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칼럼]보수들이 무엇을 했는데

  • 입력 2003년 1월 20일 20시 18분


코멘트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를 사전적 의미로 엄격하게 구별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상대적 개념으로 말하자면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패배감에 젖어 있는 부류의 성향은 보수이고 승리의 감격에 취해 있는 쪽의 주류는 진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보수들에게 요즘 세상은 왠지 억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5년 동안 TV 안보고 살겠다’는 식으로 한탄만 하고 있기보다는 왜 당신들이 이토록 초라한 위치에 서게 됐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더 필요하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고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했는지를 스스로 따져 물어야 한다는 말이다.

▼목소리 낸 진보…침묵한 보수▼

보수들의 반성을 위해 작년 6월에 발생했던 두 개의 사태를 예로 들어 보자. 그 해 6월 13일 미군 궤도차량에 의해 여중생 압사 사고가 일어났을 때 진보 쪽 인사들은 ‘민족의 자존심’으로 삭발까지 해가며 “미선이, 효순이를 살려내라”고 참으로 끈질긴 시위를 시작했다. 물론 16일 뒤 우리 바다에서 북한군의 포화로 해군장병 24명이 죽거나 다쳤을 때 바로 그 사람들은 “우리의 순국 장병들을 살려내라”고 나서지 않았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을 비판할 수 없다면 그때 반대편에 서 있던 보수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미군부대 담장까지 뚫고 들어가 ‘기개’ 있는 시위를 한 젊은이들을 개탄하면서도 침묵으로 구경만 한 쪽은 보수였다. 저들이 백악관 앞까지 달려가 “부시 나오라”며 소리 지르고 손가락 깨물어 혈서를 썼지만 보수들은 24명 전쟁영웅들의 희생을 놓고 “김정일 나오라”고 한 적이 없다. 희생자 비율로 따지면 손가락 깨무는 정도가 아니라 손가락을 잘라서라도 혈서들을 썼어야 계산이 맞는데 그렇게 한 일도 없다.

그 추운 겨울 전국에서 수십만명이 여중생들의 죽음을 촛불로 애도했고 그 모임이 대선에까지 영향을 미쳤지만 전사한 해군 장병들을 애도하고 북핵을 규탄하는 보수들의 모임은 과연 어디에서 볼 수 있었는가. “선생님이 우리의 주권의식과 자주의식을 느끼고 오라 했다”는 촛불시위 참가 학생의 말은 전교조 교사들의 열성을 보여주지만 또 다른 쪽 보수 선생님들이나 부모들은 진정한 한미관계를 이해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얼마나 열심히 가르쳤고 설득했는가.

이제 다섯 달만 있으면 작년 6월 미군 궤도차량 사고와 북한의 선제적 포격으로 세상을 떠난 두 부류의 먼저 간 이들에 대한 1주기 행사가 어김없이 열릴 터인데 과연 그때 진보와 보수들이 각각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다. 그동안 보수들의 안일이 어떤 상황을 초래했는지를 충분히 느꼈을 만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보수들은 반성해야 한다. 강물 위에 떠있는 나뭇잎처럼 편안히 누운 채 도도히 흘러 내려온 이 사회의 우월적 보수 분위기에 무임승차나 하면서 고통의 투자 없이 세상을 즐겨 오지나 않았는지를 말이다. 기업은 무임승차의 대표적 집단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활이 걸려있는 자유시장 체제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적극적이었던가. 기업인들과 인식이나 가치관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단체를 조직해 재계를 공격할 때 반대편에서 외롭게 기업사랑을 외치던 자발적 모임에 업계는 과연 얼마나 따뜻한 시선을 보냈던가.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과 기존의 가치를 지키려는 세력 사이에 균형이 맞을 때 사회는 발전한다. 이념이 어느 한 쪽으로 편향되면 사회라는 배는 침몰할 수밖에 없는데 불행하게도 그때 물에 빠지는 것은 양쪽 모두다. 건전한 보수와 건전한 진보는 함께 소중하지만 어차피 동행해야 하는 존재들이라면 이 시기에 강조되는 것은 둘 사이의 균형이다.

▼'무임승차' 말고 할 일 찾아야▼

이번 선거는 보수들의 무임승차 시대가 지났음을 명백히 깨우쳐 주었다. 보수는 난세에 탄생했고 격변의 시기에 오히려 성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보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할 일이 많은 변화의 시기이기도 하다. 보수들은 ‘이 나이에 무슨 일을…’하면서 뒷걸음하기보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하고자 하는 열성이 적은 것인지’부터 되묻는 기회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