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들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고시 제도와도 비슷했던 획일적인 공채를 거의 없앴다. 인사팀에서 한꺼번에 뽑은 후 계열사에 분배하는 방식으로는 필요한 사람을 필요한 때에 뽑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복잡해진 경영환경에 적응하고자 전문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해 온 반면 정부의 인력 운용은 수십 년 전 그대로다.
고시 제도는 자칫 정실 인사에 흐르기 쉬운 인재 선발 제도를 공평하게 만든 공로가 있다. 하지만 행정자치부가 고위공무원을 일괄적으로 뽑아 각 부처에 분배하는 방식은 복잡해진 현대 사회의 국가 경영을 수행하는 데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한번 시험을 잘 보는 것으로 ‘팔자를 펴고’, 그 후에는 별다른 경쟁 없이 고위직으로 올라가게 돼 공공 부문의 효율성과 전문성이 낮아진다. 또 기술직과 행정직이 뚜렷이 이분화된 상태에서 기술직 공무원 정원이 턱없이 부족해 기술 정책에 전문성이 반영되지 못한다.
이를 보완하고 전문성을 제고하기 위해 개방형 공직제를 도입했지만 실제로 민간 전문가의 수혈은 미흡하다. 지난해 1월 기준, 임용이 완료된 개방형 공직 117개 중 민간인이 선임된 경우는 13%뿐이다.
우선 현 단계에서는 행정고시와 기술고시를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관리자’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과장 이상의 직급에서는 행정직 기술직 등의 직렬 구분을 없애 기술직도 전문성을 바탕으로 행정 업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고시로 뽑는 인원을 점차 줄이고 궁극적으로는 고시를 자격시험으로 전환해야 한다. 고시만 통과하면 무조건 5급 공무원으로 임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격시험을 거친 후에도 일정 기간 인턴 등을 통해 업무능력을 검증받아야 한다.
한 번의 시험만으로 업무능력에 대한 검증 없이 높은 지위에 오르는 사례는 선진국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고시의 획일성이 없어지면 능력과 성과에 따라 차등화된 보수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용이해진다. 또 각 부처는 행자부가 뽑은 사람을 분배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필요한 사람을 뽑아 쓸 수 있다.
사법시험도 개혁이 필요하다.
지난해 사시 합격자 998명 중 S대 법대 출신이 177명, S대 비법대 출신도 이와 비슷한 156명이었다. 경제위기를 경험하면서 젊은 인재들이 안정적인 직업으로 법조계를 선호하는 현상이겠지만 경영학 인문학 의학 등을 전공하는 비법대 학생들도 사시에 몰리는 ‘사시 광풍’으로 각 학문 본연의 전공 교육이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시는 법학적 소양의 테스트가 아니라 단순한 ‘시험’으로만 인식되고 신림동 고시학원이 기업화되면서 법대의 법학 교육도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인문학의 위기와 이공계 지원 기피도 사시 광풍이 하나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사시 합격이 가장 확실한 출세의 지름길로 인식되는 현실에서 법학은 물론이고 다른 학문도 세계적인 경쟁력이나 내실 있는 교육은 기대할 수 없다.
의사고시처럼 사시도 법학을 정상적으로 교육받은 학생들이 큰 어려움 없이 합격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또 학교에서의 성적과 활동이 반영되는 경로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여러 정권에 걸쳐 논의만 되풀이하고 있는 로스쿨의 도입 등 법학 교육제도의 개편과 사시 합격생수의 지속적인 확대가 있어야 한다. 사시 합격생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경쟁을 거쳐 법원과 검찰은 물론 행정부, 기업, 비정부기구(NGO) 등 사회에 다양하게 진출해야 한다.
사시 과목의 개편도 필요하다. 민법, 헌법, 형법의 기본 3법을 필수과목으로 하되 상법, 행정법과 국제법 중에서 1, 2개 과목이 선택적 필수과목이 돼야 한다. 특히 국제화의 현실을 반영해 국제법과 국제경제법이 주요 과목으로 편성될 필요가 있다.
대표집필 박노형 고려대 교수, 이광형 카이스트 교수
▼한국은 2004년부터 2년간 국제통화기금(IMF)의 이사직(Executive Director)을 맡게 된다. 그동안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등은 단독으로 이사직을 맡아 왔고, 한국은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몽골 파푸아뉴기니 등 14개 국가와 같은 그룹에 속해 공동으로 1명의 IMF이사를 선출해 왔다. 그동안에는 호주가 그룹의 대표로 이사직을 독점했다. 한국은 협상 끝에 처음으로 이사국이 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국제기구에서 한국의 위상은 아직 낮다. IMF에서 한국의 출자비중은 0.77%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은 6.3%, 중국은 3.0%, 호주는 1.5%, 인도네시아는 0.97%이다. 출자 지분만큼 투표권을 행사하므로 경제 규모에 비해 발언권이 약하다. 이번에 이사직을 맡게 된 것은 향후 한국의 지분을 늘릴 수 있는 기회다. 또 같은 그룹에 속한 다른 국가의 이익도 대변하는 ‘국제적 플레이어’의 역할을 할 기회이다.
그러나 한국이 이사직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 같은 그룹 내 다른 회원국들의 우려가 크다. 한국은 관례상 국제기구의 임원에 직업공무원이 파견돼 왔다. 다른 회원국들은 국제금융분야에서 오래 경력을 쌓은 민간, 정부, 해외의 모든 전문가 중에서 적격자를 뽑지만 한국은 대상이 되는 인재의 풀이 협소하다.
현재의 공무원 인사제도는 해외근무가 승진에 불리하게 작용할 소지가 있다. 힘든 자리에서 고생하면서 오랫동안 전문성을 쌓기보다는 인사권자(장관) 곁에서 여러 보직을 거치면서 별 탈 없이 경력을 잘 쌓는 것이 승진에 유리하다.
국제사회에서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은 검증된 글로벌 전문가가 선발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도 인사제도를 신분등급이 아니라 계약에 기초한 성과 중심의 직무등급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국가가 필요한 우수 인재를 수시로 선발할 수 있고, 일반행정가(generalist)보다는 전문행정가(specialist)를 중점 육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종화 고려대 교수▼
▼“위원회에는 사회의 각 계층을 대표하는 명망가들이 등장한다. 정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꿰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전문 바보’이거나 지나친 이상주의자여서 정부가 도저히 바뀔 수 없는 것까지 주문을 너무 많이 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관료 자신들은 개편에 필요한 자료를 적당히 제공하며 뒤에서 요리한다. 정부의 조직과 운영 실태를 잘 모르는 위원들은 그저 뒤쫓아갈 수밖에 없다.”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초대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광웅(金光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지난해말 정부조직 개편에 관한 세미나에서 위원회제도의 실상을 이렇게 꼬집었다.
김 교수가 예로 든 중앙부처의 자문위원회는 그나마 나은 편. 아직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전문가층이 두껍고 민간위원들의 목소리도 커지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들이 운영하는 자문위원회는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에 설치된 위원회는 2000년말 현재 1만509개, 위원수는 14만2972명에 이른다. 이 중에는 이름만 걸고 활동은 거의 없는 위원회도 수두룩하다. 시민단체인 반부패국민연대가 2001년말 209개 중앙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 설립된 위원회 5977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4.5%는 1년 동안 단 한번도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다.
행자부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 지자체에 위원회를 정비하라는 지침을 내려보내고 있으나 개선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각종 위원회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없이 법안마다 위원회 설치 조항을 강제적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위원회 수를 줄이되 위원들에 대한 정보 제공을 강화하는 등 내실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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