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리쿠와 마녀>는 제작기간이 5년이나 걸렸는데, 원래 이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특별히 길어진 이유가 있는지….
정확히는 2년 5개월 정도가 걸렸다. 나머지 시간은 부족한 제작비를 구하러 다니는데 소모됐다. <키리쿠와 마녀>는 나로서는 첫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다. 나나 스태프 모두 이런 큰 작품을 해본 경험이 없었고, 5개국이 제작에 참여하는 시스템도 전례가 없었다. 모든 과정이 처음 겪는 것이라서 더 시간이 걸렸다.
- <키리쿠와 마녀>는 이례적으로 아프리카를 무대로 했다. 소재는 어디서 구했는가?
평소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부분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메모를 해둔다.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 제의를 받고 독서노트에서 소재를 고르다 아프리카 전래 동화를 읽고 쓴 메모를 발견했다. 아이가 스스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초반부가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아프리카를 제대로 다룬 작품이 별로 없어 내가 보여주고 싶었다.
- 초반부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키리쿠가 태어나는 장면은 마치 석가모니의 탄생과 비슷한 종교적인 장면이었다. 의도적인 연출인가?
듣고 보니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누구는 이를 보고 동정녀 마리아가 아이를 낳는 장면과 비슷하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소크라테스나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마다 가진 경험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그런 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휴먼 스토리이다. 나는 키리쿠를 전지전능한 '슈퍼-히어로'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절망하고, 망설이는 등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고 싶었다.
- 무엇보다 영상이 이국적인 매력을 더해주는데, 누구는 당신의 그림을 보고 '르 두아니에 루소'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고 한다. 영상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무엇인가?
처음 이 작품을 준비할 때 아프리카의 그림에 대한 자료가 없어 고생을 했다. 이 때 루소의 그림을 보면서 많은 참고를 했다. 루소의 그림은 순수하고 가식이 없어 마치 흑인 예술을 보는 느낌을 준다. 배경을 담당한 사람에게는 고대 이집트 벽화의 분위기가 나도록 심플한 느낌으로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 영상 못지않게 음악도 인상적인데, 음악을 맡은 우쓰 느드르에게 구체적인 주문을 했는가? 아니면 아프리카 출신인 그에게 재량권을 주었는가?
음악감독에게 전혀 재량권을 주지 않았다(웃음). 나는 욕심이 많아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지시를 내렸다. 아프리카 출신인 우쓰 느드르는 신시사이저 같은 현대악기를 쓰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전통악기를 쓰자고 고집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노래도 전문 가수들이 아니라 목소리 연기를 담당한 성우나 아이들이 부르도록 해서 자연스럽고 순수한 느낌을 살리는데 주력했다.
- 대개의 애니메이션은 선과 악이 분명하고, 항상 악은 마지막에 멸망한다. 하지만 당신의 작품에서는 마지막에 마녀를 용서해주고 그녀와 결혼하는 키리쿠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는 악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쉽게 말해 '왜 마녀는 사악해졌는가'이다. 카라바가 마녀가 된 과정을 보면 그녀에게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내가 작품에서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불의를 인정하지 않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선입관과 편견에 의해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런 작은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다.
- 다음 작품도 외국의 문화를 소재로 한 것인가 ?
<키리쿠와 마녀>에서 아프리카를 소재로 한 것은 그들이 서구문화에 밀려 약자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서구의 문화보다는 그들에 밀려 빛을 잃은 제3세계의 문화에 관심이 많다. 다음에는 이슬람문화의 이야기를 다룰 계획이다. 아직 구체적인 내용은 만들지 않았지만, 프랑스에서 불법이민자로 박해받고 천대받는 아랍인들의 삶을 그리려고 한다. 제작기간은 약 3년 정도 예상하고 있는데, 꽤 민감한 소재가 될 것이다.
- 한국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팬이 많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본 애니메이션은 아동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타깃을 상대로 한다. 그만큼 주제와 소재가 다양하다. 하지만 프랑스 TV에서 하는 시리즈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열심히 하고 노하우가 축적된 것도 보이지만, 모든 스튜디오들이 비슷한 캐릭터를 그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느 작품에서나 큰 눈에 동그란 얼굴등 캐릭터의 모습이 비슷하다. 나는 TV 시리즈에서 일본의 얼굴이나 일본인의 삶이 배어있는 캐릭터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스튜디오는 수준이 꽤 높은 것 같다.
- 그러면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에 과연 애니메이션이 존재하느냐(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직 대부분 하청이 아니냐? 물론 기반이 탄탄하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 곧 나올 것이라 기대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은행가들이 인식을 새롭게 하고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히로시마 페스티벌에서 <아빠와 나> <존재> 등 한국의 젊은 작가 작품을 봤는데, 텔레비전 등에서 방영하기는 곤란한 내용이었지만 예술적인 감각이 돋보였다. 다만 두 편 모두 너무 어둡고 비극적인 세계관이 엿보여 충격적이었다. 젊은 작가들임에서도 미래에 대한 시각이 너무 비관적이어서 마치 예전 폴란드 영화를 볼 때 느꼈던 어두움을 연상케 했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