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화]간다! 엽기 ‘노빈손’ 해외로 해외로

  • 입력 2003년 1월 17일 16시 52분


재미있는 과학 교양도서 경쟁력 충분 … 日·中 이어 영어판 제작 영미권 공략

무인도에는 수돗물이 없고 가스레인지도 없다. 휴대폰이 안 터지고 자장면 배달도 안 된다. 물 한 방울까지 제 발로 찾아야 하고 불씨 하나도 제 손으로 피워야 하는 절박한 상황. 그런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다면?

이제 주인공 노빈손이 등장한다. 대학 새내기 노빈손은 모처럼 해외여행에 나섰다가 비행기 사고로 홀로 무인도에 떨어졌다. 하지만 이름처럼 빈손은 아니다. 안경, 시계, 카메라, 맥가이버 칼, 라이터, 2000원짜리 비닐우비 그리고 멀미할 때 쓰라고 어머니가 넣어준 비닐봉지 서너 개가 있다. 이 도구를 활용해 그는 무인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

바닷물을 이용해 식수를 만들 수 있다면 최소 3일은 버티고, 갯벌에서 게와 조개를 잡거나 식용 가능한 식물을 구분하는 안목이 있다면 7일까지도 생존이 가능하다. 부싯돌을 이용해 불을 피울 수 있으면 생존 가능한 날은 15일로 늘어나고, 못 없이도 간단한 오두막을 지을 수 있다면 30일, 최소한의 치료법을 알고 있다면 60일, 뗏목을 만들어 띄울 수 있다면 무인도 탈출까지 가능하다.

▶ 초·중등학생들 ‘노빈손 신드롬’

노빈손과 노빈손의 여자친구 말숙이

노빈손은 만화책에서 읽었던 온갖 지식을 총동원해 물을 정수하고 불을 피우고 조개를 줍거나 짐승을 잡아 식량을 얻는다. 나침반 없이도 북극성과 별자리로 방위를 찾고 해파리의 움직임을 관찰해 폭풍우를 감지한다. 그리고 드디어 뗏목을 타고 무인도 탈출에 성공.

1999년 여름 ‘어느 날 무인도에 뚝 떨어진다면?’이라는 가상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든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뜨인돌 펴냄)가 초·중등학생들 사이에서 ‘노빈손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4년 뒤 노빈손은 어드벤처 시리즈(노빈손의 아마존 어드벤처, 버뮤다 어드벤처), 계절탐험 시리즈(노빈손의 여름사냥, 가을여행, 겨울나기), 가다 시리즈(노빈손 에버랜드에 가다) 등 3종 9권으로 늘어났다. 올 봄 ‘노빈손의 남극 어드벤처’ ‘노빈손의 봄나들이’ ‘노빈손, 아이스케키 공화국을 구하라’(뉴어드벤처 시리즈)가 잇따라 출간되면 100만부 고지는 무난히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노빈손 시리즈는 교사들이 첫손가락에 꼽는 과학 권장도서로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과학발표회의 단골 주제가 되었으며, 노빈손을 연극무대에 올리는 학교까지 생겼다. 출판사가 만든 노빈손 공식 홈페이지의 회원만 1만여명. 이들은 스스로 노빈손 창작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고 출간 전 검토위원 역할을 하거나, 머리카락 네 가닥의 노빈손이 몇 쪽 그림에서는 다섯 가닥이 됐다는 등의 예리한 지적을 하는 등 노빈손 캐릭터를 만드는 데 적극 동참하고 있다.

노빈손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작가 박경수씨는 만화 꺼벙이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말한다. “최초의 원고는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데 유용한 과학상식을 나열하는 데 그쳤어요. 그것만으로는 너무 밋밋해서 주인공을 앞세운 무인도 서바이벌 스토리를 만들기로 했죠. 20세의 배낭족이 여행을 가다 무인도에 떨어진다, 이름은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한 노빈손,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고 덜떨어진 듯한 인상이지만 위기의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잔머리의 대가, 외모는 엽기적이고 행동은 비실비실하다고 설정했죠.”

결정적으로 이우일씨의 일러스트가 노빈손의 꺼벙이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네 가닥 머리카락, 약간 풀린 눈, 소시지 같은 코와 큰 입, 길쭉한 얼굴, 갈빗대가 앙상하게 드러난 깡마른 몸매가 어딘지 모르게 불쌍해 보인다. 노빈손 시리즈의 산파 역할을 한 뜨인돌의 박철준 부사장은 “처음에는 대학생 이상의 청년층을 겨냥해 노빈손을 20세의 대학 새내기로 묘사했으나 그의 엽기적인 외모와 덜떨어진 행동에 초등학생들까지 친근감을 느낀 것이 성공 포인트”라고 자평했다. 여기에다 어느 곳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맥가이버형’ 인물에 대한 선호, 과학적인 지식과 만화적 캐릭터의 결합, 무인도라는 원시공간에서의 생존법을 통해 문명의 변천사까지 담아내는 인문학적 상상력 등이 노빈손 시리즈의 성공 요인으로 작용했다.

