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억 이슬람과의 대화]증오의 겨울속 희망의 봄 준비

  • 입력 2001년 1월 7일 18시 02분


이스라엘 요르단강 서안의 작은 도시 벳잘라는 온통 잿빛이었다.

베들레헴 서쪽의 경사지에 있는 이곳은 원래는 도시 전체가 올리브나무에 둘러싸인 풍광이 아름다운 여름 휴양지였다. 성지 베들레헴을 찾은 순례객들이 즐겨 이곳에서 묵어가곤 했다. 적어도 지난해 9월 28일까지는.

그날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리쿠드당 당수가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인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했다. 이날 오후 벳잘라에서 흥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위가 벌어졌고, 감정이 격해진 청년들이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라다 보이는 유대인 정착촌 질로를 향해 권총을 쏘아댔다. 바로 이 총격이 벳잘라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질로의 이스라엘군 초소 3곳에서 벳잘라를 향해 보복 포격과 기관총 사격, 헬기의 로켓포 공격이 쏟아졌다. 벳잘라와 질로의 거리는 불과 1㎞. 이 공격으로 독일인 의사 해리 피셔가 사망하고 30여명이 다쳤으며 주택 300여채와 차량 40대가 부서졌다.

라지 자이단 벳잘라 시장(56)은 “피셔씨는 25년 전 벳잘라 출신의 팔레스타인 여성과 결혼한 뒤 이 곳에 정착해 우리를 위해 봉사활동을 해왔다”며 “그날도 부상한 여성을 돌보다 변을 당했다”고 안타까워했다.

 13억 이슬람과의 대화
- 증오의 겨울속 희망의 봄 준비
- 긴장의 예루살렘에 화해 물결

▼이-팔 각 20가구씩 공존학교 운영 화해 실천▼

경사지 윗부분 주택들은 이스라엘 군 초소에 많이 노출된 탓인지 피해가 극심했다. 5가구가 함께 살고 있었다는 언덕 위의 이층집은 헬기의 로켓포 공격으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다. 집에 올라가 부서진 외벽을 통해 질로 쪽을 바라보니 이스라엘 군 초소가 한눈에 들어왔다.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민족이 어떻게 수십년 동안 마주보며 마을을 일구고 살 수 있었을까.

벳잘라 인근 데이셔 난민촌은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길에다 버린 하수 때문에 좁디좁은 길이 질척거렸다. 1만여명이 수용된 이 난민촌의 다닥다닥 붙은 가건물의 두 세평 남짓한 방 하나에 4명 이상이 수용돼 있었다. 난민촌 관리인 마흐무드 아베드라브(34)는 “난민촌 사람들은 유엔 구호품으로는 부족해 이스라엘 지역으로 나가 잡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왔는데 유혈사태로 출입이 봉쇄돼 큰 일”이라고 걱정했다.

난민촌의 벽은 유혈사태로 숨진 어린이들의 사진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진창길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여기서 자라난 아이들의 가슴속에 증오 말고 자랄 것이 또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도시 벳잘라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받아 완파된 팔레스타인인 거주 주택. 부서진 외벽 사이로 두 달 가까이 벳잘라와 총격전을 벌인 유대인 정착촌 질로(오른쪽 위)의 모습이 보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할 지역을 오가며 취재하는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은 과연 이들의 화해는 가능할까 하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어린이 희생자가 많이 나온 데 대해서도 양쪽의 말이 180도 달랐다. 유대 지식인들은 “팔레스타인측이 세계 여론의 동정을 얻기 위해 조직적으로 어린이들을 총알받이로 쓰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반면 한나 나세르 베들레헴 시장은 “자식이 죽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며 “죽음이 뭔지 모르는 어린이들이 친구들과 어울리다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총질에 변을 당하는 것”이라며 흥분했다.

하지만 증오와 반목의 겨울 속에서 조용히 봄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스라엘 중부의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의 중간쯤 되는 곳에 ‘네베샬롬’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평화 마을’이라는 뜻의 네베샬롬에는 72년 브루노 후샤르 부부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공동체 건설을 기치로 첫 삽을 뜬 이후 지금은 유대인 20가구와 팔레스타인인 20가구가 독자의 학교를 운영하며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다.

기자가 찾아간 지난해 12월 17일 네베샬롬에서는 이슬람의 성월(聖月) 라마단과 유대교의 명절 하누카, 기독교의 크리스마스를 이슬람교도와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함께 축하하기 위한 모임 준비가 한창이었다. 마을 대소사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동수로 구성된 마을 협의체가 결정한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학급에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교사가 각각 1명씩 배치돼 있다. 교장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출신이 각각 있다.

