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Flash)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동영상 애니메이션들이 인터넷을 떠돌며 네티즌들에게 미소를 전달한다.
업무용으로 쓰이던 시청각 프리젠테이션이 인문학 관련 학술대회에서도 딱딱한 활자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2차원의 평면만을 빼곡히 채우던 단어들이 하이퍼텍스트로 연결돼 전 세계 네트워크를 종횡무진한다.
지금 우리는 ‘말’의 시대를 지나 ‘글’의 시대를 거쳐 ‘이미지’의 시대를 살아간다. 글의 시대에 정보저장과 전달의 효율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억압됐던 ‘형상성’은 이미지의 시대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언어를 통해서만 세계를 개념화하고 사고를 논리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언어의 기술적 한계를 인간 사고의 특성으로 알았던 오해가 풀린 것이다.
시각 정보를 문자기호화해서 저장 전달하고 다시 문자를 시각 이미지로 재생하는 과정은 의사소통과 사고의 과정에서 점차 생략된다. 시각 이미지는 문자와 함께 정보전달의 효율성에 따라 적절히 배합되며 공존한다. 다음 단계는 이미지의 가상현실화, 그 다음은 가상현실의 물질적 구현일지 모른다.
정보의 정확한 기억, 기표(記標)와 기의(記意)의 명료한 연결, 논리의 선형적 전개. 이런 문자시대의 미덕은 잊혀져 간다. 정보는 데이터베이스에 얼마든지 쌓여 있고 기표는 다의적 함축성을 가지며 논리전개의 길은 하이퍼텍스트를 통해 무한히 열려 있다.
물론 간단명료함은 의사전달의 필수요건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조금만 둘러봐도 문자시대 의사전달의 경제성은 언어로부터 ‘다의성’을 추방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한자어 ‘離(리)’는 ‘헤어지다’ ‘떨어지다’의 뜻과 ‘둘이 함께 있다’ ‘붙다’의 뜻을 동시에 갖는다. ‘시간’이란 개념은 ‘길다’ ‘짧다’ ‘지루하다’ ‘쏜살같다’ 등의 모순된 이미지들을 안고 돌아다닌다. 언어가 살아있는 역사의 생동감을 담는 한 다의성은 언어의 운명이다.
이런 다의성으로도 세상의 미묘함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를 한탄하다가 ‘空(공)’ 또는 ‘無(무)’라는 극단적 다의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예 아무 것도 지칭하지 않는 개념으로 온 우주를 담으려는 역설적 발상이었다.
하이퍼텍스트의 기법은 이런 언어의 다의성과 문자시대의 선형적 사고가 만나 만들어 낸 타협안이다.
‘직지심경(直指心經)’으로부터 600여년, 구텐베르크로부터 약 550년. 문자의 탄생 후 금속활자의 발명이래 인간이 축적해 온 문자시대의 풍성한 비전(秘傳)은 형상성과 다의성을 회복하며 다양한 감각을 이용한 표현방식과 결합한다. 하지만 이 종이 위의 조그마한 공간에 ‘문화’를 담으려 한다면 정보 전달수단 중 제1순위는 역시 한 줌의 문자다. 적어도 당분간은.
<김형찬기자>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