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된 부분 | ||
항목(괄호 안은 역사적 사실) | 최초 신청본 | 수정 합격본 |
▽임나일본부 (4세기 후반 일본 야마토 왜군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해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했으며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설.‘일본 서기’에서는 자주 언급되지만 한국 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아 존재 여부가 의심됨) | 야마토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라)라는 곳에 세력권을 가졌다. 나중에 일본의 역사서에서 이곳에 설치된 일본의 거점은 임나일본부로 불려졌다. | 야마토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라)라는 지역에 거점을 구축한 것으로 생각된다. |
▽강화도사건 및 한일보호조약 (1875년 일본 군함의 불법적인 강화도 침입으로 발생한 조선군과 일본군의 충돌사건.일본은 오히려 침입을 한국의 책임으로 몰아 1876년 대일문호개방을 골자로 하는 보호조약 체결) | 한편 이에 앞서 일본군함이 조선의 강화도 부근에서 조선군과 교전한 사건(강화도사건, 1875년)을 계기로 일본은 재차 조선에 국교수립을 강하게 요구했다. 청조가 조선에 일본과의 국교교섭의 개시를 허가한 결과, 1876년 일조수호조규(條規)가 체결됐다. 이로써 오랜 현안이었던 조선과의 국교문제도 해결됐다. | 한편 이에 앞서 일본군함이 조선의 강화도에서 측량하는 등 시위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군대와 교전한 사건(강화도 사건,1875년)을 계기로 일본은 재차 조선에 국교수립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그결과 1876년 일조수호조규가 맺어졌다. 이는 조선측에 불평등한 조약이었으나 오랜 현안이었던 조선과의 국교가 수립됐다. |
▽조선반도와 일본의 안전보장 | 배후지가 없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곤란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반도는 일본에 끊임없이 들이대고 있는 흉기가 될 수밖에 없는 위치관계에 있었다. | 배후지가 없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곤란해진다고 생각했다. |
▽한일합방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에 들어간 일본이 1910년 강압적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해 식민화 침략을 완성한 사건.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지배는 무단통치(1910∼1919), 문화정치(1919∼1931), 전시동원(1931∼1945) 등 3기로 구분) | 일―러 전쟁후 일본은 한국에 통감부를 두고 지배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1910년(메이지 43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였다(한국병합). 이것은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려는 정책으로서 구미열강의 지지를 받았다. 한국병합은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는 데 필요하였으나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반드시 이익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실행한 당시로서는 국제관계의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한국 국내에는 당연히 병합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어, 반대파의 일부로부터는 격렬한 저항도 일어났다. | 1910년(메이지 43년) 일본은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내의 반대를 누르고 병합을 단행했다(한국병합).한국국내에서는 일부에서 병합을 수용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으나,민족의 독립상실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나 그후에도 독립회복의 운동이 끈질기게 이뤄졌다.한국병합후 일본은 식민지화한 조선에 철도 관개시설을 정비하는 등의 개발을 하고, 토지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 토지조사 사업에 의해 경작지에서 쫓겨난 농민도 적지 않았고, 또한 일본어교육 등 동화정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강화하였다. |
▽3.1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수천명의 지식인과 학생 등이 모인 가운데 독립 선포를 했으며 이후 조선 전역과 만주 미주 일본 등지로 독립선언운동 확산. 전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 | 한편 조선에서는 1919년 3월 1일,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3.1독립운동). | 조선에서는 1919년3월1일, 구(舊) 국왕의 장례식에 모인 지식인들이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데모행진을 함으로써 이 독립운동은 순식간에 조선전역으로 퍼져나갔다(3.1독립운동). 조선총독부(일본이 조선지배를 위해 설치한 통치기관)는 이를 무력으로 탄압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그때까지의 통치방식을 바꾸었다. |
▽관동대지진 (1923년 일본 간토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이에 따라 발생한 한국인 학살사건. 일본 정부는 계엄령 선포를 위해 ‘한국인들이 혼란을 조장한다’는 유언비어 살포. 일본 군경과 자경단에 의해 2000∼6000명의 한국인 피살) | 언급 없음 | 1923년 9월 1일에는 관동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나 도쿄, 요코하마 등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고 약 70만호가 피해를 보았으며 사망자 행방불명자가 10만명을 넘었다(관동대지진). 이런 혼란중에서 조선인 및 사회주의자 사이에 불온한 책동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주민 자경단 등이 사회주의자 및 조선인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전쟁목적 (1941년 조선 만주 대만을 전진기지로 중국본토와 인도차이나 인도네시아 등 침략, 아시아 대륙의 식민지화) | 일본의 전쟁목적은 자존자위와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 그러나 대동아 공영권하에서는 일본어교육,신사참배가 강요되어 현지인의 반발이 강해졌다. 또한 전황이 악화되면서 일본군에 의해 현지인들이 가혹한 노동에 종사당하게 되는 경우도 자주 일어났다…패전후 일본은 이런 국가들에 배상을 실시했다. 그리고 대동아공영권 구상도 일본의 전쟁이나 아시아의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워진 것이라고 비판받았다. |
▽강제연행 및 황민화정책 (1941년 미국이 참전,전황이 악화되자 조선 중국 베트남 등에서 전쟁에 강제로 동원하고 민족정신 말살) |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징용이 이뤄지고 중학 3학년 이상의 학생은 근로동원, 미혼여성은 여자정신대로서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또한 대학생이나 고등전문학교생은 징병유예가 취소되어 아쉬움이 있었지만 조국을 생각하며 출정했다(학도출진). | 이러한 징용이나 징병 등은 식민지에서도 행해져 조선이나 대만의 다수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희생이나 고통을 강요당하게 됐다. 그 외에도 다수의 조선인과 점령하의 중국인이 일본의 광산 등에 끌려가 가혹한 조건하에서 노동에 종사했다. 또한 조선이나 대만에서는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황민화정책이 강화되어 일본식 이름 사용 등이 추진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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