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유럽 급부상…美 주도권 곧 사라진다”▼
-선생께서 창시한 '세계체제론'은 이미 적잖은 성공을 거뒀습니다. 한국에도 선생의 저서들이 여러 권 번역됐고, 지식인들의 주목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국민국가 단위에서 사고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인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먼저 그들의 국가 수준에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합니다. 이는 그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듯이 보이는 것이 정치적인 일이고, 더욱이 그런 행위는 상대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국가 수준에서 정치적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증명하려고 노력한 것은 국가 단위의 정부들이 세계적 상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은 한정돼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정부의 정책을 바꿈으로써 현저하게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대단히 실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국가를 이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주로 방어적인 행위를 위해서입니다. 즉, 단기적으로 정부가 우리에게 피해를 줄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정부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 일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각 국가의 개별적인 수준을 넘어서 여러 수준에서의 조직적 활동이 필요합니다."
-선생께서는 학문 방법의 측면에서 학문간의 근대적 경계를 허무는 통합학문적 방법을 제안·실천하고 계십니다. 선생께서 주장하는 통합학문적인 연구방법은 특히 세계체제론 같은 연구에 필수적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선생께서는 과학과 인문학이 나뉘게 된 기원도 추적하고 계신데, 이 기획의 의의는 무엇이고 현재까지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요.
"제가 오랫동안 사회과학분야에서 통합학문적 접근 방식을 주장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또한 과학은 객관적이고 인문학은 주관적이라는 둘 사이의 인식론적 구분을 극복하려는 시도도 지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주 한정된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있을 뿐입니다.
사회과학 내부에도 지난 150년 동안 만들어진 '분과 학문' 구조의 조직적 문화적 힘은 매우 강합니다. 이 경계들을 존중하지 않는 학자들은 자기 동료들로부터 종종 제재를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과학문의 구조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회과학의 '분과학문'에서 그 구분경계의 붕괴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지만, 그 과정은 당분간 천천히 진행될 것입니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인식론적 구분도 현재 무너지고 있으나 역시 천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자연과학분야에서 '복잡성의 과학'과 인문학분야에서 '문화연구'의 활기가 어떻게 이를 뒷받침해 왔는지를 지적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은 아직 멉니다."
-선생께서는 현재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위기를 맞고 이행기에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대안적 사회체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특히 막스 베버의 '실질적 합리성'을 강조하고 비영리단체들의 의의를 주목하더군요. 이것은 기존의 서구 중심 세계질서와 어떻게 다른 비젼입니까?
"비영리단체에 대한 저의 논의는 제가 강조해온 '탈상품화'의 한 예일 뿐입니다. 현 세계체제, 즉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핵심적 요소는 끊임없는 자본축적을 가장 우선시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축적을 가장 우선시하지 않는 어떤 체제도 근본적으로 우리의 현 체제와는 다를 것입니다.
다르다고 해서 미래의 세계 체제가 윤리적 또는 사회적 관점에서 현 체제보다 더 나은 것이 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더 나쁠 수도 있지만, 다르면서도 도덕적으로는 동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실질적 합리성 논의가 개입됩니다. 실질적 합리성 논의는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를 그려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세계를 더 선호하는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기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취하고 싶은 도덕적 윤리적 정치적 목적의 관점에서 이 쟁점을 논의해야 합니다. 물론 당신과 나와 또 다른 사람들이 여기서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질적 합리성이 토론과 논쟁과 그 차이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의 세계체제와는 매우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문제들을 기능적 합리성의 관점에서만 논의합니다. 이는 우리가 끊임없는 자본축적이라는 전제를 주어진 것으로 인정하고, 단지 어떻게 하면 이것을 가장 잘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할 뿐입니다. 실질적 합리성에 기초한 논의라면 그 전제가 실질적으로 합리적인가를 물을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지난 20년간 미국 헤게모니의 퇴조를 주장해 오셨습니다. '9·11 테러 사태' 이후에 발표된 글들에서도 이 점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미국을 여전히 패권국가로 간주합니다. 미국이 일방적 행동을 취하고, 지정학의 게임규칙을 정한다는 점에서 패권국가로 보아야 한다는 지식인들의 견해도 있습니다. 미국은 정말 패권국가가 아닙니까?
"오늘날 미국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보려는 유혹이 있지요. 미국은 의심할 바 없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바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또 다시 이를 증명했습니다. 미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실제로 할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이 현재의 미국을 이끌어 왔고, 미국의 많은 비평가들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통제권을 상당히 벗어나는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유럽은 빠르게 부상하고 있고, 유로는 이제 막 제2의 세계 예비통화가 되려 합니다. 실제로 세계 공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큰데, 저는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 유럽과 일본에 비해 잘 대처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곧 전 지구상에서 아르헨티나 식의 민중주의적 봉기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변란은 미국이 통제할 수 없는 무정부적 상황을 널리 확산시킬 것입니다. 현재의 미국의 오만함은 바로 오 년 뒤에만 해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일 겁니다."
