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께서 수백의 무리와 함께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현령의 마음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유형과 힘을 합쳐 모반을 일으킬까봐 걱정된 것이겠지요. 현령은 갑자기 성문을 걸어 잠그고 현군(縣軍)을 풀어 성을 굳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는데, 먼저 우리를 죽여 안에서 호응하는 것을 막으려 함이었습니다. 우리를 데리러 온 군리(軍吏=軍校)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뇌물을 듬뿍 집어주고 물었더니 그렇게 털어놓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도망쳐 오는 길입니다.”
“하후영(夏侯영)은 어찌 되었소?”
유방이 문득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오래전 유방이 잘못하여 칼로 그를 다치게 하였을 때, 모진 매를 맞고 옥에 갇히면서도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아 유방을 구해준 적이 있는 하후영이었다. 그 뒤 다시 현에서 사어(司御)로 일하고 있었지만, 그가 유방에게 가슴이나 배[심복]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패현 사람이라면 모두 알았다.
“지금은 현령리(縣令吏·현령의 부관 격)가 되어 현령과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만 자못 걱정됩니다. 기별은 보냈는데 탈 없이 빠져나올 수 있을는지….”
조참이 어두운 얼굴로 그렇게 받았다. 소하도 자기들만 빠져나온 게 적잖이 마음에 걸리는 듯 표정이 밝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함께 있던 노관이 문득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또 뭐지? 수레 같은데….”
그 말에 모두가 함께 바라보니 방금 소하와 조참이 달려온 그 길로 다시 부옇게 먼지가 일며 수레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네 마리의 말이 끌고 덮개가 있는 게 꽤 높은 벼슬아치의 수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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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현령이 공무로 고을을 돌아볼 때 쓰는 수레가 아닌가….”
소하가 그 수레를 알아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조참도 고개를 끄덕여 같은 뜻을 나타냈다.
“현령의 수레라고? 그럼 사람들에게 싸울 태세를 갖추게 해야지.”
노관이 그러면서 멀지 않는 곳에 서 있던 장정들을 불러모았다. 그때 유방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렸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수레 앞뒤에 따른 인마가 없지 않은가? 저 수레 가득 군사가 타고 있다고 해도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네. 현령이 보낸 사자거나 아니면….”
“아니면, 뭐야?”
노관이 눈을 깜박이며 유방을 쳐다보았다. 유방이 수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말했다.
“하후영이 오고 있는지도….”
“뭐 하후영이?”
“우리 패현에서 하후영 말고 누가 저렇게 빨리 저 수레를 몰 수 있는가? 다 알다시피 하후영은 현리(縣吏) 노릇을 마구간에서 시작하였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어(司御)로서 바로 저 수레를 몰지 않았나?”
그러자 유방 못지않게 하후영을 걱정하던 노관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제발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 사이에도 수레는 한줄기 먼지 바람처럼 다가들더니 갑자기 그들 앞에 멈춰서고 부옇게 먼지를 덮어쓴 사람이 어자(御者)자리에서 뛰어내렸다. 중키에 호리호리한 몸매가 다름 아닌 하후영이었다.
“영(영)아, 정말 네가 왔구나. 걱정하였다.”
유방이 하후영의 손을 잡으며 그렇게 반기고, 소하와 조참도 한마디씩 보탰다.
“벌써 기별이 갔던가?”
“성문 빠져나오기는 어렵지 않았어?”
“한가롭게 기별이나 기다리고 있을 틈이 어디 있겠습니까? 두 분께서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리를 듣기 바쁘게 이 수레를 끌고 뒤따랐지만 벌써 성문이 굳게 닫혀 있더군요. 나는 현령의 명을 받고 두 분을 뒤쫓는 중이라고 둘러대었지요. 거기다가 내가 이 수레를 몰고 나서서 그런지 성문을 지키던 교위(校尉)가 어렵잖게 속아주더군요.”
하후영이 그러면서 씩 웃었다. 아무리 다급한 지경에 빠져도 흔들림이 없는 그의 일면을 잘 드러내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갑자기 떠올린 게 있다는 듯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풍읍 중양리에도 빨리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현령은 우리가 모두 달아난 걸 알면 반드시 군사를 그리로 보내 태공(太公)과 그곳에 남아있는 가솔들을 인질로 잡으려 할 것입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게. 우리가 떠나기 전에 여공(呂公)께 일러 양가 모두 멀리 피신하시게 해두었다네.”
소하가 차분하게 받았다. 그때 유방이 다시 그들을 일깨우듯 말했다.
“자, 이제 하후영까지 왔으니 성안에서 빠져나와야 할 사람은 대강 빠져나온 듯하오. 이제 사람들을 모아 패현을 차지할 궁리나 해보는 게 어떻소? 번쾌와 주발을 불러오고 주가와 기신도 이리 오라고 하시오.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꾀를 모으면 힘들이지 않고 성을 뺏을 수도 있을 것이오.”
