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의 원작은 4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일본의 인기만화제작그룹 '클램프'가 발표한 15권 짜리 동명의 만화이다. 클램프는 일본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고정팬을 가진 만화가 그룹. 90년 <성전>으로 데뷔한 이들은
애니메이션 <엑스>가 국내 팬들에게 인기 높았던 또다른 이유는 음악을 맡은 그룹 'X-JAPAN' 때문이다. 일본 대중문화가 금기시되던 시절에도 국내에 열성 마니아가 있었던 'X-JAPAN'은 어떤 일본 가수보다 확실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밴드이다. 이들은 그룹명과 같은 애니메이션 <엑스>의 음악을 맡으면서 개봉 전부터 많은 화제를 뿌렸다. 특히 애니메이션 <엑스>의 캐릭터가 그대로 등장하는 그들의 30분짜리 뮤직 비디오 클립은 '더블 엑스'라는 애칭으로 일본 음악팬과 애니메이션 팬 양쪽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엑스>의 감독 린타로는 데자키 오사무, 미야자키 하야오, 다카하다 이사오와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의 2세대 감독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TV 시리즈 <우주선장 하록>과 극장판 <은하철도 999>의 감독으로 이름을 알려져 있다. 린타로는 데자키 오사무와 함께 일본 만화의 아버지라는 데즈카 오사무의 문하생이다. 애니메이션은 '도에이 동화'에서 시작했지만 데즈카 오사무의 눈에 띠어 데즈카의 '무시 프로덕션'에서 활동했다.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불릴 정도로 시각적인 양식미를 연출하는데 탁월한 역량을 갖고 있다.
연출적으로는 스승 데즈카 오사무의 영향을 받아 리미티드 애니메메이션의 특징을 한껏 살린 과감한 장면 생략과 극단적인 클로즈업, 엇박자의 편집으로 작품의 극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기법을 즐겨 사용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나 다카하다 이사오가 자신들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장편에 치중하는 것과는 달리 TV 시리즈나 OVA, 극장용 장편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점도 특색이다.
원작, 음악, 연출에서 이처럼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들이 모인 <엑스>는 일방적인 격찬보다는 논란과 화제가 더 많았던 작품이다. 내용은 클램프의 다른 작품인 <도쿄 바빌론>이나 <성전>처럼 일본의 전통적인 설화와 서구의 신화, 힌두교의 전설 등이 믹스된 '환타지 문학' 형식을 띠고 있다.
지구를 구해야할 운명을 타고 난 소년 카무이. 그에겐 두가지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는 '천룡'으로서 인류를 구하는 집단의 리더이고, 또 하나는 지구를 파괴하기만 하는 인류를 멸망시키고 자연과그 밖의 생명체를 살리려는 '지룡'의 리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지구의 운명이 좌우되는 엄청난 책임에 그는 따뜻한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사람들에게 차갑게 대한다. 그런 그를 아끼는 소꼽친구 리아와 그녀의 오빠 후마.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 인류를 구하는 '천룡'을 택하지만 그의 운명은 너무나 가혹해서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게된다. 그것은 바로 후마가 자신의 쌍동이별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 '천룡'을 택한 카무이 대신 '지룡'의 자리를 차지한 후마. 서로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두 사람은 결국 한 명이 죽어야만하는 비참한 결말을 낳게되고, 후마는 카무이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그 죽음을 받아들인다.
클램프의 원작은 많은 등장인물과 다양한 갈등관계, 복잡한 복선으로 구성된 큰 스케일을 갖고 있지만, 린타로 감독은 98분의 상영시간 속에 원작을 완전히 해체해 자신의 미학적 기준에 맞춰 재구성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클램프의 만화의 줄거리에 익숙했던 관객들에게는 이야기가 제대로 펼쳐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결말이 맺어진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린타로는 등장 인물 개개인의 감성적인 포인트만 살리고 줄거리는 과감하게 생략했다. 대신 그가 신경을 쓴 것은 원작이 갖고 있는 묵시록적인 분위기. 그는 카무이와 후마의 대립을 섬세한 심리묘사 보다는 현란한 시각적 표현으로 영상화했다. 작품의 후반부에 일본의 번영을 상징하는 거대도시 도쿄가 무너지면서 펼쳐지는 대결은 린타로가 원없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영상 전개를 보여준다.
하지만 흠잡을데 없이 꼼꼼한 영상과 달리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엉성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화계의 대표적인 비주얼리스트 리들리 스코트가 종종 '그림은 있는데 드라마는 없다'는 비판을 받는 것처럼, 린타로 역시 시각적인 양식미에 비해 이야기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는 <엑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클램프의 원작을 재해석해 영상으로 구현하는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그 속에서 린타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파괴 미학의 극치'라고 격찬을 받는 <엑스>의 마지막 장면이지만 그속에 린타로가 담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 일부는 세기말적인 시대관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클램프의 원작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린타로가 이처럼 작가로서 그만의 세계관을 표출하는데 소극적인 것은 자신의 기획 보다 주로 남의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온 그의 작업 형태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있다. 또 시각적인 양식미를 중시하는 취향 때문에 특정한 메시지나 어떤 주장을 강조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이런 모습때문에 그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작가 보다는 테크닉 뛰어난 기술자'라고 혹평을 하기도 한다.
취향과 시각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엑스>는 애니메이션이 시각적으로 얼마나 화려해질 수 있는지 그 한계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그런 영상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대가도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접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제작 96년 상영시간 98분. 수입 스타맥스 비디오(02-3430-5353)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