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내셔널 어젠다委 제안 9]권력분점

  • 입력 2003년 1월 12일 18시 42분


한국의 헌정사에 있어서 역대 대통령은 항상 제왕적 대통령으로 군림해 왔다.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은 ‘건국의 아버지’로,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은 군사적 권위주의로 나라를 ‘지배’했다. 민주화를 통해 집권한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조차도 권위주의적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새 대통령은 더 이상 과거 대통령이 가졌던 카리스마를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대선 과정을 통해 정치권의 기득권이 상당 부분 와해되거나 분산되는 방향으로 재편됐다. 노무현(盧武鉉) 당선자 스스로 ‘탈 권위주의 시대’를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바로 여기서 한국적인 새로운 지도자 상이 구축돼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대통령 중심적으로 해석되고 작동되던 헌법 규범의 틀이 당초 규범대로 운용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제적 요소 외에도 현행 헌법에 들어 있는 이원정부제(반·半 대통령제) 및 의원내각제적 요소 등 다양한 제도 운용의 틀을 헌정현실에 적응시키는 작업이 필요한 때다.

대선 과정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모두 대권과 당권의 분리, 즉 대통령과 당 대표직의 분리를 당헌 당규로 제도화했다. 그것만으로도 일차적인 권력 분점의 시동은 걸렸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양당은 모두 선거과정에서 권력 분점을 위한 개헌을 약속했고, 선거 후 노 당선자는 2006년까지 개헌을 완료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헌법 개정은 아직은 미래의 일이다. 이 시점에서 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현행 헌법 아래서 어떻게 권력을 분산시켜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사실 권력 분점은 1997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도 이른바 ‘DJP연합’이라는 형태로 논의됐고 이후 일정 부분 시도되기도 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DJP식 권력 분점이 실패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 분점이 헌법적 틀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위인설관식 권력나눠먹기’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새 정부의 권력 분점은 대통령과 국회의 상호 견제를 제도화하고 있는 헌법적 틀을 공식화, 현실화시키는 방향으로 구현돼야 한다.

역대 대통령들은 제왕적 권력을 이용해 국회를 행정부의 시녀화 하거나, 인위적 정계개편을 통해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만드는 방식으로 국회와의 갈등을 해소했다. 그러나 이는 야당의 반발과 국민적 저항을 불러와 결과적으로 정치 불안을 야기했을 뿐이다.

이런 악순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시키면서 동시에 국회와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접점이 마련돼야만 한다.

그것은 헌법에 규정된 국무총리 임명 절차의 기본 취지 즉, 임명권을 가진 대통령과 그 동의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가진 국회의 이중 신임에 기초한 국무총리가 나오고, 그 국무총리가 정치적 실질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대통령(임기 5년)과 국회의원(임기 4년)의 선거 사이클이 엇갈리게 돼 있는 우리나라 선거의 특성상 대통령과 국회 다수파가 일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988년 13대 총선 이래 국회의원 선거는 대부분 여소야대로 귀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대 이후 국회는 모두가 임기 중에 여대야소로 변질됐다. 여대야소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이 강력할 수 있겠지만, 불일치할 경우에는 반 대통령제(이원정부제)에 준하는 국정 운용이 불가피하다. 이때 국회와 대통령의 이중 신임에 기초한 국무총리가 새로운 권력의 매개축으로 등장해야 한다.

헌법상 국가원수이자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은 국가가 나아가야 할 기본 방향의 정립 즉, 외교 안보 및 통일 등과 관련되는 ‘큰 정치’를 이끌어가고 대통령의 정치 철학에 기초한 정책 집행, 일반 행정은 국무총리가 담당하는 권력 분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국회 다수파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관계없이 작동돼야 할 명제이기도 하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천만가지 일에 다 매달릴 것이 아니라 몇 가지 핵심 과제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주어진 술잔을 나누어 마실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개헌 이렇게 하자▼

헌법개정이 새 정부의 국정과제로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새 정부는 어차피 개헌문제를 처리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도 개헌 공약을 이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새 정부 임기 내에 논의될 개헌은 적어도 헌법상 권력구조의 체계 정합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현행 헌법은 대통령제적 요소와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혼재돼 있다.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헌법의 이 같은 체계부정합성을 극복하기 위한 작업이 우선적으로 시도돼야 한다.

