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의 세상스크린]정직한 삶이 가장 편한 삶입니다

  • 입력 2000년 8월 21일 18시 51분


항상 그런것은 아니지만 저는 비교적 바쁜 편입니다. 더욱이 영화의 개봉 때문에 각종 인터뷰가 있을 때면 훨씬 더 바쁩니다. 하루에 장소를 바꿔가며 10개 정도의 각각 다른 약속에 나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약속 하나가 예상보다 길어지거나 차가 막힐 때면 도미노현상처럼 줄줄이 시간을 못지키게 됩니다.

▶ 도착시간 둘러대기

차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약속장소로 향하는데 왜 늦느냐며 기다리는 쪽에서 제 매니저 휴대전화로 짜증섞인 전화가 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10분 후면 도착한다”고 합니다. 사실 30분은 더 걸리는 거리인데도 말입니다. 우선 미안해서 일단 넘기자는 마음에서입니다.

10분 뒤에 또 전화가 옵니다. 우리는 요 앞이라며 금방 도착한다고 말합니다. 10분 뒤에 다시 전화가 옵니다. 우리는 요 앞이라고 말하고 10분 뒤에 도착합니다.

그냥 처음 전화 왔을 때 “꽤 늦어질 것 같은데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고 했다면 한 번만 미안할 일을 거짓말을 했기에 세 번을 미안해 해야 합니다.

▶ 엉겁결에 나이 속여…

저는 1966년생이지만 초등학교를 한해 일찍 입학하는 바람에 1965년생과 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또 대학1학년 때 영화배우가 되면서 좀 노숙해 보이려고 별 생각없이 1964년생이라고 말했던 것이 영화사의 자료가 되면서 영화계에서는 한동안 1964년생으로 통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세 개의 나이를 가지고 몇년을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진짜 나이를, 어떤 사람에게는 학교 나이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영화계 나이를 이야기하며 지냈습니다. 한번 거짓말을 하니 그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누굴 만나면 그 사람에게 제 나이를 몇살로 거짓말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당황해 했습니다.

출연료를 받기 위해 영화사에 주민등록등본을 내는 일이 곤혹스러웠고 해외촬영갈 때는 나이를 들키지 않으려 출국신고서를 공항 한쪽 구석에서 몰래 적은 적도 있습니다.

결국 저 자신이 너무 괴로워 주위사람들에게 어렵사리 이실직고했습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줬지만 가짜 나이로 친구가 됐던 분들은 선뜻 이해해주기 힘들었나 봅니다. 그 분들껜 아직도 미안합니다. 그러나 마음 하나만은 정말 편했습니다.

경박한 솔직함은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마음을 밝히고 살아가는 게 최선의 처세라는 것. 자기에게 곤란하고 불리한 정직은 큰 용기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된다는 사실. 설마 저 혼자만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진실을 뒤로 하고 살았던 순간들이 기억날 때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때를 지우개로 하얗게 지우고 싶습니다.

joonghoon@seromesof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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