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⑦'人事실세' 대통령의 아들들

  • 입력 2003년 2월 12일 18시 41분


98년 2월25일 DJ의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밝은 얼굴로 담소를 나누는 홍일 홍업 홍걸(왼쪽부터) 세 형제. -동아일보 자료사진
98년 2월25일 DJ의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밝은 얼굴로 담소를 나누는 홍일 홍업 홍걸(왼쪽부터) 세 형제.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1년 1월. 여권 핵심부에서는 국가정보원이 청와대를 감청했다는 얘기가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나돌았다.

여권 핵심부에 전해진 이른바 국정원 ‘감청 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미국에 있는 셋째아들 김홍걸(金弘傑)씨에게 전화를 걸어 ‘최규선(崔圭善)을 만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계속 만난다는 보고가 올라오느냐’고 꾸짖었다. 그러자 김홍걸은 즉각 어머니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는 우리를 그렇게 탄압했던 국정원 말만 듣는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리고는 다시 최규선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해라, 국정원이 당신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한다’고 일러줬다. 최규선은 국정원측 인사들에게 ‘왜 그런 정보보고를 올리느냐’고 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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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민주당 등 여권에선 임동원(林東源) 국정원장이 대북 문제만 신경 쓰고 국내 문제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국정 난맥이 빚어지고 있다는 비판론이 비등했다. 이를 전해들은 DJ가 임동원을 불러 ‘국정원은 도대체 뭐하고 있느냐’고 질책했고 다급해진 국정원이 감청활동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감청까지 결행했다는 게 한 핵심 관계자의 증언이다.

이와 관련해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국정원은 2000년 여름부터 최규선의 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몇 차례 청와대에 올렸다. 그러나 그 보고서 내용이 거꾸로 최규선에게 전해지는 바람에 보고서를 작성했던 정치과 직원이 좌천되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경위가 어쨌든, 이 ‘감청 소동’은 대통령의 친인척, 특히 직계가족에 대한 관리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국정원 국내담당 2차장이었던 김은성(金銀星)은 2002년 ‘진승현(陳承鉉) 게이트’로 검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최규선이 2001년 무기구입 사업까지 간여하기에 내가 강력히 견제했더니 최규선과 김홍걸이 다른 사정기관을 통해 내 뒷조사를 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특히 인사에 있어 대통령 아들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장남인 김홍일(金弘一) 의원은 2000년부터 청와대의 ‘공식 허가’를 받고 공기업 인사에 개입한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최고위원과 곳곳에서 충돌을 빚었다.

권노갑측 한 인사의 설명. “2001년 초 정부직 인사를 앞두고 아들측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P씨가 권 고문의 집을 찾아왔다.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한 자리였는데, 권노갑이 자신의 발탁을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포장선물을 두고 갔는데, 뜯어보니 꽤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권노갑은 즉각 이를 돌려줬다. 그 일 때문인지 K씨는 당시 원하던 자리에 가지 못했으나 얼마 뒤 다른 자리에 발탁됐다. 아들측에서 그를 끝까지 챙겼다는 말이 돌았다.”

인사 문제에 있어 권노갑은 주로 당 공조직 출신 인사들을 챙겼다. 반면 연청 초대 중앙회장 출신인 김홍일은 당 외곽조직이던 연청 출신들과 가까웠고 서로 챙겨야 할 대상이 다른 만큼 ‘제한된 자리’를 놓고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DJ 아들들의 인사개입 잡음은 사실 정권 초기부터 시작됐다. 김중권(金重權)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가까운 한 청와대 출신 인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 출범 직후 대통령의 자제들이 인사에 관여한다는 얘기가 정보라인을 통해 계속 보고됐다. 이때는 김 전 비서실장의 영향력이 막강할 때라서 자제들이 김 실장을 어렵게 대했다. 특히 차남인 김홍업(金弘業) 쪽에서는 김 실장에 대해 거친 말을 하며 불평을 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이 때문에 김 실장은 법무비서관을 그에게 보내 설명을 하기도 했고 본인이 직접 김홍업을 만나 대화를 하기도 했다. 김홍업은 정치 경험이 없는 탓인지, 함량미달의 인물을 밀거나 자질구레한 부탁을 해오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김홍일쪽은 현역 국회의원이기 때문인지 비교적 금도를 지키는 편이었다.”