개헌의 방향으로는 첫째, 순수대통령제로의 헌법개정을 생각할 수 있다. 대통령 부통령의 러닝메이트 시스템, 대통령 4년 중임제를 도입하는 방안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순수대통령제로 개헌이 이뤄지면 국무총리제는 폐지되는 것이 당연하다. 순수대통령제는 대통령과 의회 다수파가 상충되는 데 따른 국정운영의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

둘째, 현행제도의 미시적 구조조정을 생각할 수 있다. 즉 대통령과 국무총리 중심의 정부구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대통령 임기를 4년 단임 또는 4년 중임제로 바꿔 국회의원 임기와 상충되는 데 따른 폐단을 해소하고 △대통령 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거나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을 부여하는 대신 국회의 대정부 불신임 동의권을 제도화하는 방안 등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순수한 의원내각제 헌법개정을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국무총리와 국회 중심의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 하에서는 정치적 실세가 대통령직에 취임할 경우 헌법규범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는 이원정부제적인 헌정 운용이 불가피할 수 있다. 그것은 제2공화국의 예에서 잘 드러난 바 있다.

어떤 방향이든 실제 개헌이 성사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을 것이다. 개헌을 위해서는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사실상 여야 만장일치를 통해서만 개헌이 가능하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국회가 순탄하게 이런 합의를 이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국의 헌법 개정
시기골자
1948년제헌헌법(의원내각제형 대통령제-대통령 간접선거)
1952년발췌개헌(대통령직선제 헌법 개정)
1954년4사5입개헌(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 제한 철폐)
1960년제2공화국(의원내각제)
1960년반민주행위자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의 헌법 근거 마련
1962년제3공화국(대통령중심제)
1969년3선개헌(대통령 3선 가능)
1972년제4공화국(유신헌법, 대통령 간접선거)
1980년제5공화국(대통령 7년 단임제, 간접선거)
1987년제6공화국(대통령 5년 단임제, 직접선거)

▼대통령 총선패배땐 ‘동거정부’ 구성▼

현대 헌법의 권력분점론은 프랑스헌법론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1958년 ‘위대한 프랑스’의 건설을 목표로 제정된 샤를 드골 헌법은 강력한 정부를 이상으로 하는 헌법으로 평가받아 왔다. 그것은 프랑스 제3, 제4공화국 의원내각제 헌법의 약한 행정부, 강한 의회의 구도를 깨뜨리고 강력한 정부를 구축하려는 드골 이념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드골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에도 불구하고 헌법상 대통령과 국무총리라는 정부의 이원성은 권력분점의 불가피성을 잠재적으로 안고 있었다.

국민 직접선거로 선출된 대통령과 의회의 지지 하에 구성된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내각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과 의회의 다수파가 일치할 경우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정치적 동반자가 된다. 그러나 대통령과 의회의 다수파가 불일치할 경우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비롯한 내각은 이른바 동거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

사회당 소속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재임 중에 실시한 총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함에 따라 1986∼1988년, 1993∼1995년 두 차례에 걸쳐서 좌파 대통령에 우파 정부가 동거하는 행정부를 구성한 바 있다. 또한 우파인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재임 중에 실시한 총선거에서 패배하자 1997∼2002년 좌파 내각과 동거하는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같은 좌우 동거정부 구성에도 불구하고 헌법의 권력구조에 관한 조항은 단 한 글자도 개정하지 않았다. 동거 정부 기간에도 대통령은 외교·국방·유럽연합(EU)문제 등에 관한 한 직접 국정에 관여했고 나머지 내정사항은 내각의 뜻을 존중함으로써 헌정의 정상적인 작동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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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집필=성낙인

서울대 법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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