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감.모욕감.불쾌감.일행에 대한 미안한 마음...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낭패감을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김나리씨(27세,간호사)가 바로 이런 꼴을 당했다. 여름휴가차 사이판으로 떠나려다 영문도 모른채 출국금지를 당한 것.
△"못나간다 이유는 우리도 모른다"
지난 7월 19일 단체로 사이판 여행에 나선 김씨. 설레이는 마음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모든 준비를 끝내고 출국심사대에 여권을 내밀었더니 “컴퓨터에 당신은 출국금지자로 입력돼 있다”는 것이다.
▲출국을 금지당한 김씨의 항공권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하고 있는데 연락을 받고 달려온 법무부 직원 둘이 김씨의 양쪽팔을 잡고 끌고 가다시피 법무부 사무실로 데려갔다.
직원들은 김씨가 가지고 있는 여권은 분실 신고된 것이라며 분실 여권을 입수한 경위,분실여권을 가지고 출국하려고한 이유등을 마치 범죄인 추궁하듯 캐물었다.
김씨는 “여권은 내 것이며 잃어버린 적도 분실신고한 적도 없다”고 같은 말을 되풀이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김씨가 탑승하려고 했던 아시아나 항공측에서 나와“이와 유사한 경우가 가끔 있다”며 중재하고 김씨에게 어쨌든 오늘은 출국할 수 없으니 내일 외교통상부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김씨는 19일 출국을 할 수 없었고 20일 아침 일찍 외교통상부 여권과를 찾아갔다.
조사결과 김씨와 주민등록번호의 앞 여섯자리 즉 생년월일이 같고 이름이 같은 사람 중 한 명이 지난 98년 뉴욕에서 여권분실신고를 한 사실까지 확인됐다.
그러나 주민등록번호의 뒷 7자리가 다른 김씨의 여권이 어떤 경위로 분실처리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해 주지 않았다.
여권과측은 전산실의 실수가 있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권분실해제조치만을 해주었다.
△여권과 직원의 전산입력 착오 때문
▲김씨의 여권사증 19일 출국금지 표시 ▲ 20일 출발
김씨는 이 일로 서울을 하루 늦은 20일 출발해 3박4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 왔다.
그러나 여행사측은 김씨가 첫날 출발을 함께하지 못해 단체할인이 깨져 한명당 10만원씩의 손해가 났다며 다른 여행객 9명에게 총 90만원을 변상하라고 요구했다.
김씨는 예약했던 항공권, 호텔숙박비,단체요금할인액의 변상 등 약 140만원을 물어내야 하게됐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엄청난' 피해액을 떠안게 된 김씨는 억울한 마음에 고민하다가 26일 외교통상부 홈페이지(http://www.mofat.go.kr) 사이버포럼에 ‘너무나 황당하고 손해배상받고 싶은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위 내용의 글을 올렸다.
3일 후인 7월 29일. 외교통상부 여권과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부 직원의 전산입력 착오로 귀하에게 불편을 드린 점 죄송하다. 귀하와 생년월일과 이름이 동일한 사람의 여권분실신고 처리시 업무상 혼선으로 귀하의 여권이 분실신고 처리됐다. 불편을 끼쳐드려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요지의 글을 게시했다.
결국 김씨의 피해는 여권과가 밝힌 대로 ‘여권과 직원의 전산입력 착오’ 때문.
그러나 뭘 어떻게 착오를 일으켜는지 김씨의 피해를 어떻게 배상해줄 것인지,업무를 잘못처리한 직원을 어떻게 조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김씨는 “여권분실신고 처리를 할 때 어떻게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입력하는게 귀찮아 앞자리만 입력하는 바람에 생년월일이 같은 동명이인들이 몽땅 출국정지된 것 같다”며 “다행히 내 이름이 흔한 편이 아니길 망정이지 김철수, 이영희등 동명이인이 많은 경우였다면 수십명의 출국금지자가 저절로 생기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또 직원들끼리 주고 받는 말을 종합해 보면 전산실의 분실신고 담당직원은 평소에도 분실신고시 주민등록번호의 뒷 7자리를 입력하는게 귀찮아서 이름과 생년월일만 입력해온 것 같았다.
이에 대해선 이종칠 과장(외교통상부 여권과)도 당시 담당직원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만 확인하는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인정했다.
△억울한 출국금지 많이 있을 듯
김씨는 그렇다면 자신외에도 억울한 출국금지자가 수없이 있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김씨의 추정은 그대로 들어 맞았다.
김씨가 글을 올린 26일 외교통상부 홈페이지에는‘김나리씨와 동일한 일, 어제 저도 당했습니다’란 제목으로 A씨의 글이 올랐다.
A씨는 25일 일본으로 출국하려던 중 출국심사대에서 A씨의 여권이 지난 96년 12월 분실신고된 여권이라며 출국을 저지당했다.
물론 A씨는 여권을 분실한 적도,분실신고를 한 적도 없었다.
A씨는 출국심사대에서 김씨와 꼭같은 수모를 당하고 26일 외교통상부 여권과를 찾아갔다. 알아본 결과 자신과 생년월일이 같은 동명이인의 분실신고 처리 중 여권과 담당직원이 전산입력 오류를 범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A씨는 글에서 “여권과의 조그만 실수로 김나리씨와 저는 공항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라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구체적인 설명도 듣지 못하고 단지 분실 해제조치는 억울하다”라고 밝혔다.
한편 외교통상부는 A씨에 대해서도 김씨에게 띄운 것과 글자 한자 다르지 않은 답글을 올렸다.
이들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실수도 아닌 일로 금전 손해를 입게 됐고 출국금지를 당할 당시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김나리씨는 “당시 법무부 직원들이 마치 범죄자를 다루듯이 대해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했고 A씨는 “그날 공항에서 받았던 수모는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김씨의 말에 따르면 여권과는 지난달 31일과 이달 2일 두차례 전화통화로 ‘미안하다’며 보상을 받으려면 법적대응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종칠 여권과장은 “우리측의 실수는 인정하나 이같은 경우 정식보상을 해줄 수 있는 예산확보나 제도적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김씨는 “내 잘못도 아닌데 엄청난 피해액을 떠안게 됐다”며 “그런데 배상을 받으려면 엄청난 부담이 되는 법적 소송을 해야 한다”며 허탈한 심정을 드러냈다.
김나리씨는 “법적 대응을 하고 싶긴 하지만 소송비용, 시간 문제 때문에 엄두도 못내고 있다”며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종칠 여권과장은 자신이 부임한지 1년이 됐는데 이런 경우는 김씨와 A씨,딱 두건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주일도 안돼 같은 사건이 두번 발생했는데 이런 일이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어쨌든 이과장은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씨와 A씨, 또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희정/동아닷컴기자 huib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