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대북사업 ‘패키지딜'?▼
어떤 사건이든 관계자와 소식통이란 익명의 증언에 살이 붙고 가닥이 잡히기 시작하면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대북 비밀송금 건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내일신문’은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친한 사이였던 한 재계 원로의 말을 빌려 “2000년 3월 17일 중국 상하이에서 있었던 남북 접촉에서 정몽헌(鄭夢憲) 당시 현대회장이 대북 교류대가로 북측에 5억달러를 주기로 합의했는데 이 자리에 박지원(朴智元·대통령비서실장) 당시 문화관광부장관도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어느 현대그룹 고위 관계자는 “상하이회담과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최종합의한 (2000년) 4월 8일 베이징회담에 정 회장과 이익치(李益治) 당시 현대증권 회장이 모두 배석했다”고 말해 재계 원로의 말을 뒷받침했다.
당초 북측은 10억달러를 요구했는데 밤새 깎아서 5억달러로 합의했다는 게 ‘왕회장’이 친구에게 남긴 말이라고 하니 일단은 대북 비밀송금액=5억달러로 정리할 만하겠다. 5억달러 중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서 불법 대출받은 4000억원에서 빼내 보낸 2235억원(약 2억달러)뿐이다. 남은 것은 3억달러인데 그 중 1억달러는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가 2000년 6월 현대건설에 빌려줬다가 받지 못한 채 증발했다는 바로 그 1억달러라고 쳐도 여전히 2억달러가 빈다.
상하이와 베이징회담에 박지원씨와 정몽헌 이익치씨가 함께 참석한 것은 현대의 대북사업과 정상회담이 ‘패키지 딜(Package Deal)’로 다뤄졌을 개연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즉 5억달러를 주면 북측이 현대에 대북사업 독점권을 내주고 남북정상회담에도 응하겠다고 양다리를 걸쳤을 개연성이다. 2000년 6월 12∼14일로 예정됐던 정상회담 일정이 석연찮게 하루 늦추어진 이유가 계약금 잔액이 미처 송금되지 못한 때문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패키지 딜’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큰 그림은 ‘DJ와 왕회장의 프로젝트’로 그려질 만하다. 현대 ‘왕회장’은 대북사업을 독점하려는 기업가로서의 야심이 있었을 것이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관계의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려는 정치지도자로서의 숙원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이해가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필자는 DJ가 단지 노벨상을 받기 위해 뒷돈을 주고 남북정상회담을 서둘러 성사시켰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비록 남북정상회담이 노벨상 수상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을지언정 그것은 부수적 효과였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 어떤 명분이든 ‘진상을 까면 현대가 망하는’ 불법 탈법에 정경유착의 특혜까지 용납될 수는 없는 일이다. 보다 큰 문제는 정부와 현대가 너무 오랫동안 거짓말을 해 왔다는 데 있다. ‘통치행위’를 내세우고 ‘반국가단체’를 앞세우기 전에 어느 정도나마 진상을 밝히고 국민의 양해를 구했다면 상황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화를 위해서나 미래를 위해서’였다면 더욱 국민 공감을 얻어야 했다. 평화와 미래를 언제까지 뒷거래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DJ의 고백’ 먼저 이뤄져야▼
여야(與野)는 이 문제를 빨리 매듭지어야 한다. 그러자면 ‘DJ의 고백’이 먼저 이뤄지는 게 바른 순서라고 본다. 그것이야말로 임기를 2주일밖에 남겨놓지 않은 김 대통령이 국가최고지도자로서 국민에게 해야 할 ‘마지막 의무’가 아니겠는가. 다시 적당히 넘어가려 해서는 특검이 불가피하다. 그렇게 되어서는 새 정부가 출범하고도 이 문제로 몇 달씩 나라가 시끄러울 것이다. 남북관계를 고려하다가 국정부터 흔들릴 판이다.
이제 ‘그들의 프로젝트’는 다시 기획될 수 없다. 국익은 일방적으로 말해서도, 독점하려 해서도 안 된다. 하물며 더는 숨길 수 없는 것을 숨기려 해 봐야 국익을 해칠 뿐이다.
전진우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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