▼예루살렘 대학생 평화촉구 '라지'운동 확산▼

이런 양분 체제가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유대인 영어 교사 보브 마크(43)는 “불편하더라도 양쪽의 이익을 모두 대변하기 위해선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인 압데살람 나자르(48)는 “유혈사태 이후 이 곳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사이에도 격론이 벌어졌다”면서 “그러나 서로가 상대방의 존재를 진심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미움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 팔레스타인인 디아나 리젝(44·여)은 “네베샬롬에 살기를 희망하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가정이 늘고 있지만 더 이상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며 “초등학생의 90%가 외부에서 오는 아이일 정도로 네베샬롬의 이념이 호응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존을 기치로 내건 네베샬롬(평화마을)의 유치원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이 함께 뛰놀고 있다. 네베샬롬의 성공은 갈등과 반목으로 얼룩진 두 민족 사이에 한줄기 희망의 빛을 던져주고 있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의 화해를 촉구하는 ‘라지’ 운동도 예루살렘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라지’는 ‘평화를 원한다’는 뜻의 히브리어. 라지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착민 사이에 대화를 주선하고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아랍어 강좌를 실시하기도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부 관계자와 면담, 평화를 촉구하기도 한다.라지 운동에 열심인 히브리대 여학생 루브나 마훌(20)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이 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기억하는 날 들 가운데 단 하루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날이 없다”며 “결혼해서 낳을 자식들까지 그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다”고 잔잔하지만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꿈을 펼쳤다.

phark@donga.com

▼한나 나세르 베들레헴 시장-"팔人은 공정한 게임 원해"▼

20세기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앞둔 지난해 12월 16일 저녁,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광장에서 한나 나세르 베들레헴 시장(62)을 만났다.

나세르 시장은 팔레스타인인이지만 이례적으로 기독교 신자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치하의 요르단강 서안에 속해 있는 베들레헴이 서방 기독교권에 갖는 의미를 간파한 야세르 아라파트 자치정부 수반의 포석이다. 아라파트 수반의 측근으로 알려진 그는 인터뷰 중 아라파트 수반을 ‘진지하고 용감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웠다.

―예수 탄생 2000년을 앞두고 베들레헴에 축복 대신 긴장이 흘러 안타깝다.

“이스라엘이 평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다. 군 장성 출신인 이스라엘 정치 지도자들은 군사 마인드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 모든 사태는 아리엘 샤론 리쿠드당 당수가 알 아크사 사원을 찾아가 도발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측은 샤론 당수가 알 아크사 사원을 지나간 것이며 자신들의 성지인 성전산에 참배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거짓말이다. 샤론이 알 아크사 사원을 찾기 이틀 전 아라파트 수반이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에게 ‘평화를 생각한다면 샤론이 성전산을 찾아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도 샤론은 3000명의 경찰에 둘러싸여 위력 시위를 벌이며 노골적으로 이슬람 성지를 유린했다.”

―그래도 평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이다. 지금 평화 협상을 타결하지 못하면 늦을 것이다. 다만 평화를 원한다고 총으로 강요된 평화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미국 등 국제사회의 중재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미국은 휴머니즘을 가장한 채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다. 유럽은 내부문제에 얽매여 중재할 능력이 없고 일본은 돈만 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보다 공정한 중재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대결하는 것은 역부족 아닌가.

“이스라엘은 핵무기로 무장했지만 우리는 잃을 게 없으니 두려울 게 없다. 잃을 것이라곤 목숨밖에 없다.”

<베들레헴〓박제균기자>phark@donga.com

▼취재기-아름다운 해변…살벌한 검색…▼

텔아비브의 겨울 해변은 아름다웠다. 금빛 햇살을 받은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수영복 차림의 남녀들이 해변에서 조깅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훈련받은 개와 폭발물 탐지기까지 동원해 출입자를 검색하는 바로 옆 미국대사관의 모습은 살벌하기만 하다. 이런 부조화의 풍경이 일상처럼 이어지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지난해 12월 16일 낮. 예루살렘의 감람산을 찾은 기자가 차에서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팔레스타인 행상이 다가섰다. 예루살렘의 전경(全景)을 찍은 대형 사진을 사라는 것이었다. 함께 갔던 한국인 유학생 가이드가 거절의 뜻을 표시하자 행상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알아듣지 못할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팔레스타인인 7, 8명이 험악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쌌다. 겨우 차로 몸을 피했지만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들이 화를 낸 것은 가이드가 유대 언어인 히브리어를 썼기 때문. 행상이 뱉은 말은 아랍어로 ‘쓰레기’라는 뜻이었다.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해 처음 현지인으로부터 들은 충고는 “가방이나 짐을 함부로 두고 다니지 말라”는 것. 도둑 때문이 아니다. 주인 없는 가방이나 짐처럼 보이는 물건이 발견되면 폭발물 처리반이 출동해 밀폐용기 안에서 터뜨려 버린다. 이스라엘 주재 한국대사관의 조구래(趙九來)서기관은 “텔아비브나 예루살렘의 대형 쇼핑몰이나 시외버스 정류장 등은 대사관 직원들의 기피 장소”라고 전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스라엘 당국의 검색은 도가 지나칠 정도. 텔아비브로 가기 위해 경유지인 홍콩 공항의 이스라엘 항공사 발권 카운터 앞에 선 기자는 이스라엘 보안요원으로부터 “기자라면서 왜 프레스 카드가 없느냐” “네가 쓴 기사를 내놓아라”는 등의 질문에 답하느라 30분 동안 곤욕을 치렀다. 이스라엘을 떠나는 날에도 텔아비브 공항에 대사관 직원이 배웅나와 신원을 보증했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서울행 비행기에서 이스라엘 신문 하아레츠지 영문판을 펼치니 1면에 이런 기사가 있었다. “무기를 지닌 실험 요원 15명이 이스라엘 주요기관의 검색을 무사히 통과했다. 이스라엘은 검색이 너무 약하다.”

<박제균기자>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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