-중국이 고도성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에는 WTO에도 가입했지요. 국제교역질서에 적잖은 파장을 가져올 것으로 예견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이같은 움직임이 세계체제에 던지는 의미와 동북아의 지정학에 미칠 변화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중국은 분명히 현재 시점에서 세계체제 중 가장 역동적이고 자기확신에 차 있는 지역입니다. 저는 중국이 대부분의 다른 나라보다 현재 세계 경제의 어려움들을 잘 헤쳐갈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중국은 분명히 전 세계, 특히 동아시아에서 주요 강대국으로 인정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일본과 한국에 대한 중국의 관계는 물론 이 역할을 하는 중국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어려운 협상의 문제이긴 하지만, 왜 두 나라가 서로 진정한 타협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경우 핵심 문제는 남북 관계 및 통일입니다. 중국이 그 적절한 균형을 깨뜨리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남북 관계가 향상되고, 나아가 통일을 바라는 것이 중국의 이해관계에 맞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중국, 한국, 일본)가 조화로운 트리오를 이룰 가능성이 아마도 장기적으로는 어떤 다른 시나리오보다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지정학적 차원에서 세계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테러와의 전쟁'이 아직도 진행중이며, 확전 가능성이 타진되고 있습니다. 이라크, 소말리아, 그리고 급기야 쿠바까지 거론되는 형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에 어떤 위협이 있으며, 이에 대해 한반도인들이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요?
"미국의 매파는 '테러와의 전쟁'을 다른 지역들로 확대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은 확실히 북한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매파가 현 시점에서 상당히 강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워싱턴의 논쟁에서 이기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저는 매파가 '쉬운' 표적이라고 여기는 지역을 먼저 공격하고 싶어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쉬운' 표적이 아닐 것입니다. 그와는 거리가 멀어요!
물론 남한 정부의 입장이 이 점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남한 정부가 수동적이어서는 안 되며, 자신의 견해를 워싱턴에서(그리고 도쿄와 유럽의 수도들에서)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김형찬기자 khc@donga.com
▼보편적 사회과학 구축운동 주도…독창적 ‘세계체제 분석론’ 제시▼
◇월러스틴은 누구인가=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교수는 1930년 미국 뉴욕에서 출생했으며 지금도 왕성한 학술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학부부터 박사과정까지 컬럼비아대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때 칼 폴라니, 찰스 라이트 밀스, 다니엘 벨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어 바로 모교 사회학과에서 교수직을 맡았다가, 1968년 학생소요사태에 개입돼서 모교를 떠나 캐나다의 맥길대로 옮겨갔다. 옮기기 전 1년을 캘리포니아주 팔로 알토에 있는 ‘행동과학고등연구소’에서 보냈는데, 여기서 그의 주 저서인 ‘근대세계체제’ 제1권을 집필했고 이 과정에서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과 교분을 맺었다. 월러스틴 교수는 이 책을 통해 그의 독창적인 ‘세계체제분석’을 제시했다.
이 책의 발표 이전까지 그는 주로 아프리카 지역연구자로 알려져 있었다. 실제 그의 연구도 주로 아프리카 신생국의 민족해방 문제였다. 10년여에 걸친 그의 아프리카 연구 성과는 오늘날까지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비서구세계에 대한 서구세계의 지배를 20세기의 화두로 예측하고 아프리카 연구에 열중했지만, 근대 서구의 등장 쪽으로 학문적 관심을 옮겼다.
1976년 맥길대를 떠나 뉴욕주립대(빙엄튼)로 옮긴 후 지금까지 사회학과와 ‘페르낭 브로델 센터’를 중심으로 학술활동을 해 왔다. 또한 1994년부터 1998년까지 4년 동안 ‘국제사회학회’ 회장을 맡으면서 보편적 사회과학의 재구축 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그의 ‘세계체제분석’은 서구중심적 사회과학의 전제와 언어에 대한 문제제기로 출발했다. 이론이라기보다는 대안적 이론에 대한 요청이었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인식틀이다. 끊임없는 자본축적을 주된 속성으로 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정치 경제적 제반 과정, 지배적 이데올로기, 지식구조 연구를 포괄하는 인식체계가 바로 세계체제분석이다.
그는 서구 사회과학의 주요 전제들-예컨대, 주권 국가나 민족사회가 독립적 실체이며 적실한 분석단위라는-을 오류라고 보고, 이들을 시급히 해체해서 그 덤불을 치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덤불을 치우는 작업이 바로 세계체제분석이라 하겠다.
구체적으로는 이른바 ‘근대화론’이 그 청산 대상이었다. 근대화론은 시간이 가면 다 좋아진다는 진보 관념을 전제로 깔고 있다. 그러나 진보는 대개 환상이라는 것이 월러스틴 교수의 입장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하나의 역사적 사회체제인 만큼 수명을 갖는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1970년대 초부터 위기를 맞았다. 그는 이 시점을 미국 헤게모니체제의 퇴조, 세계적 축적의 위기, 국가 정당성의 위기, 세계체제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붕괴 등이 함께 일어난 중대한 분수령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대를 ‘이행기’로 본다.
그는 이행기의 과학적 분석, 도덕적 판단, 정치적 실행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다음 사회체제는 법칙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이행기 동안 우리가 집단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특히 막연하게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경계한다.
1989년 사태이후 세계체제분석은 급속히 광범위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 월러스틴 교수의 책은 세계의 거의 모든 주요 언어들로 번역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의 영향력은 서양사학, 문학평론, 국제정치학, 사회학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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