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유학시절 미국은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로 허덕이고 잘 나가던 일본이 건물 기업 할 것 없이 사들이던 것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그 때와는 정반대로 한국 등 동아시아가 경제위기로 휘청대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기사회생하여 제2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것을 보니 묘한 느낌이 듭니다.
미국경제가 얼마나 호황인지를 실감나게 해주는 것은 아파트 임대료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뛰어 올랐고 그나마 하늘의 별 따기 식으로 아파트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로스앤젤레스 근교 주택가를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빈방 없음’이라는 표지뿐이어서 집을 구하지 못해 친구들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인타운의 경우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로 약 1만명의 한국인이 생계를 위해 건너와 불법체류 등의 형식으로 머물고 있어 주택난이 더욱 심해졌다니, 미국의 호황과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효과를 실감하게 됩니다.
미국의 주류학자들은 이처럼 유례 없는 장기호황이 디지털혁명 등에 의해 경제주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신경제론’을 내세우며 미국의 호황이 계속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론적 논쟁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역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긴 인류 역사 속에서 판단해 볼 때에만 신경제론도 타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제 민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만, 우리 사회에 양반 상놈이라는 신분의 벽이 무너진 것이 100년, 아니 50년에 불과합니다. 긴 역사적 관점에서 주목할 것은 시장경제 400년 역사 동안 미국에 앞서 세계를 지배했던 제노바, 네덜란드, 영국의 경험입니다. 특히 미국의 호황을 주도하고 있는, 그리고 동아시아의 경제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국제투기자본 및 금융자본의 팽창과 관련해 이들의 경험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연구자가 잘 지적했듯이, 금융자본의 팽창은 기존의 패권체제 그리고 이에 기반한 세계경제가 황금기를 지나 조락(凋落)의 계절로 가고 있다는 증거라는 점입니다. 경제가 쇠퇴기에 접어들어 생산적 부문에 투자할 곳이 없어짐에 따라 돈이 주식 등으로 몰려 금융자본이 번창하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제노바, 네덜란드, 영국의 쇠퇴기에도 지금처럼 금융자본이 기승을 부린 바 있습니다.
섬뜩한 것은 그 다음 얘기입니다. 이같은 경제쇠퇴설에 대해 미국의 주류학자들은 현재의 호황을 증거로 콧방귀를 뀌고 있지만 제노바, 네덜란드, 영국 역시 현재의 미국처럼 패권 붕괴기에 위기가 계속되다가 갑자기 경제가 다시 살아나 상당기간 호황을 누리는 ‘좋은 시절(벨 에포크)’이 있었습니다. 죽기 전 모든 것을 불사르는, 일종의 황혼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역사에 의하면 일반적 통념과 달리 현재의 호황이야말로 미국경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인 셈입니다. 바로 이 점들 때문에, 세계경제사의 권위자들은 동아시아의 위기는 한낱 지나가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며, 시대적 대세는 중국 일본을 축으로 하는 동아시아로 세계경제의 패권이 넘어가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거시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현재를 분석하고 이에 대응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특히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라는 미국경제 모델의 추종을 조심해야 합니다. 역사에는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집조차 구하지 못한 설움 속에 로스앤젤레스의 밤 언덕에서 미국의 흥청거림을 바라보며, 자연과 역사의 섭리를 어떤 사회과학이론보다도 더 탁월하게 형상화한 우리의 옛 노래를 흥얼거려 봅니다.
‘달도 차면 기우나니, 차차차.’손 호 철
손호철(서강대 교수·정치학. 현 미국 UCLA 교환교수)
◇손호철교수의 미국 정치와 한미정치 비교 및 중남미 정치 등을 소재로 한 ‘LA리포트’는 앞으로 약 1년 동안 3주마다 목요일자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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