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150…1929년 11월 24일 (1)

  • 입력 2002년 10월 17일 18시 36분


빛이 단념한 대기는 까닭없는 향수를 띠고 있고, 나무들 그림자는 낙엽 위에 인쇄된 듯 정지해 있다. 강바람이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면서 낙엽을 흩날려 그림자가 움직이고, 먹을거리를 찾고 있던 참새마저 먼지 덩어리처럼 날려보내려는데 참새는 한쪽 눈을 꼭 감고 날개에 바람을 품은 채 견디고 있다.

납빛 하늘, 얼어붙은 강, 얼음 위에는 나뭇잎 몇 잎이 말린 생선처럼 흩어져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얼음 위로 미끄러진다. 참새는 바람이 약해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폴짝 날아올라, 강가 마른 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칙칙 폭폭 칙칙 폭폭, 기차 소리가 다가온다. 경성행 보통 열차가 용두산 앞 철교를 폭폭 기적을 울리며 건넌다. 연기가 긴 꼬리를 늘어뜨리고 멀어져간다. 어느 집 마당에 묶여 있는 개가 기적 소리를 쫓듯 왕왕 짖자, 동네 여기저기서 개 짖는 소리가 소용돌이친다.

보통학교의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땡땡 하늘에 울리자 겨울 오후의 빛마저 종소리와 함께 하늘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데, 조선 아이들이 책보따리를 껴안고 교문으로 뛰어나와 강가가 웃음소리와 장난질 소리로 시끌시끌해지자, 잊었던 것이 생각났다는 듯 태양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핏기 잃은 풍경에 빛을 뿌렸다.

배다리는 얼음에 갇혀 아이들이 그 위에서 껑충껑충 뛰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두루마기와 목도리로 몸을 감싼 어른들은 토해내는 숨에 얼굴을 찌푸리고, 자기 그림자로 나뭇잎을 짓밟듯 오가고 있다. 배다리를 건너면 강둑을 따라 군고구마와 군밤을 파는 노점이 줄지어 있어 터벅터벅 발소리가 다가올 때마다 군고구마요, 군밤이요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추위 속에 걸음을 멈추는 자는 많지 않다.

잠시 후, 각자 집에서 팽이와 썰매를 들고 나온 남자아이들이 강가에 모인다. 썰매라고 해봐야 판자대기 밑에 철사줄을 박은 것, 판자 위에 올라타 못을 박은 막대기를 양 손에 쥐고 밀면서 탄다.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막대기를 쥔, 갈라지고 튼 조그만 손이 땀으로 끈적해지고, 목덜미에서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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