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 ‘쌀시장 개방(관세화) 유예 재협상’과, 우루과이라운드(UR)에 이어 농산물 추가 개방을 다루는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의 타결 시한은 2004년 말.
아직 2년이나 남아 있는데도 농민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협상 여건이 큰 폭의 추가개방이 불가피한 쪽으로 기울고 있기 때문. 그동안 정부가 ‘냉탕온탕식’ 농업정책과 중국산 마늘파동 등으로 무능력을 드러내면서 한국 농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청사진을 못 내놓은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농민단체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지난달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기로 합의한 것도 농민의 불안심리를 부채질했다.
▽농민의 피해의식과 불안〓국내 농민들은 WTO와 FTA를 두 축으로 한 국제통상질서가 견고해질수록 한국 농촌은 피폐해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
UR협정 이행 직전인 1994년과 2000년을 비교할 때 연간 농가소득은 2032만원에서 2307만원으로 13.5% 늘어나는 데 그쳤다. 94년에는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가구소득의 99.5% 수준이었으나 2000년에는 80.6%로 떨어졌다. 농촌의 고령화와 가구당 인원 감소도 영향을 미쳤지만 이 또한 개방의 간접 피해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이다.
반면 농가부채는 이 기간 중 789만원에서 2021만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었다. 농가자산에서 농가부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5.6%에서 12.6%로 높아졌다.
그나마 UR는 전초전에 불과하다. 농림부 당국자는 “UR에서는 농산물 수출국들이 예외로 인정되던 농업부문에 자유무역원칙을 도입했다는 상징적 수준에 만족했다”면서 “반면 DDA는 UR의 토대 위에서 실질적인 자유무역원칙을 적용하자는 논의”라고 설명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농민 10명 가운데 8명이 쌀농사를 짓고 농업소득의 절반이 쌀에서 나온다”면서 “쌀을 포기하면 지을 농사도 없고 살아갈 방법도 없다”고 주장한다.
▽농민은 뭘 요구하나〓13일 대회에서 농민이 내건 요구사항은 △쌀 수입 개방 반대 △식량자급목표 법제화 △한-칠레 FTA 비준 반대 △외교통상부 통상협상권 박탈 및 농업통상협상에 농민대표 참여 △농가부채 해결 △실질적 농가소득 보장 대책 마련 △쌀값 보장을 위한 특별대책 마련 △근본적인 재해대책 마련 등 8가지다.
이 가운데 식량자급목표 법제화와 농업통상협상의 농민대표 참여 요구는 정부에 대한 불신의 표현. 이호중(李浩重)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부장은 “정부가 감산정책과 증산정책 사이에서 우왕좌왕해 농민이 피해를 봤기 때문에 생산(자급) 목표를 법에 명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가부채 해결, 실질적 농가소득 보장대책과 근본적인 재해대책 마련 등은 안정적으로 생산활동과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지만 경제원리를 감안할 때 정부가 100%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한-칠레 FTA 비준 반대는 과일 농업의 피해를 막자는 취지. 하지만 이미 타결된 협상을 비준하지 않으면 국가신인도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거부하기 어려워지는 쌀시장 개방〓농민단체를 중심으로 한 농민들이 주장하는 가장 핵심적 사안은 쌀 수입 개방 반대다.
한국은 94년 UR협정에 서명하면서 ‘관세화(개방)를 추가로 유예받으려면 WTO 회원국들이 수용할 수 있는 추가적인 양허(讓許)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즉 개방을 연기하려면 2004년 기준 20만5000t인 최소시장접근물량(MMA)을 대폭 늘려 줘야 하는 처지다.
그러나 지금도 쌀이 남아도는 상황에서 MMA 확대가 관세화보다 불리할 가능성이 있다. 또 개방 연기를 요구할 수 있는 입지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UR협정에서 관세화를 유예받은 한국(쌀) 등 4개국 가운데 일본(쌀)과 이스라엘(양고기 및 낙농제품)이 각각 99년과 2001년 관세화를 받아들였다. 올해 초 WTO에 가입하면서 쌀의 관세화를 유예받은 대만도 내년부터 빗장을 풀기로 했다.
더구나 쌀산업 경쟁력이 미국보다 강한 중국이 WTO에 가입해 쌀시장 개방 압력은 더 거세질 전망이다.
이 때문에 학계나 연구소는 물론 정부 내에서도 한국이 2004년 재협상에서 쌀시장 개방을 추가로 유예받기는 어렵다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지금으로선 유동적이지만 DDA협상도 변수다. DDA협상에서 논의되는 내용이 쌀에도 적용된다면 관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낮추고 쌀 수매제도 등도 사실상 폐지해야 한다.
▽대책은 없나〓한국농촌경제연구원 김명환(金明煥) 선임연구위원은 “협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개방폭을 좁히고 속도를 늦춰야 하지만 어떤 경우든 쌀값은 떨어지고 휴경 농지는 늘 수밖에 없다”면서 “경지정리나 간척사업을 줄이고 농가의 소득을 보전하고 주거환경과 의료 투자를 늘려 농민의 삶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최낙균(崔洛均) 무역투자정책실장은 “농업경쟁력을 높이고 구조조정 지원을 늘리는 것을 포함해 농민들이 믿을 수 있는 종합적인 농업 발전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WTO의 질서 아래서 자유롭게 통상 활동을 하는 것은 농업부문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서 “그 희생에 걸맞은 보상을 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만드는 일도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도하개발어젠다 농업분야 협상논의 동향(자료:농림부) | |||
구분 | 한국 주장 | 농산물수출국 주장 | |
관세 감축 | 완만하게 감축 | UR방식보다 급격하게 감축, 고율 관세 상한 설정 | |
관세 체계 | 각국의 다양한 관세체계 인정 | 종가세(從價稅)로 통일 | |
시장접근물량 증량 | 각국이 현실적으로 수용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일정비율로 증량 | 대폭 확대 | |
국내보조금 | 허용대상 | 범위와 기준을 신축적으로 조정 | 허용 보조총액 상한 설정 |
생산제한조건부 | 유지 | 철폐 | |
감축 대상 | 총액기준으로 점진 감축 | 품목별 감축, 5% 이상 보조 철폐 |
천광암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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