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미국이 지리적으로 크게 가까워지고 미국 사회와의 체감 교류가 대폭 늘어났다는 사실이 곧 그 나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비례적으로 증진시킨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 사회의 친미적 전통이 목하 일부 진보진영의 반미 공세로부터 이래저래 욕보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서 미국의 실상에 보다 가깝게 다가간 것도 아니다. 해방 이후 반세기 이상 한국 현대사를 실질적으로 ‘공저(共著)’해 왔던 나라, 미국의 진면목은 여전히 많은 부분 우리에게 굴절돼 있다. 싫든 좋든 ‘미국의 시대’를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미국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그저 익숙해져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다. 매년 수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 대학에서 무수한 학위 논문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미국 사회나 문화, 역사 등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국내 언론사들이 미국 주요 도시에 기자들을 경쟁적으로 ‘특파’하고 있지만 그들이 명실상부한 미국 전문가로 입신하는 사례 역시 극히 드물다.
재미 한인 교포가 200만 명을 훨씬 넘어섰다고 하지만 체계적인 미국 연구서는 물론 번듯한 미국 입문서조차 없다시피 한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취재하고 여행하고 생활하는 일들이 미국의 본질을 제대로 읽어내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미국을 잘 알기보다 미국이 우리를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이는 이른 바 지역연구라고 하는 것이 워낙 ‘제국주의‘와 무관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인정하고 넘길 일은 물론 아니다. 미국 내에서 한국학이 양적 질적으로 빠른 성장세를 드러내는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 나라에서의 미국학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국내 도서관에 비치된 미국 관련 한국어 전문 서적도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더 빈약하다. 우리 대학에서 미국 학생이 자기 나라를 분석한 논문을 한국어로 쓰는 일은 거의 전무하지만, 한국 학생이 우리 나라를 연구한 논문을 영어로 쓰는 일은 가히 보편화되어 있다. 미국 사회가 그들 손에 더러 쥐어주는 장학금이란 것도 어쩌면 쉽고도 싼 값으로 한국에 대한 귀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백하거니와 그런 점에서 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따라서 비록 젊은 한 때 미국으로부터 물질적인 빚을 지기는 했지만, 미국 자체를 깊이 성찰하지 못했다는 정신적 부채는 언젠가 모국에 갚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 온 터였다. 그런 만큼 10여 년 만에 유학생이 아닌 교환교수 자격으로 미국 땅을 다시 밟는 심경에는 불안도 없고 흥분도 없다. 그저 미국 사회의 내면을 가급적 있는 모습 그대로 들여다보고 싶은 희망에 따라, 찬거리를 내정하고 슈퍼로 향하는 ‘주부’의 입장이 아니라 먹거리를 찾아 숲 속을 마냥 헤치는 ‘사냥꾼’의 모습을 보다 닮고 싶을 뿐이다.
미국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 가운데 하나로 선망하는 이 곳 시애틀은 때마침 바로 지난 주, 우리 나라 국민의 가슴속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 세이프코필드에서 열린 제72회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박찬호 선수가 출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심 국내의 뜨거운 박찬호 열기가 우리의 입맛에 따라 미국 사회를 자의적으로 각색하는 습관을 반복할까 걱정이다.
마치 한미관계가 미국 대외정책의 중심이 아니듯, 박찬호가 미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계해야 할 것은 미국이 아니라 미국에 대한 우리 식의 편의적 재단(裁斷)이리라. 미국이라는 사냥감을 사회학적 화두로 잡기 위한 고민 탓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도착 첫날부터 시작됐다.
전상인(한림대 교수·사회학, 현 미국 워싱턴대 교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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