.
<박제균기자>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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