▶ 게임 등 파생상품도 속속 등장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는 일어판, 영어판이 출간됐고 올해 중국어판이 나올 예정이다. 노빈손 캐릭터를 넣은 각종 상품.

시리즈가 다양해지면서 노빈손에게 가족과 친구들이 생겼다. 노빈손보다 20kg쯤 더 나가는 우레 같은 목소리의 여자친구 말숙이, 늘 사고에 휘말리는 노빈손 때문에 끊임없이 ‘부처님’ ‘성모마리아님’ ‘칠성할머니’를 가리지 않고 불러대는 엄마, 생전엔 위대한 무인도맨이었고 죽어서는 무인도 유령이 돼 시시때때로 노빈손의 약을 올리는 로빈슨 크루소 등이 감초처럼 등장한다.

또 책의 권수가 늘어날수록 노빈손의 경력도 화려해졌다. 1999년 무인도에서 간신히 탈출한 노빈손이 다시 2000년 아마존에 추락해 얼떨결에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신탁을 해결하고, 2001년엔 버뮤다에서 난파당했다가 수중 인간들의 오랜 숙원인 아틀란티스의 부활을 돕기도 한다.

4년 만에 한국 출판계 최고의 캐릭터로 떠오른 노빈손은 이제 해외로 눈을 돌렸다. 사실 출판사측은 노빈손의 탄생 단계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었다. 이처럼 재미있는 과학교양 책은 어떤 도서박람회에서도 보지 못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나라와 기후가 비슷한 일본을 공략했다. 그러나 첫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간단한 보도자료 형태만으로는 일본 출판 관계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2000년 9월 일본의 주요 출판사인 신초샤와 선인세 60만엔, 로열티 7%의 조건으로 ‘노빈손’ 수출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국내 출판사가 일본 판권을 사오는 데 보통 20만엔의 선인세를 지급하는 것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2001년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는 ‘무인도 생존수첩’이라는 제목으로 신초샤 OH문고본으로 출간됐다.

2001년 11월에는 중국의 하이난 출판사와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 ‘아마존 어드벤처’ ‘버뮤다 어드벤처’를 권당 선인세 1500달러, 로열티 7%의 판권 수출 계약을 맺었다. 중국어판은 올해 출간 예정이다. 올 초에는 대만 솔루션스 퍼블리싱과의 계약이 성사단계에 이르렀다. 조건은 권당 선인세 2000달러에 로열티 6~8%에서 조정중이다.

뜨인돌 박철준 부사장은 “일본어판이 흑백 문고본이어서 노빈손이라는 캐릭터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점이 아쉬워 신초샤와의 계약이 끝나는 대로 청소년·어린이용의 컬러삽화본을 따로 낼 생각”이라고 말한다. 이제 남은 노빈손의 목표는 영미권 공략. 그 전초전으로 지난해 말 ‘Following Robinson Crusoe’ 영문판을 냈다. 박부사장은 “영문판 보도자료가 아니라 아예 국내에서 출간된 영어판을 들고 미국 출판사들과 접촉할 계획”이라며 “해리 포터 시리즈의 미국판권을 갖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아동물 출판사인 스콜라스틱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또 놀이동산의 작동원리를 설명한 ‘노빈손 에버랜드에 가다’가 좋은 반응을 얻은 데 착안해 출판사측은 ‘노빈손 디즈니랜드를 가다’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

노빈손 시리즈와 홈페이지를 중심으로 노빈손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파생상품도 다양하게 선보였다. 홈페이지에 가면 인터넷 메일로 개발한 노빈손 캐릭터 카드와 컴퓨터 액세서리(바탕화면·커서·아이콘), 모바일 게임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를 체험할 수 있다. 팬시 용품도 개발할 계획이다. 출판사측은 게임전문업체 오픈타운과 손잡고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 모바일 게임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그 밖에도 두 차례 실시한 노빈손 무인도 과학캠프가 큰 인기를 얻자 아예 정례화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종이책에서 튀어나온 엽기적인 캐릭터 노빈손, 이제 그에게 한국은 너무 좁다.

김현미 주간동아 기자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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