이에 유방의 무리는 그곳에 잠시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군막 한곳에 몰려 앉아 꾀를 짜내기 시작했다. 힘이 남다르고 무예가 뛰어난 번쾌와 강한 활을 잘 쏘는 주발뿐만 아니라 주가와 기신, 조참이 모두 무장(武將)에 가까워 도필리(刀筆吏)인 소하를 빼고는 한결같이 힘으로 성을 우려 뺄 궁리만 했다. 하지만 유방은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싸움이 꼭 피를 흘리고 적을 죽여야만 이기는 건 아니지. 참으로 이기는 것은 나와 남이 아울러 상하지 않고 뜻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야. 게다가 우리 군사는 훈련도 안 되고 병장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어. 어떻게 싸우지 않고 패현을 손에 넣어 그곳을 근거 삼아 우리 힘을 키우는 수는 없을까?”
유방이 그렇게 묻자 싸움에 별로 자신이 없어 겉돌던 소하가 얼른 받았다.
“한번 꾀해볼 만한 일이 있소. 비록 몇백의 현군을 거느리고 있다고 하나 현령에게는 이곳이 타향이외다. 수천의 백성들이 성안에 있고, 또 그들은 우리의 부모형제가 되니 어찌 두렵지 않겠소? 현령에게 사람을 보내 한번 달래보도록 합시다. 싸움은 그 뒤라도 늦지 않소.”
“그리 쉽게 항복할 현령이 왜 성문을 닫아걸고 두 분을 죽이려고까지 했겠습니까?”
주가와 기신이 먼저 그렇게 못마땅한 기분을 나타냈고, 다시 번쾌와 주발이 거들었다.
“이미 시작된 싸움인데 이제 와서 무얼 망설인단 말이오? 오늘 밤 불시에 들이쳐 현령 놈에게 정신차릴 겨를을 주지 말고 패현을 둘러엎어 버립시다.”
유방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말했다.
“아니, 소형(蕭兄)의 말이 옳아. 먼저 달래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싸우지 뭐.”
그러고는 하후영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네가 한번 더 성안을 다녀와야겠다. 너는 근래 현령리로서 현령과 가깝게 지냈으니 그래도 네 말이라면 현령이 들어보려고 하지 않겠느냐?”
하후영의 얼굴이 잠깐 흐려지는 듯하더니 이내 평상을 회복했다.
“한번 가보지요. 그런데 현령을 만나 무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가서 말하거라. 이 유(劉) 아무개에게는 고향 땅과 부모형제를 지키려는 것뿐 딴뜻은 없노라고. 만약 우리를 받아들여 함께 힘을 합친다면 이 패현 군민(軍民)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현령께서도 벼슬과 몸을 아울러 보존하는 길이 되리라고. 현령은 이 유 아무개가 반드시 지켜 주리라고.”
그러고는 사자의 표식으로 삼을 흰 깃발 하나를 내주며 수레와 함께 성안으로 돌려보냈다.
“위태롭습니다. 겨우 죽을 곳을 빠져나온 사람을 다시 돌려보내다니요.”
“근래 현령과 가깝게 지냈다지만, 그래서 자신을 버리고 달아난 하후영이 더욱 미울 수도 있지 않나?”
조참이나 노관이 그렇게 걱정했지만 유방은 무엇을 믿는지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싸움터라도 사자는 함부로 죽이는 법이 아니다. 게다가 현령 제 놈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뭔가 내게 할 말이 있을 거다. 제 말을 내게 전하기 위해서도 하후영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성안으로 들어간 하후영은 한 시진도 안 돼 되돌아왔다. 수레는 뺏기고 비루먹은 군마 한 마리를 빌려 탄 채 돌아왔지만 몸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성안으로 돌아가니 현령이 대뜸 나를 묶게 하고 목을 베겠다며 엄포를 놓더군요. 그러면서 은근히 우리 군세를 묻기에 한껏 부풀려 말해주었더니 비로소 묶은 것을 풀게 하며 온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형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해드렸습니다. 현령은 겉으로는 벌컥 성을 내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무언가 깊이 헤아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형님께 전하라고 하더군요. 모두 병장기를 놓고 하나씩 성안으로 들어와 현군(縣軍)에 든다면 받아들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역도로 처벌하겠다고. 그러고는 느닷없이 창칼을 든 군사 5백을 늘여 세워 겁을 주었습니다.”
그게 하후영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었다. 유방이 별다른 표정 없이 물었다.
“내가 싸우지 않고 저를 거두려 했더니, 거꾸로 제가 내 항복을 받으려 드는구나. 그래, 성안 군사는 얼마나 되더냐?”
“성벽 위에 세워둔 군사까지 더하면 천명은 돼 보였습니다.”
“무기는?”
“창칼에 활과 화살을 넉넉히 갖추고 있었습니다. 성안 대장간마다 창칼 벼리는 소리가 요란한 게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성안 백성은 모조리 군사로 끌어다 쓸 작정인 듯했습니다.”
“듣기로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두 배의 세력이 필요하고 에워싸려면 다섯 배가 필요하다 하였다. 그런데 거꾸로 우리의 세력이 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렇다면 더욱 싸워서는 안 되겠구나….”
유방은 그 말과 함께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번쾌나 주발 같은 무골(武骨)들도 하후영이 전하는 성안의 군세를 듣고는 무턱대고 싸우자고 우기지 않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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