김홍업은 뚜렷한 자리가 없이 사실상 ‘야인’생활을 한 탓에 아무래도 가려가며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다는 한계도 있었다. 자연히 돈 문제에서도 상대적으로 풍족하지 못해 주변의 도움을 받았다. 김홍업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졌던 신건(辛建) 국정원장이 2002년 김홍업에 대한 검찰 수사과정에서 김홍업에게 1000만원의 ‘용돈’을 준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당시 김홍업측에서는 “김중권은 DJ가 친인척 문제에 대해 결벽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을 십분 활용해 DJ에 대한 최종 보고과정에서 김홍업이 추천한 사람은 비고란에 ‘둘째 자제 추천’이라고 일부러 표시해 탈락시킬 정도로 김홍업을 심하게 견제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민주당 주변에서는 김홍업보다는 김홍일의 인사개입에 대한 비판론이 더 많았다. 청와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민주당 당직자 M씨는 “막강 실세였던 김중권도 김홍일의 부탁은 10개 중 4, 5개는 들어주곤 했다. 김홍일은 김중권에게 인사부탁을 하기에 앞서 대통령과 조율을 해오는 경우가 많아 김중권도 거부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내에서는 연청 출신인 국립공원관리공단의 E씨, 전기통신공사의 A씨, 한국수자원공사의 Y씨 등 정부산하기관 임원이나 모 광역자치단체 정무직 부단체장을 지낸 K씨 등이 김홍일 케이스로 공직에 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정부 초기 당 주변에서 그나마 공기업 임원에라도 진출한 사람은 연청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연청에 참여한 사람들은 지구당 차원에서는 당 공조직과 갈등을 빚는 인물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공조직에서는 더욱더 불만이 팽배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홍일의 인사 영향력이 알려지면서 나중에는 공직을 원하는 사람들이 일단 김홍일에게 청탁을 하는 현상도 생겨났다. 99년 하반기 개각을 앞둔 시점의 일. 동교동 자택에 찾아온 기자들과 대화 중이던 김홍일에게 검찰간부 L씨가 전화를 걸어 “이번에 제가 꼭 진출하도록 밀어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김홍일은 국정원 인사에도 개입했다. 김홍일은 DJ정부 초기 이종찬(李鍾贊) 전 국정원장 등 국정원 고위간부들에게 국정원 인원 정리 대기 발령을 받았던 정성홍(丁聖弘) 전 국정원 경제과장을 구제해 달라는 청탁을 넣어 관철시켰다. 그렇게 구제된 정성홍은 김홍일의 배경을 십분 활용, 일개 과장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김은성 전 차장 방을 수시로 드나드는 등 국정원 내에서 ‘실세’로 군림했다는 것이 국정원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한 관계자는 “김은성은 이따금 ‘정성홍은 정말 마당발이다’고 말하며 정성홍의 교섭능력에 대해 감탄을 표하곤 했다. 국정원 간부들이 정성홍에게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정성홍이 진승현으로부터 거액을 받고 2000년 4·13총선 때 김홍일에게 1억원 전달을 시도했던 것도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DJ 정부의 핵심부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러나 인사 청탁의 경우 김홍일 등 특정인에 대한 로비만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웠다며 관련 실세 모두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말한다. 청와대 출신의 한 인사는 “2000년 후반기 이후 공기업 임원 인사는 권노갑 김홍일이 모두 동의해야 가능했다고 보면 된다. 청와대가 독자판단으로 한 인사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한 민주당 인사는 “4·13 총선에서 권노갑 케이스로 공천을 받은 것으로 소문난 K씨의 공천 축하 모임에 우연히 참석한 자리에 DJ의 막내아들 김홍걸이 나와 깜짝 놀란 일이 있다. K씨는 내부적으로는 김홍걸에게도 줄을 대고 있었던 것이다”고 말했다.

▼DJ부부와 세 아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세 아들 중 유일한 자신의 소생인 막내아들 홍걸(弘傑)에 대한 이희호(李姬鎬) 여사의 사랑은 유별났다.

80년대 초 DJ의 미국망명시절 집에 자주 드나들던 L씨는 “이 여사가 당시 대학생이었던 홍걸의 머리를 직접 감겨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홍걸이 국정원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최규선(崔圭善)과 장기간 유착관계를 유지했던 것도 이런 이 여사의 애정이 배경이었다.

민주당 관계자 C씨는 “DJ는 김홍일(金弘一) 의원의 경우 몸이 편치 않은 데다 민주화투쟁 때 연청을 이끌고 자신을 도왔다는 점 때문인지 그의 말은 대부분 들어주었다”고 말했다.

반면 둘째아들 김홍업(金弘業) 전 아태재단 부이사장측에서는 DJ정부 내내 “큰아들은 국회의원도 하는데, 우리는 이게 뭐냐”는 볼멘소리가 심심찮게 나왔다. DJ도 비교적 바른말을 잘 하는 김홍업을 다소 불편하게 생각했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상대적으로 김홍업에 대해서는 대통령 주변 인사들의 견제가 많았다. 청와대 출신 C씨는 “당에서 온 실세 비서관이 김홍업을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을 몇 차례 들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김홍업이 ‘왕따’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홍업과 DJ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있다. 실제 97년 대선을 전후해 만난 여러 사람에게 “DJ는 내가 청와대에 가더라도 할 말이 있으면 홍업이를 통해 하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권력은 부자관계뿐 아니라 형제관계도 변화시켰다. 홍일 홍업 홍걸 등 3형제간에는 갈등이 적지 않았다. 최규선은 검찰에 구속되기에 앞서 육성 녹음테이프를 통해 “나와 김홍걸이 2000년 2월 사우디아라비아 알 왈리드 왕자로부터 10억달러를 투자받아 벤처회사를 세우려고 했으나 김홍일이 사생결단으로 이를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된 일이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자신을 포함해 권노갑(權魯甲)-김홍걸 및 이희호 여사를 축으로 하는 라인과 김홍일-김은성(金銀星)-정성홍(丁聖弘) 라인간에 갈등이 빚어졌다고 최규선은 주장했다.

▼특별취재팀 명단▼

▽팀 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 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김동원 김두영 신석호 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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