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 블루’라고 일컫는 독특한 푸른빛의 타일로 장식된 ‘부 즐루드 문’을 지나면 코를 찌르는 이름 모를 향신료 냄새가 풍겨오는데, 여기서부터 바로 옛 시가지인 메디나다. 어두컴컴한 미로형 골목 사이로 빼곡하게 들어선 가게의 모습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뒤로 물린 것처럼 옛 모습 그대로다. 화려한 채색 도자기, 금속 공예품, 전통 문양을 넣어 정성껏 짠 카펫, 하나 하나 깎아 만든 목공예품들은 언뜻 보아도 예사롭지 않다.
◇장인정신 가득한 미로의 도시
지도도 없는 세계 제일의 미로를 자랑하는 메디나는 한번 찾아간 곳을 다시 찾기 어려운 지역이다. 필자 역시 3, 4일 동안은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메디나를 돌아다니다 통로만 나오면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잘 정리된 슈퍼마켓을 다니던 서구인들이 서울에 와서 남대문 시장통을 헤매며 무엇인가 찾으려 해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큰 미로이며 게다가 중세의 거리인 메디나를 홀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무리임에 틀림없다. 페스에서 100일을 묵는다 해도 북아프리카에서 제일 크다는 ‘카라윈 모스크’조차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메디나에서 사진 찍는 것은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 햇빛이 안 들어오는 어두운 환경의 골목이 우선 사진 찍기에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불편함 이외에,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더 어려웠다. 일부는 순순히 찍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힘든 육체 노동자들이거나 장인이어서 좁은 골목길에서 노새를 타고 고함을 치며 돌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건을 던져대는 사람도 있었다. 때문에 항상 아랍어로 먼저 인사하고 한참 동안이나 그들을 달래야만 했다. 그래서 이곳에는 메디나 관광만 전문으로 하는 가이드들이 이른바 ‘증’을 달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서 있다. 나처럼 혼자 메디나를 다니다 혼쭐나는 일이 많고 또한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들은 손님을 끌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가만 있어도 저절로 손님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였다.
◇가죽·금속 공예품 등 명성… 시가지 자체가 세계 최대의 미로
그렇게 며칠을 고생하던 차에 뜻밖에도 어린 소년이 내게 접근해 왔다. 야마니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년은 “나는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 등 5개 국어를 하는 가이드”라며 열변을 토했다. 나는 소년이 10대 초반 정도로 너무 어린 티가 나기에 그저 용돈 좀 벌려고 하는 줄 알고, “야, 장난치지 마”라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총기가 번뜩이고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소년은 보란듯이 내 앞에서 술술 5개국 말을 했다. 나 자신도 영어 불어 스페인어의 기본 회화는 알아듣지만, 정말로 5개국어를 줄줄 하는 소년은 언어의 신동을 연상시켰다.
야마니는 비공식 가이드였다. 소년은 “그래서 반값에 해주지 않느냐, 생활 때문에 일을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여느 관광지의 어린아이들이나 기본 레퍼토리로 하는 “어머니는 아프고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등의 불우한 가정사와 자신이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형편이라는 이야기를 빼먹지 않았다. 설령 그의 말이 거짓말일지언정 오히려 도움을 받은 것은 나였음이 분명하다.
메디나에서는 가죽 무두질, 염색하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는데 ‘테너리 작업장’이 바로 그곳이다. 멀리서 이 작업장을 바라보았을 땐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형형색색의 염색통들이 페스를 수놓는 듯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러나 작업장 가까이 다가서자 그런 낭만적인 느낌은 금새 지워지고 말았다. 다가가기가 곤란할 정도로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냄새를 참고 열심히 일하는 장인들이 신기할 정도였다. 고약한 냄새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염색공장에서 일하는 장인들의 반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진을 찍기 어려워하는 나를 위해 야마니는 모로코 말로 뭐라뭐라고 그들을 설득해 사진을 찍도록 만들어 주었고, 저건 무슨 작업이라는 등 자세한 설명을 해주며 메디나의 구석구석을 정성을 다해 가이드해주었다. 누구 못지않은 명 가이드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난 페스를 떠올리면 야마니와 함께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가슴 아프게 했던 한 소년을 잊지 못한다. 12세도 안 돼 보이는 어린 그는 테너리 작업장에서 독한 염색물이 줄줄 흐르는 가죽 더미를 작은 어깨로 지탱하며 힘겹게 운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하자 간신히 어깨에 실었을 만큼 무거운 가죽더미를 내 앞에 내던지며 그는 항의했다. 자기 자신의 처지가 동물원의 원숭이냐는 듯 강렬히 항의하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가슴 아프다.
미안한 마음에 내가 얼마간의 돈(자기에게는 한 달 일당에 가까운 돈이었다)을 쥐어주니 소년은 돈을 내팽개치고 삶의 분노를 표출해내었다. 자존심을 꿋꿋이 지키는 그 모습에 오히려 내 고개가 숙여졌다. 반대의 입장이 되어 내가 그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의 카메라에 찍혀야 한다면 정말 불쾌했을 것이고 그나마 작은 돈으로 위로당한다는 사실에 더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돈과 나의 사죄를 뿌리치는 그 아이와 말이 통하지 않고, 미안한 마음을 전할 수 없어 며칠씩 괴로워했다.
그렇다고 메디나에 슬픈 기억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좁은 골목에서 요리조리 나귀를 타고 다니며 짐을 싣고 다니는 사람은 여느 물건보다 더 재미있는 눈요깃감이다. 이슬람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커다란 카펫을 조그마한 나귀 등에 잡아매고 타박타박 메디나의 좁은 거리를 누비는 모습은 이솝우화를 떠올리게 한다. 만약 저 할아버지의 손자라도 같이 나귀에 타고 가게 된다면 진짜 우화의 이야기처럼 되지나 않을까 싶어 웃음이 절로 난다.
페스가 더욱 정겹게 느껴지는 까닭은 자신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가려는 그들의 노력 때문이 아닐까. 이곳에서는 기계를 이용해 손쉽게 많은 양의 공예품을 만들어 내려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그 이전부터 내려온 방법을 이어가고 거기에서 최고의 ‘장이’가 되려 할 뿐이다. 이것이 곧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쉬는 페스를 있게 한 힘이며 여전히 그들의 정성어린 수공예품을 저잣거리에서 반갑게 만나볼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할 게다.
전화식(international press 사진작가)magenta@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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