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0일 개봉하는 프랑스 애니메이션 <키리쿠와 마녀>는 참 독특한 작품이다. 전례없이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개봉해 각축을 벌이는 올 12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인랑> <포케몬> <치킨 런> 등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둔 막강한 작품들이다. 물론 <키리쿠와 마녀> 역시 프랑스에서 98년 12월 개봉해 현재도 상영을 하며 500만이란 관객을 동원한 흥행 대작이다. 프랑스 개봉 때는 디즈니와 <뮬란>과 드림웍스의 <이집프 왕자>를 관객동원에서 압도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프랑스에서의 상황. 유난히 디즈니를 비롯한 미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선호도가 강하고, 특히 문화개방으로 본격적으로 상륙하는 일본 애니메이션들 사이에서 <키리쿠와 마녀>는 낯설기만 하다. 감독 미셀 오셀로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나 아드만 필름과 비교하면 국내 영화 팬들에게는 생경한 이름.
생경함은 애니메이션의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이 작품은 우리와 친숙한 애니메이션의 소재와는 거리가 먼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프리카 하면 얼른 디즈니의 <라이온 킹>이 떠오르지만, <키리쿠와 마녀>와 비교하면 동물원의 야외 사파리 수준이다. 이 작품은 서구적인 시각으로 윤색된 풍광이 아니라 장식에서 색감까지 완벽하게 아프리카 흙냄새가 물씬나는 영상으로 꾸며져 있다. 화려한 액션이나 신나는 뮤지컬이 등장하지도 않고, 관객을 빨아들이는 '슈퍼 히어로'도 없다. 물론 피카츄같은 앙징스러운 캐릭터는 더더욱 없다.
캐릭터는 초콜릿 빛깔의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 원주민이 전부이다. 하얀 피부와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듯한 큰 눈, 녹색과 빨강등 화려한 색채로 치장한 머리 등 일본 애니 캐릭터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본 적이 없는 낯선 모습들이다.
이야기는 오두막 안에 있는 한 임신부의 뱃속에서 꼬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이름을 '키리쿠'라고 밝힌 아이는 스스로 탯줄을 끊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마을의 다른 남자들처럼 마녀 카라바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키리쿠는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카라바가 있는 곳으로 간다. 그런데 키리쿠는 마녀를 만나러 가는 여정에서 한 현자로부터 카라바가 왜 평범한 여인에서 마녀로 변신했는지 사연을 듣게 되는데….
아프리카의 전래 동화에서 이야기를 딴 <키리쿠와 마녀>는 감독 미셀 오셀로가 5년 간에 걸쳐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세명의 발명가> <가련한 꼽추의 전설> 등의 작품으로 단편 애니메이션계에서 명성을 떨친 미셀 오셀로는 자신의 유년 시절 기억에 착안해 첫 장편으로 <키리쿠와 마녀>를 제작했다.
<키리쿠와 마녀>에서 가장 먼저 사로잡는 것은 눈과 귀를 통해 전해오는 이국적인 풍광이다. 이 작품은 아프리카라는 배경이 지닌 원시성과 자연의 싱그러움, 그 속에 배어있는 원초적 생명력을 절묘하게 살리고 있다. 흔히 '아프리카'를 다룰 때 원시성을 야만성과 뒤섞는데, 감독 미셀 오셀로는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원초적 생동감 속에 숨어있는 화사한 미의 세계를 세련되게 그리고 있다. 황토색 마을과 에메럴드빛 숲, 초록빛 강물 등 오셀로 감독이 되살린 영상은 프랑스의 화가 르 두아니에 루소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오셀로는 인터뷰에서 "작품을 구상할 때 루소의 그림을 많이 참고했다"고 말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의상, 가면, 동식물 등 세세한 사물 역시 모두 치밀한 고증을 거쳐 재현한 것들. 아프리카의 향취를 되살리려는 감독의 노력은 영상에만 그치지 않았다. 작품에서 캐릭터의 목소리 연기는 모두 아프리카 세네갈 출신의 배우들이 맡았다. 아프리카 액센트가 밴 이들의 대사는 색다른 맛을 풍긴다. 음악 역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아프리카 출신 음악가 우쑤 느드르가 맡아 전통 아프리카 악기만을 이용해 원시적인 선율을 들려주고 있다.
아이들도 볼 수 있는 가족영화이지만 벌거벗고 등장하는 키리쿠나 젓가슴을 그대로 다 드러낸 마녀의 모습도 이채롭다.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 개봉 당시 '노출'이 문제가 됐지만 감독이 수정을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하긴 아프리카인의 생생한 삶을 그린다면서 기독교적 윤리의 잣대로 캐릭터에게 브래지어를 그려넣는 다는 것은 문화적 오만일수도 있다. 노출이 조금 심하긴 하지만, 그것은 '음습한 사고'를 가진 어른들에게나 문제일 뿐, 함께 동반한 아이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문화에 대한 자연스런 학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키리쿠와 마녀>가 돋보이는 것은 작품을 관통하는 휴머니즘이다. '승자만이 모든 것을 가진다'는 원칙은 그동안 애니메이션을 지배해온 정서이다. 슈퍼 히어로가 등장하는 대다수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그렇고, 가족주의를 표방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나쁜 마녀나 사자, 못된 신부 등은 모두 마지막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주인공은 항상 해피앤딩의 달콤함을 만끽한다. 하지만 <키리쿠와 마녀>에서는 그런 통쾌한 승리가 없다. 마녀와 한판 대결을 벌인 키리쿠는 최후에 결국 마녀를 용서한다. 따지고 보면 그녀 역시 이기심과 편견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었던 것. 화해와 용서로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키리쿠의 모습은 사뭇 종교적이다. 겉으로 드러나든 아니면 안에 잠재적으로 숨어있든 애니메이션의 폭력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요즘, 그래서 이 작품은 아이들과 함께 볼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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